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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23화 (123/257)

00123  (16) 금문우객(金門羽客)  =========================================================================

나는 잠시 이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토호무단(土豪武斷), 소민지시호야(小民之豺虎也)라…….”

두 사람의 눈이 일시에 반짝였다.

글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니 이 글귀를 들어본 적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뜻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토호세력들의 초법적인 행위는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백성에게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말이다. 즉, 그러한 상황에 내가 맞서고 있으니 어찌할 것이냐는 우회적인 질문인 셈이다.

유재는 탐스러운 수염을 한두 차례 쓰다듬더니 말문을 열었다.

“나는 민(?, 909년~945년) 사람입니다. 민 태조, 왕심지(王審知, 재위: 909년~925년)는 당 말기, 복건(福建)으로 이주하여서는 대민국 이후, 중앙에서 소외되어 낙후한 복건의 개발을 진행하고,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하여 개민왕(開?王)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손에 넣었지요. 이 모두가 율기(律己)를 관리들의 일칙(一則)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민국 계승을 천명했음에도 나라의 이름을 민(民)이 아닌 민(?)으로 했던 것은 자신의 그릇이 민 태조의 유업을 잇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언대로 한 지역(?, 복건에 거주하는 부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임.)의 선한 왕은 될 수 있었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어렵게 율기를 심은 민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천하로 보면 낙후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땅을 놓고 골육지쟁이 펼쳐졌지요. 절도사 시절부터 왕심지가 20년 동안 펼친 선정의 결과는 그 자식들의 부덕으로 말미암아 20년간의 혼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은 40년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민의 백성은 이 시대를 어찌 기억할까요? 그래도 20년의 선정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좀 살만해졌다 싶으니 자신들의 모든 것을 망쳐버린 원한이 남았을까요?”

유재의 대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오대십국 시절의 민나라는 시조인 왕심지가 선군이었지만 후손들이 막장이라 40년을 채우지 못하고 망한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심지 선정의 이유가 율기였다니…….

내가 한 일이 과연 잘한 결과였는지 회의적이었을 때, 이미 나를 본으로 삼아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그 뒷마무리가 너무 아쉬웠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내가 세운 민 제국이 400년이나 간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재는 과거를 논하면서 자신이 이미 보고 느낀 것이 있기 때문에 옳은 일이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율기를 언급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율가의 학통을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율가를 처음 주창했을 때, 율가의 주된 교육 대상은 관료들이었다.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인 관료 체계의 사상적 기둥이 되어야 언제고 진행될 부패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 내 생각에서였다. 제갈량을 위시한 많은 인재가 이론 완성에 동참하여 뜬구름 잡는 소리는 최대한 지양하고, 지킬 수 있는 한도를 설정했다.

내가 주로 참고했던 것은 단연 정약용의 목민심서였고, 조선 시대 관료들의 불문율이라던 사불삼거(四不三拒)가 부칙(附則)으로 따라붙었다. 그중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조정할 수 있는 율기였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봉공(奉公)의 자세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 역시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관료라면 봉공이나 애민은 절로 따라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단순한 규칙의 제정으로 많은 사람이 따르게 하고 싶었다.

조조는 능력이 있는 자라면 흠결을 가리지 않고 썼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도덕성이 없다면 그것은 곧 정당한 지도력의 상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한다. 도덕성은 흠잡을 수 없는 데 능력이 없는 경우는 오히려 백성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방통의 문제 제기였다. 나는 그 해법으로 집단 지성을 활용한 정조의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내세웠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신진 관료와 국가 난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고, 그 과정을 통해 해답을 찾아내고, 정치적 동지를 얻었다. 또한, 답변에 따라 성적을 매기고, 그 답을 가지고 다시 고위급 관료와 실현 가능한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나는 그 과정을 지방의 주(州), 군(郡)까지 확대했다.

