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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4화 (114/257)

00114  (15) 무쌍(無雙)  =========================================================================

“개소리!”

양지는 나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거칠게 달려드는 그의 손목을 비틀고, 발로 가슴팍을 힘껏 차자 얼굴이 한껏 파랗게 변하더니 뒤로 나뒹굴었다.

나는 양산숙과 양림을 바라보았다. 양산숙은 슬쩍 외면하고 있었고, 양림은 기이한 열망을 담은 채 뚫어지라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탐라를 얻겠다고 외쳤지만 처음 양림과 나눴던 이야기를 믿고 있는 것일까?

시선을 돌려 주동을 바라보았다. 주동은 복잡함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는 아직 칼을 뽑아들지 않고 있었는데 관승이 그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 몰랐을 것이다.

양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사이, 나는 관승에게 다가갔다.

가슴에 널브러진 학사문의 시신을 치울 기력도 없는지 관승은 멍한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이제야 알겠는가? 관우는 오만했으나 품격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쥐꼬리만 한 실력을 믿고 방자함만 키웠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도 백성의 고단함을 외면했다. 구천에서라도 관우에게 무릎 꿇고 빌도록 하라.”

창날을 활시위처럼 뒤로 당겼다. ‘안 돼!’라는 양지의 외침이 들렸지만,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창날은 쾌속하게 관승의 머리를 노렸다.

둔탐음(鈍濁音)이 들렸다.

사람의 머리를 제대로 가격 했다면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창날은 관승의 머리를 스치며 대지에 틀어박혔던 것이다.

궤도를 바꾼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나는 방향을 바꾼 주범을 바라보았다. 활시위를 놓은 주동의 모습이 있었다. 주동의 입술이 나를 향해 들썩이려 할 때, 양지는 몸을 던져 관승을 보호했다.

학사문의 어이없는 죽음, 이어지는 관승과 양지의 위기에 송군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시치카가 막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저들 전부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관승과 양지 주변에 삽시간에 벽이 생겼다.

“우리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아오. 그러나…….”

주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고, 그 입 모양을 통해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는 인의 장막이 펼쳐지자 미처 살피지를 못했는데 사실 그가 무슨 말을 했든 지금의 나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10년이 넘는 전쟁 경험은 여러 능력을 키워주었는데 그중에는 한순간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고, 지금 나는 그 기회가 보이고 있었다.

지휘관이 병사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결국 양지와 관승 주변으로 쏠린 사이 지체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탐라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로막는 몇몇 병사들을 밀치고 그들의 창을 빼앗아 손으로 쥘 수 있는 최대치를 챙긴 나는 성벽에 도착하자마자 돌벽 틈새에 창 하나를 박아 넣었다.

탐라성의 성벽 높이는 대략 3장 정도였다. 제주도 특유의 돌담 형식을 그대로 따온 터라 틈새를 흙으로 메워놓긴 했지만 있는 힘껏 창날을 꽂자 단단하게 틀어박혔다. 네 개가 꽂혔을 때, 어느새 나는 탐라성의 외벽에 올라선 뒤였다.

앞과 뒤가 온통 탄식과 탄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성문을 황급히 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구경한답시고 누각에 올라갔던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마.”

척준경의 전공을 보면 평원 전투에서 적장을 사로잡는 공적도 있지만, 성벽을 삽시간에 기어올라 적장을 사로잡거나 성문을 여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외성 누각에서 뒷짐을 지며 여유를 부리고 있던 이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먼저 도망치기 위해 좁은 계단을 구르듯이 뛰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성벽의 병사들이 나를 제지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성 자체의 규모가 워낙 작은지라 성벽 위의 공간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고, 그것은 곧 나에게 최적의 상태였다.

허공에서 감이 떨어지듯 가로막는 병사들은 모두 성벽 아래로 떨어트렸다.

누각에 도착하자 아직도 미처 내려가지 못한 자가 열 명은 되었다. 그중에는 호기롭게 칼을 빼는 자들도 있었다.

