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4 (16) 금문우객(金門羽客) =========================================================================
“매정하게 어찌 저를 두고 먼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가까이 다가온 젊은이는 곽여만큼이나 체격이 좋았다. 뒤에는 책 상자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수십 권은 담겨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곽여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는 곽여의 제자가 아니라 곽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상주(尙州)에서 온 유생이라고 했다. 차기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스승을 찾던 중, 곽여가 낙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와 그때부터 막무가내로 제자를 사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곽여는 귀찮으면서도 간혹 그 지식을 시험해보니 꽤 영민하고 사람이 선한 구석이 있어서 계속 지켜보는 중인 것 같았다. 아니면 이런 밀고 당기는 관계가 은근히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인제 그만 해라. 이곳에 손님이 있는 것을 모르겠느냐!”
내 앞에서 청년의 질타를 듣는다는 것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곽여는 호통을 치며 청년의 말을 가로막았다.
청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행색은 영락없는 잡척인데, 스승님의 손님이란 말입니까?”
내 행색이 허름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엎드려 나에게 인사를 하니, 그 돌연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맞절이 나갔다.
“스승님의 고매함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사온데, 손님이라 칭하실 정도면 필시 범상한 분은 아니실 것입니다. 제 입이 가벼워 잡척이란 말이 절로 나왔으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단숨에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그 역시 범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책 상자를 둘러멘 모습을 보면 어디선가 기록으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큼 사과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더니 곽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청년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계보(谿甫)야, 인사는 그쯤하고 뒤로 물러나 있거라.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참이니라.”
계보?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러다 나는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오죽 놀랐으면 무릎을 치고 ‘그래!’라는 말을 큰 소리로 떠올리는 바람에 세 사람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계보는 김수자(金守雌)의 자다!’
김수자의 본래 이름은 김리(金理)다. 지금 이름을 물어본다면 김리라는 이름을 댈 것이 틀림없다. 김수자라는 이름은 관직에 올라 공을 세운 후 받은 이름이니 말이다.
김수자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곽여나, 유재 같은 인물들뿐 아니라 이자겸, 윤관, 오연총……. 그 어떤 이름도 김수자 앞에 놓을 수 없었다.
그건 김수자와 척준경과의 얽힌 굴레였다. 척준경이 역신임에도 그나마 다른 역신과 차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죄업을 김수자가 의도치 않았지만 크게 줄여줬기 때문이다.
김수자는 상주 출신으로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스승을 찾아 책 상자를 짊어지고 사방을 돌아다녔다고 전한다. 내 앞에 있는 청년, 김리가 바로 그때인 셈이다. 그렇게 공부하여 결국 예종때 치른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야인 기질이 있었는지 곧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전원생활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는 낙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인종이 청렴하고 욕심이 없다는 평을 듣고 그를 직사관(直史館)으로 임명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다.
이자겸의 전횡을 막기 위해 인종이 먼저 선수를 치자, 척준경은 앉아서 죽을 수 없다며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궁궐에 불을 지른다.
궁궐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왕조 국가에서 가장 큰 반역에 속하는 행위다. 역사와 전통이 그대로 파묻혀 버려, 현대에서 역사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죄악이기도 하다.
직사관이라 숙직이 빈번했던 김수자는 궁궐이 불타자마자 가장 먼저 ‘국사(國史)’를 짊어졌다. 역대 왕의 실록은 충주나 창선 사고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현재 왕의 기록은 궁궐에서 사관들에 의해 계속 기록 중이었고, 그에 덧붙여 수많은 장계, 관료들이 매일 같이 적는 일기, 희귀한 중원 사료 등 사고에 보관되지 않은 중요한 유산을 이대로 태울 수 없다는 각오였을 것이다.
결국, 그의 바람대로 국사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자칫 척준경의 큰 죄과로 남을 뻔했던 국사는 결국 임진왜란 시기에 불타 버리게 되고, 일본이 그 악업을 가져가게 되었다.
