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16) 금문우객(金門羽客) =========================================================================
‘철인에 의한 이상 국가를 꿈꿨던 플라톤, 그런 플라톤을 스승으로 두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로 알려졌다. 현재의 부조리를 수집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비교 검토한 후, 가능한 바람직한 것을 추출하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지.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방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면 이미 근현대까지를 아우르는 다양한 정치 체제가 논의되는 시점이다. 기실 제자백가 시대에 논의된 다양한 정치 체제도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시대에는 달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정치 체제들이 문명의 발달로 가능해지는 일들이 생겨났고, 근대에 이르러 다시 다양한 정치 체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정, 귀족정, 공화정의 세 가지 정치 체제와 부속으로 참주제, 과두제, 민주제의 조합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최고의 방법은 선의 이념을 제대로 교육받은 소수 귀족이 저마다 맡은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귀족들이 모두 사회적인 책무를 엄중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중용을 선택했다. 그것은 중산층 시민을 정치의 주축으로 삼는 민주제의 시행이었다.
너무 풍족하면 잘난척하고 오만해지며, 너무 가난하면 비굴하고 무례해지기 쉽다는 통념을 앞세워 국가 이익이 중산층을 육성하고 그들을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것은 도시 국가였기에 선택 가능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지만, 중용을 정치에 도입한 좋은 모범이라 볼 수 있다.
‘그럼 나는…….’
나는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이 손에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예전의 내가 도덕적인 명분을 손에 쥐고 있었다면 지금은 이자겸 같은 권신과도 필요에 의해 손잡았다.
‘오히려 흠결이 있었기에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 님은 유언에서 나에게 정치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내가 고려를 통해 이룰 수 있는 목표는…….’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입현무방(立賢無方).”
마치 생각이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가로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문득 떠올린 생각치고는 만족스러웠다. 이 말은 맹자가 한 말이다.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 친소(親疎)나 귀천(貴賤)에 구애되지 않고 현명한 이를 얻는다는 뜻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의 표본처럼 상징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입현무방의 기치는 국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성씨의 태반이 중국에서 온 것을 보면 알 듯이 고려 관료 중 상당수는 중국계 귀화인이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만 40명이 넘고, 열전으로 자세히 행적이 기록된 이들이 10명 정도다. 그뿐 아니라 아라비아 출신의 역관, 거란 무관, 왜 악인(樂人), 동남아 출신의 점성술사에 이르기까지 기술이 있다고 여기면 차별하지 않고 등용했다. 고려 초기 적극적인 귀화 정책 때문에 고려인이 역차별받는다고 항소가 빗발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 입현무방의 기치는 여러 차례 쓰였다.’
멀리는 상 탕왕부터, 당 태종, 고려의 광종, 문종, 미래로는 조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시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이미 본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따르기에는 약간의 미진함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정치 체제가 하나로 합침을 전제로 했다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나뉨을 전제로 한 사상이라고 했다. 나뉜 만큼 가치가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요구가 달라서 자기 것을 관철하기 위해 갈등 구조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요는 그런 경쟁 구도가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국가와 위정자가 지켜줘야 할 것은 공정한 규칙과 약자를 위한 배려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는가?”
그것이 화쟁, 융다이불일의 정신이었다.
-세상의 모든 다툼을 화합하게 하고 상반돼 보이는 여러 가지를 융합하되 하나로 획일하지 않는다.
율가 일법을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아신아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단지, 그 결과에 다다르려는 방법을 그때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그때였다. 인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구 기관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일행이 많았다.
곽여도 때마침 도착했던 것일까? 점차 가까워지자 나는 곽여가 동행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는 사서에 적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건에 학창의, 학우선까지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중년의 제갈량이었다.
민나라 시절의 제갈량이 절로 떠올랐다. 그는 내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장수했다. 아마도 원 역사에서 홀로 중임을 맡았던 것과 비교하면 뛰어난 인재들이 뒷받침해주고 있었던 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일이 새록새록 기억이 날 정도로 곽여의 분위기는 흡사했다.
곽여 옆에 동년배로 보이는 중년 문사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누구일까? 혹시 합포 수군의 절대자, 예빈경 강보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구 기관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신의 말만 빠르게 이어나갔다.
“네놈이 범상치 않다 여겼는데 큰 공을 세웠구나. 하루 만에 역사(役事)를 치르다니……. 곽 대인이 하루 일찍 도착한 터라 내 간이 콩알만 해지던 차였다.”
구 기관은 모르고 있었지만, 곽여와 다른 중년인의 표정은 나를 볼 때부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나를 아는 사람이 ‘설마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예빈경 강보가 나를 알 리 없고, 곽여나 저 중년인은 필시 도성에서 나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왜 진작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몰랐을까? 곽여의 사직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일 년 이내다. 아비의 은퇴에 맞춰서 관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라면 내 얼굴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구 기관님.”
곽여의 음성은 중년답지 않게 청아했다. 구 기관은 경칭 사용이 부담스러운지 대뜸 머리를 조아렸다.
“동궁께서 대인을 스승으로 여기며 특별히 여긴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태사께서는 부디 저를 일개 기관으로 여겨주십시오.”