지방 관료의 상소 중 난제가 있으면 이해관계가 없는 국자감의 신진들이 제일 먼저 검토했고, 그 검토한 결과를 중신들이 실현 가능한지 다시 회의에 부쳤다. 시일이 촉박한 경우는 국자감 선에서 해결하지만, 첨예한 갈등이 예고되는 경우는 중신들의 토론 외에도 비정기적인 과거 시험에 문제로 채택하여 그 답을 전국적으로 구하는 경우도 도입했다.

세종대왕이 25년간 공들이며 전세(田稅)를 개혁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첫 단추를 과거 시험을 통해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를 가졌는데 그럼으로써 집사광익(集思廣益)을 실현했다. 집사광익이란 여러 사람의 생각을 수렴하여 모두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의미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성숙된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유재가 민나라를 언급하자 내가 잠시 회상에 빠진 사이, 곽여가 운을 뗐다.

“장군을 내가 잘못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군의 문재(文才)가 제법이로소이다. 잠시 그 출전(出典)을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일찍이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쉬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창작임이 분명한데 내가 아는 장군의 모습과는 영 달라 내심 놀랐소이다.”

어찌 보면 오만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읽지 못한 책이 없다는 것을 간접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곽여의 이런 자신감에 유재는 고졸한 미소를 보였다.

“장군의 출신이 변경인 곡주이고, 꽤 오래전부터 인주 이가를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장군의 입에서 토호무단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는 말이지요. 그래서 장군의 내심을 더 짐작하기 어려워졌소이다. 이럴 때 좋은 것은 서로 마음을 터놓는 것이지요. 장군이 믿지 못하겠다면 이 몸의 내심을 먼저 털어놓도록 하지요.”

곽여는 유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예부시랑께서는 평소 율기를 신념으로 삼는다는 율학자(律學者)이니 토호무단의 횡포를 묻는 장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소이다. 그러나 나는 다릅니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줄곧 내게 공대하고 있었다. 직급이든 나이로든 나보다 훨씬 윗줄인데도 초면에 공대한다는 것은 예의범절이 깍듯하다는 의미다. 반대로 내 무례가 그들에게 악감정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에 언행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했다.

“사람이 어찌 악인만 있겠습니까? 선한 이도 있으니 세상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위해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권장할만하나 그 선이 어디에 있느냐를 정하는 것은 군자가 아닌 이상 스스로 너그러운 잣대가 적용되지요. 고려는 애초부터 호족 연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광종이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호족 탄압책을 폈지만, 결국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만약, 호족을 전부 억누르는 데 성공하여 임금이 모든 권력을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그 임금이 아까 예부시랑께서 말씀하신 민국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면 한 지역의 문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로 피해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고로 법과 원칙이 제대로 서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토호 그 자체가 원흉으로 그려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장군께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장군이 의도하는 바가 누군가를 배불리 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인지 아닌지, 먼저 그 배경을 밝히는 것이 순리입니다.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면 그것을 밝히지 못할 까닭이 없지요. 신념과 대의는 다릅니다.”

과거 소동파가 나에게 말해준 민 제국의 멸망은 원시적인 지방자치제의 시행이 파국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지역을 잘 아는 일꾼을 뽑아 지역을 위해 일하게 하자는 취지가 오히려 토호들의 권한을 상승시켰고, 마치 미국과 같은 연방 체제로 돌변해버렸다. 문제는 그런 연방 체계를 받아들일 인식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은 절도사의 난립으로 촉발된 당나라의 멸망으로 재차 확인된다.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도입했을 것이다. 제대로만 시행되면 중앙 조정의 행정 부하(負荷)를 줄여주고, 정치의식 함양을 저 먼 시골 구석구석까지 전파할 수 있으며, 대도시 과밀 집중을 억제하고, 지방 인재들이 고향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삼권 분립을 넘어 권력의 다원화를 통해 독재의 출현을 막기 위해 고심했고, 지방자치는 정치권력을 유연화시킬 수 있는 도구라고 인식됐다. 정치권력이 절대화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퇴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시기에서 중앙집정제의 역할이다. 민주주의에서 중앙집정제는 퇴행이겠지만 현재로만 보자면 가장 효율적인 정체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의 흥성은 그러한 지배 구조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논리를 보장했다.

