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1 (16) 금문우객(金門羽客) =========================================================================
구 기관이 나를 받아들일 심산으로 보이자 심방은 할 일을 다했다며 떠났다. 심방이 떠나자 구 기관은 지체하지 않고 나를 복구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심방이 남해 삼심의 하나로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산길로 접어들며 인적이 뜸해지자 나는 겨우 말을 걸 기회를 얻었다.
“제가 심방을 통해 구 기관을 통하고자 한 것은…….”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에 구 기관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잘랐다.
“곽여가 도착하겠다고 한 날이 이틀 남았네.”
“그것은 잘 알겠습니다. 일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근육이더군.”
아까 내 허벅지를 만졌던 것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그걸 알아챘단 말인가? 구 기관의 눈빛은 서늘했다.
“나는 남해가 조용하길 원하는 사람일세. 자네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심방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나와 이야기할 기회도 주지 않았을걸세. 자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틀 사이에 칠성암으로 길을 내는 것이고, 그 대가는 자네 사정을 경청하는 것이 될 걸세. 부족한가?”
일개 기관이라고 여기기에는 이목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틀의 시간을 이곳에서 꼼짝없이 날리게 생겼지만, 그 대가는 충분히 이틀의 시간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조건이었다. 나는 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구 현장에 도착하자 대략 30명 정도의 인부(人夫)가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구 기관이 나타나자 작업을 멈추고 인사를 올리기에 급급했는데 그중에는 실한 일꾼을 데리고 왔다며 편하게 농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보아하니 나보다 젊거나 체구가 큰 사람이 없었다. 인근에서 민전을 일구는 자영농에게 세금을 일부 감하는 조건으로 작업에 참여시킨 모양이었다.
구 기관은 나를 남겨두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 일은 계속되었다. 이틀로 될까 싶을 정도로 낙석은 상당했다. 최소한 일백 명의 인원이 서너 일은 꼬박 치워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나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어허, 장사로구먼, 장사야!”
서넛이 들어야 할 낙석을 홀로 나르자 엄지를 치켜들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의례 그런 상황이 되면 나오는 질문도 나왔다. 나이가 몇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결혼은 했는지 등등 말이다. 애초 탐라에 다다르면서 영등을 이름으로 삼고자 했기에 그것에 맞춰 적당히 대답하며 일에 열중했다.
일몰이 다가오자 이만 작업을 그만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나는 혼자라도 작업을 하겠다며 부지런히 돌을 날랐다. 적당히 하라며 주위 나무에 걸어둔 등화(燈火)만이 친구가 되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점차 멍해짐을 느꼈다. 육체가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근 이틀간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기에 한꺼번에 수마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눈을 뜨고 악착같이 돌을 날랐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컴컴한 어둠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화가 꺼진 것일까? 목소리의 주인이 내 발치에 나타나자 겨우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문화 님.
가후였다. 가후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거지? 내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제가 승상을 좋아하는 것은 승상이 항상 자신의 길에 대해 질문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반복된 질문의 연속이라 스스로 화가 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상황에 맞춰 자신의 길이 옳음을 묻는 것은 위정자로서 당연한 본분입니다. 그리고 이미 승상께서는 그 길을 한 차례 걸으셨습니다.
과거 나는 이것과 똑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조조와 회담을 치르던 찰나 관우의 죽음에 격분한 유비가 군에게 명령해 적아를 가리지 않고 화살을 쏘았고 그중 하나에 가슴을 맞은 다음이었다.
-결과 없는 고민은 가식입니다. 고민의 결과는 행동에 대한 믿음을 도출해야 합니다. 구정(九鼎)의 무게를 기억해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가후가 사라졌다. 나는 손을 허우적대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끝끝내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가후인가 싶어 반갑게 뒤를 돌아보았는데 전혀 알 수 없는 중년인이었다.
어둠이 깨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이보게, 이보게!”
눈이 빛에 적응하자 서서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이 일했던 서른 명의 인부가 웅성거리며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서야 알았다. 칠성암으로 향하는 마지막 낙석을 치우고 난 다음에 졸려 쓰러진 것이다. 웅성거림은 하나같이 감탄사였다.
“어찌 이걸 밤새도록 혼자 옮길 수 있단 말인가? 우공(愚公, 우공이산의 주인공)도 자네를 보면 껌뻑 절을 해야겠구먼. 지금 구 기관님에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오실걸세. 마무리는 우리가 할 테니 자네는 여기서 쉬게.”
일어나겠다는 것을 한사코 뜯어말리기에 나는 잠시 그늘에서 쉴 수 있었다. 나는 꿈인지 모를 가후의 환청을 떠올렸다.
‘결과 없는 고민은 가식이라……. 심방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고민의 결과는 행동에 대한 믿음을 도출해야 한다.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결정을 내리라는 것일까? 문화 님은 구정(九鼎)의 무게를 기억하라고 했다.’
