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6화 (116/257)

00116  (15) 무쌍(無雙)  =========================================================================

대국의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는 것은 소국으로서는 국가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매개체였다. 최치원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울분은 짐작이 간다만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

복수에 눈이 어두워 최악의 수를 선택한 것으로 밖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사이 우리는 점점 한라산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주도를 여러 차례 다녀본 경험이 있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삼의봉(三義峰) 정도가 될 것 같았다.

“양도 수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들은 바가 있느냐?”

“함선이 사십 척에 총인원이 삼천 명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생각보다 꽤 큰 규모였다. 하긴 곡창인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장군이 벌인 일은 통쾌한 일이었지만 죽은 자들 뒤에 도사린 진정한 원흉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장군이 자신을 용왕이라고 칭했을 때, 저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제발 용왕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어요. 장군이 그들에게 당하거나 훌쩍 떠나버리신다면 탐라는 더욱 가혹한 운명에 처하게 될 거에요.”

내가 협객이라도 된 양 말하는 양림의 처지가 딱했지만, 현실을 알려줄 필요는 있었다.

“용왕은 인외(人外)다. 인외라는 말에는 초월자이자 인간의 법칙으로 제약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만약 내가 이곳을 떠나면 너희가 곤란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너희 세대에 국한될 것이다. 한 세대가 흐르면 어찌 될까? 원래부터 받았던 수탈과 차별이 자연스럽다고 여기지 않을까? 그런 그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푼다면 오히려 살기 좋아졌다고 위정자를 칭송할 것이다.”

일본 강점기 문화통치의 근간은 바로 이런 논리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우에 만족했다면 후손들은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양림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 대답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목적지에 거의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양림이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은 결연함을 담고 있었다.

“골라야 한다면 용왕이 낫겠지요.”

차라리 내가 탐라를 손에 쥐는 것이 낫다는 것일까?

“장군이 그랬지요.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굴종을 선택하겠다면 탐라는 자신의 것이라고요. 그 외침을 듣고 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부끄러운 기색이 가득했어요. 어쨌거나 우리 손으로 탐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까요. 힘으로 억압받는다면 더 큰 힘으로 억압을 부숴버리겠다는 장군의 의지는 비록 장군이 협객이 아닐지라도 악인은 될 수 없다는 믿음을 소녀에게 만들었습니다. 설사 장군이 가면을 쓴 악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최악(最惡)과 차악(次惡), 이 두 가지의 선택지만 존재한다면 누구라도 차악을 선택할 것입니다.”

“내가 차악이라…….”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한 인터뷰에서 ‘인생은 많은 경우에 최선이 아니라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인생관을 밝힌 바가 있다. 정치나 외교가의 격언들을 보면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실패해놓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자의 노력과 선택지를 살피면 ‘최악’을 ‘최선’으로 착각하고 저지른 실수가 보인다고 한다.

나 역시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주문을 외지만 때로 최선이라고 선택한 답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실패를 경험하고 좌절에 이르면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재기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 힘을 다했다는 생각만으로 늘 그 자리에 머무른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결정짓는 것이다. 나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실천에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양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연한 행동에 화들짝 놀란 양림이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 선택이 탐라를 살렸다.”

양림과 나 사이에 처음으로 미소가 감돌았다.

이내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앞으로 달려나가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요! 저곳은 누구도 모르는 저만의 장소에요!”

현대로 치자면 제주시 아라1동에 위치한 삼의봉은 기생 화산으로 정상에 원형 분화구가 있다. 동쪽은 완만한 비탈로 해송이 무성했고, 남쪽 비탈면은 잡목이 우거진 가운데 곰취와 산수국(山水菊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양림이 뛰어간 곳은 서쪽 비탈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제주도에 가면 꼭 한 번씩은 체험해본다는 ‘신비의 도로’가 있던 자리였다. 무성한 해송 뒤로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있었는데, 구조를 보아하니 입구는 좁고 안은 넓은 이글루 구조 같았다. 문제는 나나 요시치카의 몸집이 통과하기에는 입구가 너무 좁았기에 양림은 그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니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고, 알고 싶은 것은 다 알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저녁, 어슴푸레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시치카.”

“하명하십시오.”

“그믐달이 절정에 달한 밤. 이곳에서 만나자.”

“양동 작전입니까?”

요시치카의 눈치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순한 양동이 아니었다. 악이 악에 대항하여 선함을 구하는 과정을 탐라인 모두가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고,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 낼 것이다.

오늘이 음력 15일, 보름달이 한껏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믐달이 절정에 달하는 날은 음력 27일 정도가 되니 대략 12일간의 시간을 얻게 된다.

“매일 밤, 어떤 수단을 써서든 탐라성 밖에 숙영하고 있는 송군 한 명을 죽여라. 열 명의 수급을 취하는 것이 너의 임무다.”

“저들의 이목을 붙잡아 두려고 하시는군요. 하지만, 저를 너무 생각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겨우 한 명씩이라니요? 열 명도 너끈합니다.”

요시치카의 안위를 걱정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지나친 학살은 오히려 송군이 불필요한 대외 활동에 나서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매일 밤 한 명 정도라면 공포와 두려움을 배가시키고 이들의 발목을 잡는데 매우 효과적인 숫자였다.

