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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26화 (126/257)

00126  (17) 남도풍운  =========================================================================

(17) 남도풍운

주변은 고요했다. 밖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과 무관하게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기에는 무료하여 이야기나 들을 생각으로 의문을 내비쳤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진주목의 힘이 크다고 해봐야 임기는 3년에 불과합니다. 재임도 가능하지만 애초에 이곳 출신도 아니라서 기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번 일에 끼어들게 되었을까요?”

“예빈경의 기반이 진주이지.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네. 홍관의 담량이 과연 예빈경을 맞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지. 홍관은 불과 2년 전에 과거에 급제한 햇병아리라네.”

유재의 설명에서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겨우 2년 전에 과거에 급제한 자가 진주목을 맡을 수 있습니까?”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네. 명신 강감찬도 과거에 급제하자 바로 예부시랑에 제수되었지. 더구나 홍관은 서성(書聖) 김생(金生)의 필법을 이은 것으로 유명한데, 집상전(集祥殿, 왕의 정전)의 편액을 멋들어지게 쓰면서 폐하의 신임을 받았지.”

홍관은 나도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살해를 당한 신료 중 일인으로 그를 죽인 자는 바로……. 척준경이었다.

김리를 비롯해 어찌 이리 인연의 끈이 연결되는 것인지 참으로 오묘하기만 했다.

‘윤관의 동북 9성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후임으로 동북면병마사로 파견된 이가 바로 홍관이었다.’

이래저래 나와 엮인 것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때, 잠잠하던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문이 활짝 열리고, 구 기관이 나는 듯이 뛰어들어왔다.

“예부시랑께서 속히 수부(水府)로 납셔야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실질적인 감투를 지닌 사람은 오직 유재 뿐이었다. 유재를 찾는다는 것은 예빈경 강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예빈경 강보라면 직위로든 가문으로든 상장군 백휘직이나 진주목 홍관이 뻗대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변고라고 있습니까?”

구 기관의 표정이 워낙 다급하자, 얼른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 곽여가 물었다. 구 기관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 소리쳤다.

“여주지부(廬州知府. 합비태수)가 상장군 백휘직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여주지부? 설마 진짜 여주지부란 말인가? 그가 무슨 일로!”

유재는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탐라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히 나눈 터라 내가 송군과 마찰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출현이 예빈경 강보를 억누르기 위한 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동은 관승을 송군의 지휘관으로 꼽았다. 무관으로 치자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채경이나 동관이 이번 행사의 위임자로 선택한 인물은 실질적으로 여주지부였구나.’

여주지부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직급만 듣고 사람 이름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광범위했다. 그러나 유재는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이름을 입가에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썩은 내를 맡는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혜경(呂惠卿), 그 늙은 너구리가 감히 분수도 모르고 고려 정사(政事)에 끼다니!”

선비다운 풍모를 보여주었던 유재가 이리도 격분하는 것이 어쩐지 이해될 것 같았다. 여혜경은 지금쯤 환갑은 훌쩍 넘겼을 나이로 한때 왕안석의 절친한 동료였기도 하다. 그러나 왕안석이 실각하고 나자 즉시 안면을 바꿔 반대파로 돌변했다. 어찌 보면 채경과 비슷한 행보로 볼 수 있다. 처세에 민감했기에 죽기 직전까지도 관직에 있었다고 한다.

수부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고성을 주고받으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나와 김리는 유재와 곽여 뒤에 시립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분분히 인사가 오고 갔다. 예상한 인물들은 모두 있었다. 걸걸한 목소리와 우람한 체구를 지닌 상장군 백휘직, 비쩍 마른 체구에 깐깐함을 겸비한 진주목 홍관, 가장 왜소한 체구지만 눈빛만은 형형한 예빈경 강보, 마지막으로 연방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연륜을 과시하는 백발노안(白髮老顔)의 여주지부 여혜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장군 백휘직과 진주목 홍관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하는 모양새였다. 설마 예부시랑 유재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반면 예빈경 강보는 예부시랑의 합류에 심적 위안을 얻었는지 긴장했던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들 중에 내 정체를 아는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나를 유재나 곽여의 호종(護從)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여혜경은 주름이 가득한 볼살을 매만지며 유재를 향해 말했다.

