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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7화 (117/257)

00117  (16) 금문우객(金門羽客)  =========================================================================

(16) 금문우객(金門羽客)

몇 번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양림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더 세게 두들겼다. 그러자 문이 확 열리며 부스스한 표정의 중년 여인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맞이했다.

“노인네들 병구완으로 늦게 잠들었더니 이제는 네가 나를 깨우는구나.”

우람한 체구의 청년이 둘이나 버티고 있으면 두려움을 보일 법도 했지만, 중년 여인은 우리를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양림을 그만큼 믿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문이 잠겼고, 이내 머리와 옷매무시를 단정하게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방이 좁아 장정들이 앉을 자리가 부족하니 이곳에 앉으시구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평상이었다. 보름달이 가득한 평상은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두가 착석하자 그녀는 양림에게 방문 이유를 물었다. 간략한 사정 설명과 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자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탐라는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으로 태풍이라도 불면 그 해에는 극심한 기아에 시달릴 정도로 빈곤한 곳입니다. 염분이 없는 물이 귀해서 아이들은 질병을 달고 살지요. 그래서 고려나, 송, 심지어 왜에 이르기까지 유구에는 관심을 두면서 탐라는 멀리했습니다.”

탐라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 소유해봐야 쓸모없는 땅이라면 얻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함경도 북부에서 만주 남부를 아우르는 갈라전이 탐라와 같은 처지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탐라의 흔하디흔한 돌들이 송 황제가 화석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귀한 값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탐라는 송과 왜, 고려 남부를 아우를 수 있는 무역 중계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요.”

휘종이 저지른 화석강이란 병폐가 숨겨진 탐라의 가치를 물 위로 떠올리게 하였다. 그것은 탐라로서도 마뜩잖은 전개였을 것이다. 중년 여인은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야명주(夜明珠)라고 들어보았습니까?”

무협 소설에서도 흔히 나오는 야명주는 이 당시에는 진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079년(문종 33)에 탐라의 구당사(勾當使) 윤응균(尹應均)이 탐라에서 얻은 큰 진주 두 개를 왕에게 바쳤는데, 별처럼 빛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야명주(夜明珠)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대처럼 양식도 아니고 천연 진주 중에서도 상품이 야명주라 불렸는데 탐라의 진주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나라 시절, 원과 회회인(回回人) 관리들이 앞다투어 몰려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천연 진주 중 상품은 그리 쉽사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원하는 수량만큼 얻지 못하자 탐라 백성이 소지하고 있던 진주 100개를 탈취하여 원나라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중국 각지에서 화석이 올라올 것이니 기실 탐라의 화석과 유사한 종류는 현지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노리는 것은 야명주일까?

지금으로서는 야명주 하나면 삼대가 먹고 살 수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귀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탐라성주는 야명주의 채취와 유통을 미끼로 고려와 송의 귀족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야명주는 마음먹고 채취해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해녀들이 담당합니다. 불민하나 해녀들을 다스리는 것은 이 몸이고, 그래서 이곳에 숨어 있게 되었지요.”

한두 가지 이권이 걸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명주의 유통은 상인이라면 누구나 노려볼만한 것이었고, 나주 박가가 성주의 편을 들어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동안 채취한 것을 강제로 수탈하여 어찌어찌 수량을 맞출 수 있을 것이나 해녀들의 도움이 없는 이상 앞으로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해녀들은 야명주를 캐도록 핍박받을 것이고, 기존의 ‘물질’은 극도로 제한되겠지요. 아마도 성주는 뭍에서 식량을 공급받아 배급을 통해 지배를 유지하려는 속셈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장군을 돕는 조건을 하나 걸까 합니다.”

“제가 알기로 배의 입출항은 성주에 의해 모두 통제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질하는 데 쓰는 쪽배라면 금주까지 가지 못할 터, 달리 숨겨둔 배라도 있는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조건을 하나 건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것을 나에게 요구하려는 것일까? 양림이 내게 요구했던 탐라의 독립?

그녀는 구수한 목소리로 노랫가락을 한 소절 읊기 시작했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 상자를 머리에 이고…….”

해녀들의 물질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기에 신앙은 독실하고 진정성이 가득했다. 그것이 굿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영등굿 같은 집단 의례(儀禮)였다.

