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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8화 (118/257)

00118  (16) 금문우객(金門羽客)  =========================================================================

그런 사이 항해는 순조로웠다. 홀로 돛대를 조정하는 배치고는 무척 빨랐다. 여름(6월~8월) 사이에 부는 남동풍과 남서풍을 잘 탄 이유도 있겠지만, 선수와 돛대를 개량한 것도 효과를 보고 있었다. 바람의 영향 때문이라면 돌아올 때 지금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합포 수군과 함께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고려의 해운이 당시 얼마나 수준급인지 알려주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1019년 고려 해적(여진이나 탐라인이 포함된 국제적인 해적일 수도 있다.)이 규슈 북부에 출몰하여 피해를 주자 왜 조정에 보고가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 보고에는 한 척의 배는 3개의 돛과 30개~40개의 노, 승무원이 20명~60명, 무장인원은 70~80명, 그 속도는 ‘마치 달아나는 것처럼 빠르다.’라고 적혀 있다. 해적이 이 정도였는데 고려 수군을 보면 달아나기 바쁘다고 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해상무역을 고려가 계승 발전하면서 이룩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양도 수군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송이나, 왜, 요의 수군이 아니라 인접한 합포 수군이 될 수밖에 없다. 요나라와의 항쟁을 다루는 것만으로 고려 초, 중기의 역사를 넘겨버리는 현대의 역사 교육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기회가 나에게 주어져 있었다.

“해창에 곧 다다릅니다.”

남해도가 가까워지자 허기를 느꼈다. 새벽부터 배를 몰기 시작해서 지금은 대략 오후가 되는 시점이었으니 당연했다.

제주에서 남해도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190km 정도 되는데 그 거리를 근 9시간 만에 주파했다. 13노트가 나왔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면 웬만한 중선이 노까지 동원하며 항행한 것과 맞먹는 것이라 놀라웠다. 9시간 내내 쉬지 않고 돛을 움직이던 그녀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드는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자리에 철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괜스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장보고가 해상 왕국을 꽃피우던 시절, 일본 승려 원인(圓仁)은 당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4척의 일본 조공선이 신라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고, 신라 선박의 도움을 받아 당을 오갔다. 이때의 여행기를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저술로 남겼는데 ‘오후에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새벽에 한반도 서해안에 이르렀다.’라며 신라 해운의 우수성에 경탄을 표시했다.

섬이 가까워지자 움푹 파인 만으로 거침없이 배를 이동시켰다. 내가 알기로 해창이 있는 창선도로 가려면 상주해수욕장이나 송정해수욕장이 있는 동쪽 방면으로 빙 돌아가야 했다. 미처 묻기도 전에 그녀가 거친 음성으로 내뱉었다.

“섬을 돌아가면 대략 100리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박할 신전(新田) 포구에서 해창까지는 도보로 불과 20리지요. 피곤하고 시장하실 텐데 요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전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전국에서 손가락으로 꼽히는 장수마을이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포구까지 대략 100m 정도를 남겨두고 작은 섬을 하나 지나가게 되었는데 입항 준비를 위해 돛을 정리하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목단도(牧丹島, 모란도)라고 합니다. 이 섬에서는 춘분과 추분을 전후해 노인성(老人星, 남극성)을 3~4일간 볼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추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장군의 수명도 점쳐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노인성은 남극성이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수명을 담당한다고 알려졌다. 노인성을 보는 사람은 그만큼 수명이 늘어나 장수한다고 하는데 조선 정조 시대, 한 암행어사가 남해의 한 고을은 노인성을 매년 보기 때문에 장수자가 많다는 기록을 남긴 바가 있다. 그 고을이 바로 목단도를 둘러싼 마을들이 될 것이다.

배는 미끄러지듯이 포구에 도착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기 그지없었는데 익숙한 솜씨로 배를 묶고, 곧 발걸음을 마을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보니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한 것 같았다.

특이하게도 포구 주변은 방풍림으로 가득했다. 갯바람을 막아주는 상수리나무는 오랫동안 존재해왔는지 하나같이 20m 이상 거목이었고, 그곳에는 몇몇 아이들이 주워든 나뭇가지를 들고 칼싸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칼싸움 놀이보다 흥미가 가는 것은 파랗게 익은 도토리였다. 현대에서야 도토리로 쑨 묵은 별미지만 조선 시대까지 도토리는 구황식(救荒食)이었다. 흉년을 넘기는 고마운 음식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곳에서 주는 요기가 도토리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배반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안내한 곳은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중년 여성이 홀로 거처하는 곳이었는데 탐라 출신이었지만 이곳 출신과 결혼하여 눌러앉은 경우라고 했다. 도토리묵을 맛있게 먹으며 무심코 남편의 근황을 물었는데 그녀는 뜻밖의 정보를 내게 알려주었다.

남편은 부병(府兵)으로 합포 수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지금은 귀하신 몸의 호위로 차출되어 금주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전(民田, 개인소유)을 가지고 있는 농민은 형편에 따라 부병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민전 세금을 면제받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가 호위하고 있다는 귀하신 몸의 이름이었다.

“정말 그자의 이름이 곽여(郭輿)가 맞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이곳에서 떠올리게 된 것이다. 곽여의 자는 몽득(夢得)이라고 하는데, ‘여’란 이름을 꿈에서 신선이 나타나 지어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자였다.

‘몽득……. 꿈에서 얻다.’

강렬한 인연이 느껴졌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여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진인(眞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어려서부터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다양한 지식과 재주를 쌓았다고 한다.