“왕께서 남경 순행 중이라 들었소이다. 그러한 때, 예부시랑이 한가롭게 남해까지 내려오실 줄이야…….”

유재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감히 폐하를 왕이라 칭하다니, 그대의 혓바닥은 여러 개가 되는 모양이군. 공무로 왔다면 송과 고려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신의를 스스로 깨는 불충이고, 외유라면 오만방자한 소양을 밝힌 것이니 동향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생각해보니 여혜경의 출신지도 복건이었다. 여혜경은 유재의 질타를 받고도 느물느물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늙은 너구리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유재는 여혜경을 무시하고 주변을 다시 질타했다.

“주상의 위엄이 한낱 지사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어찌 경들은 침묵하는가? 주상을 뵙기에 창피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천자국을 지향하나 외방에서는 왕국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지요.”

상장군 백휘직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유재는 당장 뒷골이라도 잡고 쓰러질 기세였다. 진주목 홍관이 연타를 날렸다.

“송으로 사신을 보내 왕으로 책봉을 허락받은 것은 이미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 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심까지 없는 것은 아니니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은 그런 지엽적인 사실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네, 이놈!”

유재가 손가락으로 홍관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어찌보면 기묘한 현장이었다. 백휘직, 유재, 홍관은 모두 귀화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귀화한 유재가 백휘직과 홍관을 꾸짖는 것은 지켜보는 나로서는 생경한 기분이었다.

강보가 유재의 팔을 부축하고는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대들은 송의 신하인지 고려의 신하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지경이로군. 고려가 송에게 국왕 책봉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부득이한 마찰을 피하고 선린(善隣)을 위한 것이었다. 태조께서 ‘천수(天壽)’라는 연호를 제정한 것은 곧 하늘에서 권력을 위임받은 천자국임을 명시한 것임을 모르는가? 나는 오늘 그대들에게 매우 실망했다. 특히, 진주목!”

강보는 모인 이중 가장 왜소한 체구였지만 눈빛만은 누구보다 활활 타올랐다. 그의 눈길을 받은 홍관은 절로 눈빛을 아래로 떨굴 정도였다.

“서성, 김생의 필체를 모사(模寫)하는데 일절이라 들었다. 폐하께옵서 그대의 충성과 재주를 믿고 집상전의 편액을 쓸 수 있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었건만 껍질을 까고 보니 모화자(慕華子, 중원의 문물을 경외하는 자.)라니…….”

“중원이 만물, 만학의 뿌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 모화자라 하여 편협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시대착오가 아니겠습니까?”

강보의 눈길을 피하며 나직하게 반론하고 있었지만 마치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내가 대민국을 개국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일을 눈앞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너무 흐르다 보니 예전의 가르침은 많이 퇴색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국을 위해 소국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이까짓 야명주 따위로!”

강보는 자신의 발아래로 놓여 있던 작은 함을 들어 올리더니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는 엄지손톱만 한 진주 수십 개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탁자에서 통통 튀던 진주들이 사방으로 시끄럽게 비산(飛散)하는 모습과 그 진주를 잡기 위해 느물거리던 여혜경이 급히 움직이는 모습은 한편의 단막극을 보는 것처럼 해학적이었다.

“예빈경, 미쳤소! 지금 이 야명주가 얼마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오? 일개 성을 사고도 남을 막대한 재보란 말이오!”