고려의 호족은 그런 면에서 민국이나 당나라의 실패한 분권 정치보다는 세련된 면을 띄고 있었다. 강대한 외적이 북방에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도 고려라는 벽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군사, 외교를 왕에게 일임하면서 상부상조하는 형태를 취해왔다. 언뜻 보면 미국의 연방제와 다름없다.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처럼 그러한 상부상조의 원칙이 서서히 깨져가는 상황이었고,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캐물을 것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제도의 정비를 통해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 곽여의 주장이었다. 너무 정론이라 딱히 반박할 거리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유재를 바라보았다. 유재와 곽여의 입장 차가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발언을 통해 확인했다. 율학자라고 서슴없이 곽여가 칭할 정도라면 율가의 뿌리는 복건에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왕안석도 장강 이남에서 민국 실록의 뿌리를 찾아, 그것을 신법에 반영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저는 예전에 동파거사를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동파거사를? 장군은 참으로 복을 타고났구려.”

유재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이 시대의 문인들의 우상은 누가 뭐라 해도 소동파였다. 김부식이 소동파의 본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하지 않은가?

“소동파 선생은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셨다 했습니다. 율가의 법은 엄격하여 자유로운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그 필요성은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 사회가 되고, 그 사회는 규범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서로의 욕망이 중첩되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왕안석은 모두를 위해 신법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당, 오대십국, 송에 이르기까지 주류 사상은 유학이 지배했고, 그런 유학의 고지식함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유학의 도리만 충분히 이행해도 율가는 설 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유학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기에 왕안석은 율가를 부활시키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가의 실패는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이라는 것을 다시 증명시켜 준 것입니까?”

주제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지만, 이 열띤 토론은 그동안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율가 몰락’의 허전함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내가 한 일이 틀린 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은 욕구일 것이다.

“유학과 율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효와 충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학은 인(仁),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있으나 그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이 변질하면 타성에 찌들고, 부패에 망가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율가의 출발점은 다릅니다. 율(律)은 자기 통제를 의미합니다.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물리칠 줄 알아야 하고, 향응을 받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는 등, 지극한 올바름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올바름은 군주의 처지에서 답답한 것이 많지요. 입 바른 신하를 좋아하는 군주가 역대로 드문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물리쳤던 것은 아닙니다. 민(民)은 비록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것은 불편함을 담은 위정자의 기억에서지, 지극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면면부절로 이어졌고, 계속 시대에 맞게 수정됐습니다. 당대에 이르러, 지정(至政)이 우리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지정(至政).

그냥 풀어쓰면 지극한 정치를 가리킨다. 지극한 올바름이라기에 바를 정자가 쓰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율가의 이념을 제대로 이해한 후인들 덕에 실리적이면서도 멋진 문구가 아닌가 싶었다.

올바른 정치, 정치의 극은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역대 군왕들에게는 자칫 반란의 소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부모와 군왕을 같이 여기는 유학이 통치 이념으로 더 적합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다.’

유재의 설명은 내가 품었던 마음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율가의 몰락은 단지 위정자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그 정신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을 통해 계승되고 있었다. 단지 그들을 활용할만한 장이 마련되지 않았을 뿐이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들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성의를 베풀었는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스승님! 스승님!”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갓 약관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칠성암에 나타났다. 곽여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초 치는 것에는 재주가 있구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싶었는데…….”

곽여에게 제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제자가 있었다면 진작부터 곽여 곁에 머무르고 있어야 했다. 칠성암에 오른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야 나타난 것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곽여의 표정을 보니 귀찮은 벌레처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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