“장군께서 탐라에서 용왕이자 영등이 되겠다 하셨으니, 영등굿의 제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것이 배를 태워 드리는 조건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풍요를 비는 제사에 주관자로 참여하는 것이라 여길 수 있겠지만, 탐라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보다 더 큰 요구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영등굿의 제주는 ‘심방’이라는 무속인이 맡게 되는데, 무당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심방굿이라는 것이 따로 전해질 정도로 제주는 무속 신화가 활발했던 곳이었고, 그래서 심방의 권위는 성직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심방의 중요한 역할은 신을 청하여 모신 후, 각 가정의 행복을 신과 접하여 빌어주는 것이었고, 그것을 나에게 맡겼다는 것은 곧 탐라의 행복을 되찾아 달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영등굿은 영등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기간이라고 한다. 영등이 축복을 빌어주고 떠나면 그때부터가 봄의 시작이라고 하지.’

탐라라는 봄의 시작을 나에게 맡긴 셈이다.

무거운 과제이지만 오히려 유쾌하기도 했다. 차라리 누군가를 죽이고 죽여 복수를 이루는 것보다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는 소망이 더욱 갸륵하지 않은가?

내가 흔쾌히 수락하자 중년 여인은 깊게 배례(拜禮)하며 감사를 나타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임무인지 자신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배례를 끝내고 나에게 질문했다.

“출가(出稼)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일본 강점기 이후에 생긴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이 시기에도 쓰인 모양이었다.

출가란 해녀들의 실력이 좋아지면서 경쟁자를 피해 제주도 밖으로 나가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일본 강점기에 일본으로 물질을 가는 경우가 흔했는데 일본의 해녀보다 월등한 실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황이 좋지 않을 때는 인근으로 출가를 나갑니다. 멀리 가면 추자도와 남해도까지도 가는데 그때마다 일일이 성주에게 고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해녀들만 타는 배가 있습니다.”

남해도까지 갈 수 있을 정도면 합포는 바로 인근이나 다름없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린 탓에 나는 반색하며 외쳤다.

“지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대체 그 배는 어디에 정박하고 있습니까?”

“성산도(城山島)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산도라는 섬이 제주도에 있었던가? 그리고 섬에 배가 있다면 그 섬까지는 또 무엇을 타고 이동할 것인가? 의아하다가 그 지명과 비슷한 곳의 이름이 떠올랐다.

‘성산 일출봉!’

그러고 보니 성산 일출봉은 화산 분화구가 바다에서 폭발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알려졌다.

‘맞다. 신양 해수욕장에 갔을 때, 설명 문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신양 해수욕장 쪽의 모래와 자갈이 파도에 밀려 성산 일출봉과 연결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숨겨둔 이유는 성주의 이목을 피하고 육지와 비교적 가까운데다가 배를 숨겨두기에 적당한 지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산굼부리에서 성산 일출봉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40km 정도가 나오는데 이 정도면 성인 구보로 종일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물며 여성이 끼어 있다면 더 늦어질 것이 뻔했다.

“해녀들이 물질로 얻은 수산물이 어찌 바다 먼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토마(土馬)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소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뒤편으로 돌아가더니 잠시 후, 작은 말 두 마리를 끌고 나왔다. 나는 이마를 쳤다.

보통 제주마의 기원이 원나라가 이곳에 목장을 설치하면서부터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조랑말의 경우이고, 이미 전부터 제주에는 말이 살고 있었고, 그 말을 고려에 진상했다는 기록(1073년)이 남아 있다. 말의 크기는 작지만, 병에 대한 저항력과 기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강해서 소 대신 농경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조랑말도 아닌 전통의 제주마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감개무량했다.

나는 요시치카에게 다시 한번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 명령만 수행하여 달라고 당부하고 토마에 올라탔다. 전쟁에 적합한 말은 아니었지만, 돌이 많고 언덕이 많은 제주 지형에는 최고의 말이었다.

새벽녘이 되어서 우리는 성산 일출봉 앞 작은 산마루에 도착했다. 기억으로는 이 부근이 성산 유채 꽃밭이 자리할 지역이었다.

해변 해송 사이에 놓인 쪽배를 찾아낸 다음 토마를 풀어주었다. 토마는 사람 손을 타면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쪽배를 바다에 띄어 성산 일출봉으로 향했다. 성산 일출봉에 바로 상륙하는 것이 아니라 쪽배는 성산 일출봉의 동편으로 빙 돌았다. 깎아 자른 듯한 절벽 틈 사이로 자세히 보면 한 척의 배가 출렁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배는 내가 보아온 상선이나 전선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에 속했다. 노도 없었고, 오직 돛에 의지하는 구조로 대략 6m 정도의 선체였다. 보통의 돛대는 선체 중앙을 평평하게 가공하고 그곳에 돛을 세울 구멍을 뚫어 결합하는 방식이지만, 특이하게 이 배는 돛대 자리를 이중으로 만들어 마치 피라미드 원통에 돛대를 꽂는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중기 고려 선박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지금은 그리 많이 쓰이지 않는 형태였다. 돛대 구멍에 고작 키를 조금 더 높여서 돛을 더욱 강하게 지지한다는 단순한 생각이지만 그 생각이 실현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흘러야 했다.