요시치카의 게릴라 능력이야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나는 오히려 그가 의욕에 넘쳐 일을 그르칠 것을 걱정할 뿐이었다. 요시치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난 후, 이번엔 양림을 바라보았다.

“배가 한 척 필요하다.”

“배라니요? 탐라를 떠나시겠다는 건가요?”

나를 믿는다면 내가 떠나는 이유가 자신들을 위해서라는 것쯤은 잘 알 것이다.

“금주(金州, 김해)로 갈 것이다.”

“금주라면 설마!”

경상 수군의 본거지인 합포는 이 시기 금주의 속현이었다. 양림의 외침은 그것의 반영인 셈이었다.

“양도 수군이 전횡을 일삼으니 합포(合浦) 수군으로 대응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가장 강력한 수상 세력인 양도 수군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육전(陸戰)에만 전념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이기게 될지 궁금하지 않은가?”

“하지만, 합포 수군 역시 양도 수군과 마찬가지로 반 독립적인 세력이에요. 양도 수군과 반목하며 전력을 낭비할 일을 만들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들을 강제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방법이 생각났는지 양림은 반색하며 외쳤다.

“전하의 어지를 대행하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전하가 총애하는 참지정사의 대리인이 장군이니 어지를 소지하고 있겠군요?”

숙종과 동궁, 윤관은 이번 사태가 이렇게 복잡하게까지 진행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나를 보내는 것만으로 내란 정도는 가볍게 진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에 별다른 어지는 내리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공식적으로 귀양 신분이었다. 요나라가 알면 국제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있었다.

그 점을 송군이나 고려 귀족이 이용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자신들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컸기에 막다른 곳에 몰리지 않는 한 은밀하게 처리하고자 할 가능성이 컸다.

“어지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움직일 힘은 있다.”

어지가 없다는 말에 양림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족인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막대한 이득이 필요했다. 어쩌면 자신들을 팔아 그들을 움직이려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세도(勢道)’를 지나치게 믿고 있지만, 그들을 뛰어넘는 세도가(勢道家)는 고려에 적지 않게 존재한다. 나는 그들을 알고 있고, 자존심을 건드릴 것이다. 합포 수군은 반드시 움직인다.”

당장 이자겸이나 김인존의 이름만 팔아도 굽실거릴 호족들이 허다했다. 임금은 먼 존재였지만 인주 이가나 경주 김가는 현실적인 상급자였기 때문이다. 경찰보다 불량배가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불량배의 권한이 더 막강해서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이자겸과 친분이 있다는 것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경상도에서 경주 김가의 지위는 밀양 박가 정도를 제외하면 최고나 마찬가지였다. 신라 왕실의 후예들이니 어련할까?

“또한, 저들은 송군까지 끌어들였다. 탐라, 송, 고려의 연합군인 셈인데 우리라고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요나라라도 끌어들이실 작정이십니까?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요시치카의 반문에 나는 나직한 미소로 대응했다.

“합포에 도착하면 왜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설마 다타라 가(家)를 끌어들이실 작정이십니까?”

“다타라 가문뿐만이 아니다. 견도에는 후지와라노 스케미치가 있다. 그는 네가 불러주길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요시치카의 처리를 두고 규슈의 실력자, 오오에노 마사후사와의 협상으로 얻은 대가가 견도였다. 당시 나를 따랐던 역관이 도주(島主)였고, 스케미치는 요시치카의 사병을 이끌었다.

반란을 일으킨 후, 죽었다고 소문이 날 때까지 근 3년간 계속해서 승리를 거둔 정예들이었기에 그들의 등장은 송군을 긴장시킬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적들을 뛰어넘는 권력, 세력, 힘을 모두 보여줄 작정이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는 자들에게 철저한 굴욕을 선사할 것이다.

악인무쌍(惡人無雙). 지금의 내 심경이었다.

양림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떠나요.”

“어디로?”

그녀는 급한 마음에 먼저 걷기 시작했다.

“노약자들이 따로 대피해 있다고 했지요? 노약자를 돌보기 위해 여자들이 남았지요. 아시다시피 탐라는 여자도 바다로 나가 일을 해야 해요. 해녀도 있고, 어부도 있지요. 숙모님은 해녀로서도 뛰어나지만, 배에도 밝아 조언을 구하기에는 그만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렇다면 발걸음을 바삐 재촉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삼의봉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 걸었는데 어쩐지 익숙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 같았다. 보름달이 까마득한 중천에 떴을 때쯤에 월광이 흩뿌려진 탐라의 아름다운 풍광이 내 눈을 가득 메웠다.

‘산굼부리로구나.’

한국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마르(maar)형의 분화구에는 온갖 들풀로 빼곡하게 메워져 있었고 특유의 향내가 내 코를 간질였다. 뜻하지 않은 호사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마르형 분화구: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 없이 열기의 폭발로 암석을 날려 구멍만이 남게 된 분화구를 말한다.

산굼부리를 가로질러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자 무성한 들풀 사이로 몇 채의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가옥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늦은 밤이라 매우 조용했다. 양림은 그중 한 집의 문을 두들기며 기척을 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