만약, 척준경이 저지른 방화로 국사가 타버렸다면?
척준경은 고려사 중기의 역사 공백을 불러일으킨 악역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김수자는 이후, 인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 근신(近臣)의 칭호를 받았지만 스스로 물리치고 노모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선택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김리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를 만난 것은 척준경과 김리 사이의 업이 이어진 결과일까?
“이제는 우리를 방해할 것이 없으니 제대로 들어봅시다. 척준경 장군.”
곽여가 재촉했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척준경이란 이름을 듣자 김리는 호들갑을 떨었다.
“척준경? 요 사신단이 자신만만하게 앞세운 전사들을 모조리 꺾고, 수천 여진에 단신으로 말을 달려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그 척준경 장군이 맞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차림으로……? 아! 혹시 전하의 밀명을 받고 암행을……! 읍 읍 읍!”
사서에는 김리가 수다쟁이라는 말은 없었다. 아까부터 지켜본 결과로는 원래 말이 많고, 생각한 것은 바로 튀어나오는 성격이 아닌가 싶었다.
곽여는 김리를 밉살맞게 바라보더니 학우선을 접어 그 입을 세게 내리쳤다. 말을 하다말고 합죽이가 되어 앓는 소리를 내는 그 모습이 너무 희극적이라 다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한 마디라도 다시 끼어들면 계보, 네놈을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곽여의 엄포가 즉효였는지 김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시금 주변이 물소리로 가득 차자 차분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김리가 얼마나 끼고 싶었는지 수차례 달싹거렸지만, 곽여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비 맞은 강아지처럼 움츠러드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한 식경 정도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세 사람의 표정은 비슷했다. 가벼운 한숨이 나오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저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김리는 이제 말을 해도 되는지 슬쩍 곽여의 눈치를 살피더니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정말입니까?”
내가 했던 이야기가 진짜라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임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리는 연방 ‘허, 참.’을 토해냈다. 기가 막힌다는 뜻이다.
곽여는 팔짱을 끼고, 김리를 향했다.
“전라도는 고려 제일의 곡창으로 태조가 고려를 창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 귀족들의 도움이 컸다. 거란과 여진의 위협이 커지면서 우리의 눈은 항시 북쪽을 향했고, 상대적으로 남부의 귀족들에게 향하는 중앙의 눈은 소홀해졌지. 주상께서 남경으로 순행에 나선 것도 그 폐해가 적지 않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헌데, 대관(大官)들이 탐라를 노리고 있을 줄이야……. 명목상 송이 탐라를 소유하게 된다면 주상께서도 달리 쓸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척 장군을 은밀히 도와 그 시도를 무산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까 척 장군의 말을 듣지 못했느냐? 이미 척 장군은 양도 수군을 이끄는 백 상장군의 친아우를 죽였고, 송군 다수를 상해(傷害)했다.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 요로 사람을 보내 알릴 수도 있고, 인주 이가의 정적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도 있다. 참지정사의 밀명이 있었다고 하나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으므로 척 장군은 그대로 버려질 가능성이 있다. 자칫 이는 권문세가 간에 사화(士禍)로 번질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불순한 세력 확장을 두고 보고만 있으실 것입니까?”
곽여는 대답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 사이, 잠자코 있던 유재가 말문을 열었다.
“예부상서는 일찍이 여러 차례 송을 다녀왔다. 아마도 그때 유력 귀족들과 연을 맺었을 것이다. 황제가 정사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몇몇 유력 대신이 정사를 돌본다고 하니 그중 한 명의 힘을 빌린다면 얼마든지 탐라 복속을 합법적으로 만들 수 있다.”
예부상서는 외교와 교육을 관장하는 으뜸 관원이었다. 그 위로 판예부사 자리가 있긴 하지만 이건 왕족들에게 내리는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 외교를 관장한다는 이야기는 이번 일을 얼마든지 송과 협력하여 무마할 수 있다는 실력자라고 유재는 미리 전제를 깐 것이다.