“태사라니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동궁께서 저를 어여삐 여기시어 귀한 분을 사자로 파견하셨다지만 저는 이미 관직에 뜻이 없는 몸입니다. 의안(義安, 창원)의 오랜 군장인 구가에 비하겠습니까?”
남해 삼심이라 해서 그저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오래된 가문 정도라고 여겼는데 창원 구씨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원에서 분파하여 남해에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얼추 들어맞는다.
‘생각해보니 남부 쪽에 유독 귀화 가문들이 많구나.’
무엇보다 창원 구씨 역시 중원에서 귀화한 성씨였다. 오랜 시조를 들춰보면 춘추시대, 송나라의 대부, 구목(仇牧)이 꼽히는데 그건 너무 까마득한 이야기고, 고려 초에 귀화한 구성길(仇成吉)이 시조가 된다. 때마침 일어난 왕규의 정변을 진압한 공으로 의안에서 가문을 열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었다.
곽여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년인의 정체였다. 곽여를 설득하기 위해 온 사자인데 곽여 스스로 귀한 분이라고 높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현직일 때의 곽여보다 상급자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나는 상서들의 면면을 다 알고 있다. 곽여는 예부원외랑의 관직에서 물러났고, 내가 모르는 인물이라면, 상서보다 아래인 실직이고, 예부원외랑보다는 상급자라는 뜻이 될 것이다. 물론 허직에 해당하는 검교직의 인사일 수도 있으나 동궁이 정말 그를 태사로 맞아들이고 싶었다면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친분 있는 명망가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마 예부시랑?’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가 예부시랑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를 보며 곽여와 동시에 지은 그의 표정을 보면 조정의 고위관료가 확실했다.
구 기관과 곽여의 겸양이 한 차례 지나가자, 곽여는 고개를 돌려 내 곁으로 다가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근접하자, 내 얼굴과 전신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어디 조용한 곳이 없겠습니까?”
“해창 처소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라면 칠성암도 있습니다만…….”
“칠성암을 보기 위해 왔으니 칠성암이 좋겠군요. 자네는 나를 따르게.”
길잡이를 앞세워 곽여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구 기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자네 혹시 곽 대인을 만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네에게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곽여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던 것일까? 그것보다 구 기관은 나와 한 약속이 미뤄질 것 같자, 미안한 마음을 표출한 것이었다. 구 기관은 낙석을 주어진 일시에 맞춰 다 치워준다면, 나의 사정 설명을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정이 난감해진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곽여가 나를 알아보는 바람에 정한 계획이 모두 틀어지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조용한 곳을 찾는 것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것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자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이 우리를 맞이했다. 문, 무, 도를 수련하던 이 고장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답게 작은 폭포를 낀 넓은 좌대(座臺)는 무엇을 수련해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천혜의 자연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길을 알았으니 구 기관님도 인부들과 함께 내려가 쉬도록 하십시오. 밤이 되기 전에 돌아갈 것입니다.”
구 기관은 떠나기 전에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느냐는 그런 눈치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해줄 말이 없었다.
모두가 사라지자 칠성암에는 오직 세 사람이 품자를 그리며 앉았다. 잠시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의 청량함을 감상했고, 이윽고 곽여의 입이 열렸다.
“척준경 장군.”
역시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귀양을 갔다고 들었소.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대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팔음도로 알고 있소만.”
“맞습니다.”
“팔음도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온 것도 이상한 일인데, 차림새를 보니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소.”
귀양 갔다는 사람이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차림새는 넝마나 다를 바 없었고, 낙석이나 나르고 있으니 이상할 소지는 충분했다. 문제는 내가 이들을 믿을 수 있느냐였다.
곽여는 귀신같이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다. 그것은 그의 호언(豪言)으로도 드러났다.
“하하하, 무엇이 그리 이야기하기 어렵단 말이오? 장군의 무용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것,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손을 쓸 수 있지 않겠소? 억울한 사정이라면 우리가 도움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불의한 자라면 이들을 죽이고 도주를 선택해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곽여의 추측은 단순하면서도 묘하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중년 문관이 말문을 열었다.
“장군이 나를 아실지 모르겠으나, 이 몸은 유재(劉載)라 하오. 과분하게도 예부시랑의 중책을 맡고 있지요.”
예부시랑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그의 정체는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재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계속 맴돈다 싶었다.
‘설마 재상의 반열까지 오르는 그, 유재를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라면 곽여보다도 더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의 출생지였다.
유재는 송나라 천주(泉州, 福建省) 사람이다. 선종 때, 상선(商船)을 타고 고려에 왔다가 문재(文才)가 소문나면서 조정의 관리들이 그를 시험하여 관리로 앉혔다고 한다. 귀화인 중 재상에 오른 자는 손가락에 꼽는데, 그는 그중 하나로, 상황판단이 빠르고, 글을 잘 지었으며, 그런데도 성품이 소박하고, 청렴하여 그를 싫어하는 자가 없다고 전해진다.
숙종, 예종 때, 권모술수에 능한 이자겸이 제대로 권력을 잡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왕들이 적극적으로 유재 같은 외부 인재의 영입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그가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는 별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이 예종 때 중용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곧 예종이 될 동궁을 생각한다면 이들이 내 사정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리 마음먹은 대로 쉽게 움직이던가? 송군까지 개입되어 있기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유재가 고려에 귀화한 시기는 이제 갓 10년 지났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