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15) 무쌍(無雙) =========================================================================
그것을 가로막는다면 악비의 스승이 될지도 모를 주동을 베는 것도 서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악비가 자라려면 시간이 있으니 언제고 송나라 사신 행렬에 포함되었을 때, 낚아채면 그만이었다.
그보다는 예전과 다른 분노가 더욱 생경하면서 야릇하게 느껴졌다. 성향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을 관조하는 나는 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순수한 마음으로 잘못된 현실을 질타하고자 하는 것일까?
계단 아래로 한발을 내디뎠다. 주동은 내 기세에 눌려 주춤 밀려났다.
순수한 마음이면 어떻고 순수하지 않으면 어떤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면 나는 이미 중국의 황제까지 경험해본 노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는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고 봐야 했다. 마치 가후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의도는 결코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독선과 아집이 아니라 선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본성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것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이유는 되지 않았지만 내가 행동할 이유는 된다고 믿었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주동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쳤고,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주동은 계단을 전부 내려간 뒤였다. 나 역시 겨우 다섯 계단 정도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주변은 수를 셀 수 없이 인의 장막이 쳐진 뒤였고, 양지가 매서운 눈초리로 선두에 있었다. 주동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중태에 빠진 관승을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고 복수를 위해 내 앞에 섰을 것이다.
“반드시 네놈을 죽여주마!”
양지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그러나 혼자 덤비면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병사들에게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한 번의 외침으로 병사들이 반응하지 않자 두 번, 세 번 돌격을 외쳤고, 계속된 재촉에 눈치를 보며 병사들이 주춤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양지는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병사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성벽 위에서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지켜본 병사들이었기에 먼저 나선 자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양지가 주동과 합격을 제의했다. 양지가 상관이었던지 주동은 한숨을 쉬면서도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칼을 단단히 잡았다. 다시 살육의 현장을 재현해야 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시오!”
인의 장막을 헤치고 양지와 주동 앞에 나타난 것은 십 대 중반의 훤칠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흥건했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귀족의 자제로 보였는데 위험한 이곳에 일부러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는 잠시 칼끝을 아래로 내려 상황을 살폈다.
“소성주(小城主)!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내성으로 드십시오!”
소년을 쫓아 급하게 달려오는 자가 여럿이었다.
소성주라면 고씨일 터,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탐라의 인물 중 고려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이름을 들어야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절로 반성하게 된다. 남의 나라 역사는 줄줄 꿰면서 정작 우리의 역사는 어렵사리 떠올려야 겨우 아는 것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닌가?
소년이 뭐라고 말문을 떼기도 전에 소년을 부르짖던 장한들이 소년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나를 향해 손을 허우적대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져 들고 있던 칼을 던졌다.
퍽!
소년을 끌고 가던 장한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걸음 내딛으려던 그 자리에 무서운 기세로 칼이 날아와 박혔으니 말이다.
맨손이 되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적들이 무기를 쥐고 있는 이상 그것은 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귀하신 몸이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하니 들어주는 것이 예의겠지.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너희 목이 떨어질 것이다.”
장한들은 새파랗게 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 엄포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켜본 자들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주를 수행하며 누각 위에 있던 자들이 아니었나 싶다.
장한들이 망설이는 사이 소년은 압박을 풀고 내 앞으로 달려왔다. 양지와 주동이 그런 소년을 붙잡았다. 소년이 나에게 가까이 가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소년은 바동대며 내게 외쳤다.
“아버지의 함자는 유(維)라 합니다. 저는 당유(唐愈)라 하지요! 장군, 장군께서 만일 주상의 명을 받고 탐라에 왔다면 부디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헤아려 주십시오. 우리가 의롭지 못한 것을 아나 아버님의 맺힌 원한은 자식인 저로서도 쉬이 풀 수 없으니 꼬인 매듭을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고려의 폐하뿐입니다.”
고유, 고당유라는 이름을 되새겼지만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탐라성주 고유가 가진 원한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소성주, 불행하게도 대화 상대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뭣들 하느냐! 소성주를 내성으로 모시지 않고!”
양지는 소성주 고당유를 거칠게 잡아끌며 엉거주춤하던 장한들에게 인계했다. 장한들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재빨리 고당유를 이끌고 사라졌다.
만일 탐라성주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면 그 사정을 알아야 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내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백배 나은 선택이다.
나는 양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섬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했지.”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자 양지는 잔뜩 긴장하며 주동과 주변의 병사를 결집했다.
“틀렸어. 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이유가 없는 거다!”
양지를 향해 쇄도하자 양지는 잔뜩 굳어 있는 병사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며 방패로 썼다. 나는 병사의 손목을 후려쳐서 떨어지는 창을 잡은 후, 무릎으로 병사의 복부를 올려쳤다.
그 충격은 양지에게도 전해졌다. 짤막한 비명이 두 명에게서 터졌고, 뒤로 정신없이 굴렀다. 주동은 나를 막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내가 양지에게 뛰어들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양지와 관승, 네 목숨을 잠시 유예하도록 하마.”
만약 소성주 고당유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기세등등하게 내성까지 들어가 탐라성주의 목을 뽑아버렸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나에게 진정을 이야기한 고당유의 용기가 이번 일을 다시금 생각하게끔 하였다.