이어질 말에서 과연 유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직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말투는 딱딱해졌다.
“척 장군.”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탐라를 살리려는 까닭이 무엇이오?”
“권력과 사병을 멋대로 전횡하여 자신들의 이득을 공고히 하려는 귀족들의 음모가 아닙니까? 그것 자체만으로도 역모나 다름없습니다. 척 장군은 그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김리가 끼어들었다. 당연한 것을 어찌 묻느냐는 김리에게 유재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자중할 것을 명했다. 싸늘한 태도에 김리는 움츠렸다.
“인주 이가가 어떤 식으로 세력을 확장했는지는 장군도 잘 알 듯싶고, 다른 거대 가문들 역시 정당한 명분 속에서 크게 흥한 곳은 없다시피 하오. 무언가를 얻으려면 누군가가 가진 것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이오. 탐라는 예부터 거칠고 수고로운 땅이라 일부러 고려로 귀속시키지 않은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갈라전 역시 그러한 연유로 기미주(羈?州) 취급을 했지. 지금 저들이 당장 탐라를 차지한다고 해서 단숨에 인주 이가나 경주 김가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당장 수천의 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실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탐라 귀속은 당장 이익을 보기 어려운 것이 맞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유재의 표정을 살폈다.
“탐라인이 원하지 않습니다.”
“장군은 고려인이오. 그런데 탐라인의 편을 들겠단 말이오?”
“수천의 입을 먹여 살려 할 것을 알면서도 귀족들이 탐라를 원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인자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알고 예부시랑도 아십니다.”
조금씩 목소리가 격앙되고 있었다.
“예부시랑의 말대로 그들의 행위는 지금까지 고려의 권문세가들이 해왔던 행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으로 고려가 크게 영향을 받을 일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놓아두면 됩니까? 스스로 율학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정도(正度)를 지키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지키라고,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가세를 키우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름 아닙니까!”
마지막은 주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그리고는 유재와 잠시 눈싸움이 펼쳐졌다.
“서희(徐熙)는 강동 6주를 어찌 얻었습니까? 고구려의 후신임을 확실히 하여 명분을 얻었으나,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약속한 입조(入朝)를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요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입조를 지키지 못한 것은 송과의 교류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송은 어떠했습니까? 함께 싸울 것을 청하자 뒤로 물러섰습니다.”
어느덧 곽여도, 유재도, 김리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탐라를 위해 싸우려는 이유입니다. 부족합니까?”
이어진 침묵을 깨트린 사람은 곽여였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곁에 있던 예부시랑의 무릎을 가볍게 쳤다.
“인제 그만 하십시다. 척 장군의 결심이 저리도 올곧은 것을 확인했으니 야인, 곽모는 기꺼이 마음을 열어주리다.”
그러더니 근엄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명백한 하대였지만 오히려 내게는 기껍게 들렸다. 나를 지인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도 집단에 들어가면 어리석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 자신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지라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운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윤리를 공동체의 규범과 동일시하는 행위다. 사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경우다. 척 장군 자네가 앞서 말한 데로 자신의 행동을 관대하게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작금에 이르러 그런 현상은 토호들을 통해 심화하였다. 그것은 이미 개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밝혔다. 그래서 동궁에게도 항상 말씀을 드렸지. 훌륭한 왕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윤리적 행동을 칭찬하고 적절한 보상을 치러줄 수 있는 보통 수준의 사고자(思考者)라고 말이다.”
곽여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 신하들이 왕을 신뢰하고 맡은 소임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런 뜻에서 그대에게 한 가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대가 한 발언들은 인주 이가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인주 이가의 이익이 윤리적인 이익과 부딪친다면 그대는 기꺼이 인주 이가를 버릴 수 있다는 뜻인가?”
“버리지 않겠습니다.”
삼 인은 흠칫했다. 반대의 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곽여의 말대로라면 그들을 버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그들을 이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