문종 37년(1083년)에 치른 과거에 급제하여 승진 가도를 달렸는데 관직의 임기가 끝나자 미련없이 김해로 내려와 유유자적 은거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해가 1130년이고 72세에 죽었다고 했으니 지금은 46살이 되었을 시기다. 관직에 오르면 늙어 죽을 때까지 관직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가 대다수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른 은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면 곽여를 꼭 만나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숙종 다음을 이을 예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곽여의 학식과 인품을 좋아해 그를 총애했는데,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곽여를 다시 초빙했다. 그의 도사 기질을 잘 알고 있었는지 예종은 그의 거처를 무릉도원을 형상화하여 꾸며주었고, 복장 역시 그가 원하는 복장을 입도록 파격적인 조치를 베풀었다. 그는 오건(烏巾)과 학창의(鶴?衣)를 애용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제갈량을 연상케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유비가 제갈량을 대했던 것처럼 예종 역시 곽여를 선생, 진인이라 칭한 것을 보면 그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이 간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금문우객(金門羽客, 궁중신선)이라고 불렀다. 그런 명호와 어울리지 않게 그의 유일한 단점은 여자를 몹시 밝힌다는 것이었는데 특이하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곁에는 비첩(婢妾, 종으로 거느리다가 첩실이 됨.)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곽가와 가후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보면 될까? 권력에 한 발치 물러나 있으면서도 중요한 일에는 한발씩 담근 일화들이 허다하다.

정지상이 그와 시를 교류하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정지상이 추모시를 지어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활쏘기, 말타기, 거문고, 바둑 등의 온갖 기예에 능했으며, 경서와 사서를 섭렵하고 도교, 불교, 의약, 음양론에 이르기까지 한번 보면 바로 외워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곽상(1034~1106)은 청주 사람으로 참지정사까지 올라갔으나 숙종이 심혈을 기울이던 화폐 유통이 실정과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다가 화폐 유통 찬성파인 윤관과 마찰이 생겼고 은퇴를 신청하여 고향인 청주에 세거(世居)를 선택한 시점이기도 하다. 곽여가 아버지를 따라 청주로 가지 않고 김해를 은퇴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장남인 곽탄은 아버지를 모시며 이후 자손들이 계속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 것을 보면 곽여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은 것에는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윤관의 신임을 받고 있고, 곽여의 부친, 곽상은 윤관과 다른 정책 노선을 견지하다가 은퇴했다. 그것이 그를 설득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근래 들어 유비가 제갈량을 원했던 이유를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과거의 내 전생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대국을 조망할 수 있는 가후가 생각지도 못한 인연으로 무척 초기에 만났다는 것이었다. 곽여의 실상이 사기꾼에 난봉꾼이라면 매우 실망하게 될 것이지만 만약 사서에 적힌 그의 천재성을 확인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 끌어들이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진짜배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은퇴할 당시 마지막 직책이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었다. 예부상서가 상관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지금 부딪치고 있는 자 중 예부상서 김군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가 김군국과 우호적이라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를 만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사서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고려는 조선 시대와 비견할 정도로 많은 명신과 천재가 존재했고, 그들의 일화는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특히나 지금의 시대는 고려의 문화가 숙성기를 맞이하면서 많은 인재가 속출했다. 고려 최고의 시인으로 정지상이 있다면, 고려 최고의 화가로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린 이녕(李寧)이 있다. 송의 휘종이 이녕의 그림을 보고 고려에는 이녕만이 존재한다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지금은 아기 시절이겠지만 말이다.

도토리묵으로 배를 채우니 피로가 몰려오면서 육체는 노곤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합포 수군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예빈경(禮賓卿) 강보(姜輔) 어른이십니다.”

대답에 존경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예빈경이라면 종3품의 벼슬로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양도 수군의 백휘직이 상장군인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니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군이야말로 외국인을 만나고 접대하기 위한 최일선이나 다름없으므로 장군 출신이 아닌 문관이 지휘관으로 오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했다. 이어 들려준 정보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운명론까지 떠올릴 정도였다.

“강보 어른은 강민첨(姜民瞻) 장군의 손자가 됩니다.”

거란이 침입하자 문관 출신이었던 강감찬과 강민첨이 각각 상원수, 부원수를 맡아 거란을 격퇴하는 큰 공적을 세웠다. 둘의 뿌리는 진주 강씨에서 비롯되었지만, 신라 말기부터 집안이 갈라져 강감찬은 금주(衿州, 서울 금천, 경기 시흥, 과천, 광명, 군포 일대)의 세족이었고, 강민첨은 진주(晋州)로 내려와 은열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문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군부와 관련된 일을 맡게 되는 것이 집안 내력처럼 된 것인지 지켜보는 처지로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자겸의 이름이 그에게 통할 것인가? 아니면 김인존, 또는 김경용의 이름이 통할 것인가?

정보를 듣기 전까지는 설득할 자신이 있었지만, 강민첨의 후손이라고 하니 어쩐지 인맥으로 설득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그의 직책이 예빈경이었다. 예빈경은 예빈시라는 기구에 속해 있고, 예빈시를 통제하는 것은 예부상서다. 어째 내가 상대할 사람마다 예부와 엮여 있으니 그야말로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 주절주절 거릴 때가 아니라 이제는 직접 부딪쳐야 할 때였다. 나는 이곳까지 배를 태워주고 요기를 챙겨준 두 여인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하며 해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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