구정을 어찌 잊을까? 화살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그때, 가후보다 앞서 나에게 나타났던 위인이 있지 않았던가? 그는 내게 구정의 무게를 물었었다.
‘관자(관중) 셨지.’
우 임금이 구주(九州, 당시 중원)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신물로 아홉 개의 정(鼎, 향로)을 만들었다. 즉, 구정의 소유자는 천하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때의 문답을 떠올렸다. 당시 혼수상태였던 나를 지켜보던 이들로서는 아찔한 기억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무척 뜻깊은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구정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정말 중요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한줄기 소나기와 같은 것이지요. 제게 구정의 경중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고 난 후에 잠시 생각이 나면 셈해볼 수 있는 가치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관자가 내게 말했다.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을 논할 수 있고, 의식(衣食)이 풍족해야 염치(廉恥)를 논할 수 있다. 굶주려 있는데 어찌 청렴을 논할 것이며, 부끄러움을 논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구정의 가치는 빈 솥에 불과할 뿐이니.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가 필요하다. 내가 바라던 이상을 위해 지금까지 내가 쌓은 기초는 무엇인가? 당시, 가후는 내가 바라는 이상(理想)이 자신과 관자에게 투영된 것이라고 했다.
‘제나라에 간신이 전횡을 일삼고 있을 때, 공자가 재상이라면 간신들을 배척하고 쫓아내려는 시도로 국정 대부분을 허송할 것이고, 안자(안영)는 간신이 물러나고 자신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리라고 평론가들이 논했다. 관자는 어떠한가? 정치는 균형과 조화이고, 상대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중과 내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천하에 제자백가가 생겨났다. 나는 그들의 단점에서 장점을 찾고자 했다. 정치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도가(道家)가 현실에서 멀어지지 않고, 유가(儒家)의 예와 인이 현실을 인정하며 중용을 이루고, 법가(法家)의 비인(非人)에 융통성을 심으며, 종횡가(縱橫家)의 언변에 신의를 담고자 했다.
-또한, 상가(商家)가 이득에 집착하지 않으며, 병가(兵家)는 호전적이기보다 평화를 추구하며, 농가(農家)는 증산(增産)을 통한 나눔을 고민합니다.
내 대답에 관중의 흐뭇한 미소가 바로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선했다.
지금 내 귓가에는 관자의 속삭임이 다시 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화쟁(和爭)이고 화쟁(和諍)이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당시의 대답에 화쟁이 한 번 더 언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고구려나 발해를 다시 세우든, 아니면 중원을 다시 얻든, 세계사에 파격적인 사건을 일으키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절대의 법칙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 국가의 차이이고, 그 차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이다.
공자와 맹자, 플라톤의 이상 정치는 비슷한 성향을 띄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윤리적인 군주의 등장을 꼽는다. 그러한 철인 정치를 그 시대상에 맞췄다고 한 것이 나로서는 민국의 건립이었다. 드높은 이상이 있었고, 이를 이론과 실무로 보완해줄 인재들이 받쳐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적당히 욕심 있고, 적당히 능력 있는 인재들에게는 가혹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상(理想)의 높이가 현실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을 현실 밑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후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지만 첫 단추를 꿰맨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문제점을 정녕 몰랐던 것일까? 아니다,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민국을 이상적이고 윤리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다.
‘국가 윤리는 국민 윤리의 중용(中庸)이다. 그것을 세계로 뻗어 나가면 종다양성(種多樣性) 국가 윤리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정치에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원리와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이상 국가의 설립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논하는 이유는 그런 국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 그 자체에 대해서 살필 수 있는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것을 위해 쉽게 이룰 수 있었던 중원의 통일을 애써 어렵게 가야 했다. 정의와 윤리 의식이 없는 비대한 제국은 주변의 모든 나라를 탐욕스럽게 넘볼 것이고, 그 피해는 가장 먼저 한반도에 닥쳤을 것이다.
이미 민국이라는 표본이 있는 이상, 후인 중 누군가는 그런 국가에 가깝게 다스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시작했던 일이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면 그것은 실험을 넘어 예제가 되고, 관습이 된다. 성군은 있을지언정 민국에 가까워진 국가가 없었다면…….
‘그 후인이 내가 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본(paradeigma)을 위해서였네. 우리가 올바름 그 자체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완벽하게 올바른 사람이 생길 수 있을지 또한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그가 어떤 사람일지를, 그리고 다시, 올바르지 못함과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 탐구했던 것은 말일세. 이는 이들이 행복 및 그 반대의 것과 관련해서 어떤 사람들로 보이는지, 이들을 보고서, 우리 자신들과 관련해서도 우리 가운데서 이들을 가장 닮은 사람이 그 행·불행에 가장 닮은 ‘운명의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데 대해 우리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그것들을 생길 수 있는 것들로서 입증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네.
*플라톤 ‘국가’ (해제), 김인곤 저(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년 발행)에서 발췌
어느덧, 지금까지 수없이 고민하고 의심했던 것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