잔뜩 움츠리며 내 공격을 기다리던 주동을 뒤로하고 나는 내려왔던 계단을 따라 성벽으로 올라갔다. 돌연한 내 행동을 좇을 생각도 못하는 사이, 나는 처음 내가 올라왔던 성벽에 박힌 창을 이용하여 쾌속하게 내려왔다. 성문을 직접 뚫지 않은 것은 좁은 외성에 병사들이 가득 찬 터라 돌파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알아서 잘 싸우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요시치카를 구원하는 계기도 되었다.
요시치카 주변으로는 어림짐작으로도 일백은 넘어 보이는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체력이 거의 한계에 달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가 계속되자 당하는 송군의 이성도 마비되었는지 하나같이 악에 받쳐 공격했던 것이 힘들어진 이유였다.
내가 함성을 지르며 요시치카에게 쏠린 관심을 나에게 돌렸고, 그리 어렵지 않게 요시치카 곁으로 다가갔다.
“부끄럽습니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잘못을 외치는 요시치카였다. 자신이 위급에 빠지는 바람에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요시치카의 어깨를 탁 쳐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꺅!”
양림의 허리를 낚아챘다.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양림뿐이었기 때문이다. 양산숙은 딸이 납치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는 어느새 나에게 떠밀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쪽을 향해 뛰자, 쫓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두 부류였는데 탐라인은 전력을 다했고, 송군은 건성이었다. 송군의 추격은 아마 의무를 다했노라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인지도 몰랐다.
송군이 점차 멀어지고 끈질기게 쫓아오는 탐라인만 남았을 때, 나는 뒤돌아서며 외쳤다.
“더 쫓아온다면 양림뿐 아니라 너희 모두 죽는다. 쫓지 않는다면 양림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양림이 너희에게 무사히 돌아간다는 것은 송군과 성주의 의심을 살 터, 양림은 내가 궁금해하는 정보만 토설한다면 너희의 안가(安家)로 가게 될 것이다. 모두 죽겠는가? 아니면 모두 살겠는가?”
그들은 갈등하고 있었다. 내가 양림을 살려준다는 보장이 확실한지 그것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때 내 팔에 안겨 있던 양림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용왕은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하지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죽이려면 벌써 자신들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양림과 양림의 아비를 대할 면목이 없기에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양림이 다시 같은 말을 소리치고 나서야 이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양림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제 모두 갔으니 저를 내려주세요. 장군의 무용이라면 저 하나쯤은 신경 쓰이지도 않겠죠.”
그녀를 땅에 내려놓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남쪽 멀리 아른하게 보이는 한라산을 가리켰다.
“이십 리 정도 남쪽에 저만 아는 동굴이 있어요. 그곳으로 가요.”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산길로 접어들자 양림이 물었다.
“저를 납치한 이유가 정보를 토설하게 한다는 명목이었지요? 제게 무엇을 묻고 싶은 건가요?”
“성주의 과거를 알고 있느냐?”
“성주의 과거? 어떤 과거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가 고려에서 관직을 제수받아 조정에 머무르던 때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순간 뇌리에 강한 전류가 흘렀다.
고려에서 대대로 탐라성주에게 자국의 관직을 내리는 것은 흔한 것이었지만 직접 입조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현 탐라성주는 관직을 제수받아 조정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개경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더 자세히 말해보라고 요구하자 양림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前) 성주, 고자견(高自堅)은 탐라의 미래를 걱정하여 여러 차례 씨족 회의를 열었다고 해요. 양씨와 부씨도 처음에는 그 회의에 참석했는데 기실 반대를 위한 것이었지요.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굳이 지금의 방식을 바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이에요. 전 성주에게는 총명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자가 바로 현 성주, 고유에요. 고유는 탐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고려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신이 직접 고려를 체험해보겠다며 유학을 자청했지요. 그때가 고려 정종(靖宗) 11년(1045)이에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전의 일이다. 성주의 나이가 그렇게 많았던가? 소성주라는 아들이 십 대 중반으로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해와 이듬해까지 치러진 두 번의 과거 시험을 연달아 합격하는 바람에 탐라는 당시 축제 분위기였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군요. 문종의 사랑을 받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다 보니 중서문하성의 우습유(右拾遺) 자리까지 이르렀는데 탐라 출신이라 하여 따돌림과 배척이 심했다고 해요. 그 후 14년 동안이나 말이지요. 그래서 낙향을 결심했을 때, 문종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국자시(國子試, 과거)를 주관할 영예를 주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관리들 사이에서는 탐라인을 차별하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해요. 그 때문에 한동안 고려와 탐라 사이가 냉랭하기도 했지요.”
탐라성주의 원한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성주의 아들들이 여럿 있었으나 다들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죽고 남은 것은 지금의 소성주 한 명뿐이지요. 소성주는 매우 강개(慷慨)하고 영특해서 성주의 자랑이자 탐라의 보물이라고 불려요. 그래서 성주는 다시금 탐라인의 자존심을 드높이고자 국자시에 어린 소성주를 보낼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양림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양림이 왜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의 시작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중서문하성에서 국자시에 탐라인이 참여하는 것을 불허했겠구나.”
양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들의 국자시 참여가 거부되자 성주는 예전 자신이 겪은 배척이 되살아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서문하성을 견제할 수 있는 타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성주의 권한이 강화되어야 했고, 성주 권한의 강화는 양씨와 부씨의 반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