홍관은 체면 때문인지 애써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여혜경과 백휘직, 그들을 따르던 무관 셋이 허둥지둥 바삐 움직이며 진주를 주워담았다. 진주는 대략 스무 알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저 정도라면 탐라성주가 보관하고 있던 천연 진주를 모조리 긁어 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진주를 대가로 이들은 강보에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백휘직, 진주 강가가 그따위 야명주를 아쉬워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요구했지? 해창의 관할권을 진주목에게 돌려달라고 했지? 양도의 상장군이 왜 진주목의 권한을 올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까?”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긴 했다. 진주목은 거제까지 관할에 두고 있었는데 남해는 여수와 거제 사이에 존재한다. 상식적으로 남해 역시 진주목 관할이 되어야 맞는데 경주, 김해, 창원, 부산 지역인 영동도(嶺東道)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합포 수군의 힘을 반분시키고, 창선 사고(史庫) 관리와 봉수대 권한까지 넘보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우리의 이목을 막고 장보고 행세를 하려는 것이 아니냐!”

남해도가 영동도에 속한 것은 경상 남해를 책임지는 유일한 수군이 합포 수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창과 남해 봉수대 관리, 창선 사고까지 모두 관할했다. 만약 해창이 진주목 관할로 인정이 된다면 앞서 열거한 모든 것이 진주목의 의중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그사이 쏟아진 야명주를 모두 회수하자, 여혜경은 안도가 되는지 털썩 의자에 앉았다. 강보의 질타도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감히 대국의 신하를 이리도 능멸하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였지만 여혜경이란 사람의 면모는 체면과 염치를 따지는 위인은 아니었다. 유재는 화가 지나쳐 오히려 허탈감이 드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복건자(福建子)가 오욕(汚辱)으로 변한 것은 다 네놈 탓이다. 민국의 율기(律己)를 학풍으로 이어받아 장차 율학의 대두(擡頭)를 이끌 신성이었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구나. 네놈은……. 백만 민인(?人)의 수치다.”

복건자는 보통 3가지의 뜻을 가진다. 하나는 오대십국 시절, 민국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둘째는 복건 출신의 유명한 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셋째는 가장 최근에 생긴 뜻으로 바로 여혜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왕안석이 죽자 안면을 바꾼 여혜경을 조롱하며 간사하고 교활하다는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복건자라는 말이 민국인 전체를 의미하고 있었으므로 민국인은 간사하고 교활하다는 허무맹랑한 인식이 그럴듯하게 퍼지고 있었다. 위정자들 사이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현대에서조차 지역 차별을 조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시대 관점으로 보면 북송 시대까지 주로 관인들은 북방 출신들이 많이 뽑힌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복건자와 같은 의미로 촉 지방 사람을 ‘천약저(川??)’라고 놀렸는데, 더럽고 멍청하다는 의미였다. 금나라에게 밀려 남송이 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비하는 더 오래갔을지도 모른다. 천약저와 복건자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은 남송 이후, 촉인과 복건인이 주역으로 떠오른 후다.

나서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터졌다.

“삐딱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곧은 것 같고, 속이는 데도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위로는 귀여움을 구걸하고, 아래로는 위엄을 함부로 떨친다. 가까운 자들일수록 감히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니 그런 자들을 제거하기란 어렵다.”

원나라 초기, 허형(許衡)이란 명신이 간신에 대해 남긴 말이었다.

그저 호종 정도라고 생각한 미천한 이가 고관들 앞에서 지적하는 격이 되었으니 안색이 급변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예부시랑 뒤에 서 있지 않았다면 호위 군관에게 당장 멱살을 붙잡혀 끌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부시랑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기꺼이 척간표신(擲奸標信, 간신을 잡는 데 쓰는 명령서)이 되겠습니다.”

“참으로 방자한 놈이로구나!”

상장군 백휘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의 노화에 시립하고 있던 덩치 좋은 군관이 나를 무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의 귀여운 협박이었다.

============================ 작품 후기 ============================

글이 조금 늦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까페에는 근황을 올렸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1. in 삼국지가 이북으로 전18권으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최종 원고 교정 중이고, 엔딩을 조금더 보강할 예정입니다. 17권은 교정 끝나서 등록 들어갔습니다.

2. 종이책 원고 1권의 교정이 끝났습니다. 1부 전3권이고 각권 600쪽 분량 정도입니다.

3. 고려편이 뒤이어 이북으로 출시됩니다. 불꽃처럼도 가능은 한데, 연재분이 부족해서 뒤로 미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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