선수 부분 역시 더욱 단단한 고정을 위해 속을 경사지게 파고, 측면외판에 비스듬하게 연결했다. 좌우 현 상판을 밑판보다 길게 만들어 역삼각형 모양으로 고정한 그 모습은 돛대 지지대와 더불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항시 바다와 부딪치는 해녀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혼자 항해할 수 있도록 배에 손이 가지 않게 튼튼하다고 생각한 방법은 모두 동원하셨군요.”

배의 규모로 보아 최소한 선원 셋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혼자서도 배를 몰 수 있도록 돛 조정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 신경 쓸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했다.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서는 섬세하면서도 굵은 작업들이 필요했다. 서서히 배가 미끄러지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그녀는 돛대 옆에 걸터앉아 내 말을 받아주었다.

“배를 보는 눈이 제법이군요. 그리고 미리 목적지를 말씀드리자면 이 배는 해창(海倉)으로 향할 겁니다.”

해창이라는 지명은 처음 들었다. 그곳이 합포의 수군 기지를 가리키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녀의 설명을 듣고 왜 해창이란 곳으로 가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해창은 남해 일대 섬의 조세가 모이는 곳을 가리킨다고 했다. 합포 수군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가 이 해창을 관리하고 지키는 일이라 또 하나의 본진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력이 몰려 있다고 한다.

“이 배에는 식수도 식량도 없어요. 참고 항해할 수 있는 최대의 거리가 남해까지인데다가 해창에는 당집이 있어요. 탐라의 심방이 영험하다고 소문나서 해창에서 모셔간 덕분에 그분을 통하면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해창의 위치를 물어보니 남해 창선면 당저리 일대였다. 당저리(堂底里)를 풀이하면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니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원인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는 그곳의 지리에 환한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살이 있었으니 바로 ‘사고(史庫)’와 ‘봉수대(烽燧臺)’의 존재였다.

창선면 일대의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는 대방산(臺方山, 해발 468.2m)에는 해창을 노리는 외적을 감시하고 사고를 지키기 위한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봉수대의 설치가 고려 말기에나 존재한다고 믿었었다.

대방산을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산 정상부에 일본 강점기에 박은 것으로 보이는 쇠말뚝 12개가 발견되어 언론의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고장이라 지맥을 끊기 위해 일본이 일부러 박았다는 설명을 듣고 분개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무엇보다 고려 실록의 사고가 대방산 북쪽에 자리한 율도(栗島)에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두 근 반, 세 근 반으로 만들었다.

왜구(倭寇)의 난동이 극심해지자 원종 10년(1269년) 9월에 전남 진도(珍島), 즉, 지금 양도 수군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전에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고려 사고 중 알려진 곳은 충주와 진도 두 곳이었는데, 진도 이전에 창선에 사고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 이야기에 있었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면서 기존 삼국의 기록을 모두 모아 사고에 함께 보관했다고 해요. 중원의 것도 예외는 아니어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나는 삼국사기라는 방대한 역사 저작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한때 관심을 뒀던 적이 있었다. 그 과정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삼국의 문헌뿐 아니라 중원의 문헌을 총망라하여 집대성한 것이 삼국사기다. 거기에 쓰인 문헌만 내가 기억하기로 17종이 넘는다. 그중에는 현대에 알려지지 않은 서적도 많다. 단지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고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쩌면 민국실록의 행방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대부분의 지명, 인명은 모두 문헌에 근거합니다. 수호전의 등장 인물들 역시 송강의 난에 참여한 실제 인물들만 등장합니다. 몇몇 일회성으로 끝나는 인물들정도가 수호전 소설에 등장한 가상인물이라고 보시면됩니다. 가상이라고 생각하시는 삼절오은도 실제 인물이거나(이일민, 단정홍 등) 역사적 인물을 모델로 합니다. 탐라성주, 소성주 같은 인물들, 오늘 언급된 사고 이야기들 모두 문헌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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