“척 장군, 귀양 명령을 받은 그대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소?”

행색을 보아하니 그 역시 고려의 장군인 것 같았다. 탐라성주는 어느새 내성으로 내뺐는지 종적도 보이지 않았고, 이곳에 남은 자들은 그나마 권력으로 나를 압박할 수 있다고 믿는 자만 남은 모양이었다.

장군들의 모임인 도방에 한 번이라도 나갔더라면 내 앞에서 떠드는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나갈 생각만 하고 워낙 중요한 일들이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참석을 못했었다.

그래도 대충 정체는 짐작이 갔다. 뭍의 육군이 이곳에 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 양도 수군 소속일 것이다.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대 역시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는 곤란할 터 서로 피차일반이 아닌가?”

“하하하.”

그는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그는 여유가 생겼는지 분분히 뽑아들었던 칼날을 땅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나는 백창직이라고 한다. 그대보다 훨씬 빠른 스무 살에 장군이 되었고, 곧 상장군이 될 사람이다. 이런 내가 그런 유치한 협박에 넘어갈 것 같은가?”

양도 수군을 쥐고 흔드는 자가 백휘직이라고 했다. 직자 돌림이라면 친동생일 가능성이 컸다.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내리는 것은 폐하시다. 폐하께서 네놈이 상장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셨단 말이냐? 나는 믿지 못하겠구나.”

“과연…….”

백창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이었다.

“네놈이 요나라의 내로라하는 전사들과 각희를 벌여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자리에서 요 대신의 활을 동궁에게 내려달라고 청하여 동궁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주상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이때, 네놈이 노리고 잡은 끈이 동궁이라면 세상모르고 날뛸 만도 하구나. 그러나 네놈이 모르는 것이 있다.”

모르는 것? 동궁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다는 뜻일까?

“고려는 크게 보면 두 개의 나라나 다름없다. 주상이 손을 델 수 있는 범위는 기껏해야 남경 이북에 국한한다. 남경 이남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말이지.”

거란과 여진이라는 강대한 적을 막고 있는 사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남부는 경제적 번영을 맞이했고, 그 결실은 모두 귀족들에게 돌아갔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남부 귀족들의 힘은 점점 커져서 번국인 탐라에까지 손을 뻗었다.

왜구가 성행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막강한 고려 수군이 해로를 장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숙종이 남경으로 천도를 고려하고 있는 것도 그런 남부 귀족의 발호를 염려한 측면이 있었다.

“주상이나 동궁, 개경의 권문세가들이 네놈을 구제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우리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은 네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막강하다. 사냥개가 죽는다고 해서 주인이 슬픈 것이 아닌 것처럼, 적당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네놈을 버리게 할 수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 무익한 힘은 그만 쓰고 고개를 숙여라. 네놈이 내 휘하로 온다면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도록 대우해줄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군이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천금을 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자신이 관대한 사람이라고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 인자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마치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쓴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컥!”

백창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창을 한번 보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창직을 믿고 남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던 여섯 명의 입가에서 터진 것이었다.

힘이 빠지는지 쥐고 있던 칼을 떨어트리려 하자 나는 발끝으로 칼날을 쳐서 허공으로 띄운 다음 빈손에 잡았다.

그리고는 창대 끝을 발로 차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백창직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게 대우해주겠다는 말에서 네놈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알지 못한다면 네놈은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사람을 죽여놓고 농담 같은 힐난을 태연하게 내뱉자 남은 자들은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이미 누각의 입구를 점한 이상 그들은 모두 독 안에 든 쥐였다.

한 사람이 간신히 오를 수 있는 좁은 계단을 따라 병사들이 진입을 시도하려 했지만, 다수도 아니고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병사 열 명이 성벽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대치 상태가 이어졌고, 나는 여유롭게 남은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중년인 한 사람이 삿대질을 하며 내 앞에 섰다.

“감히 일개 장군 주제에 이런 참람한 짓을 저지르다니.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서슴없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냐?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네놈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참람한 짓?”

내가 한 발 내딛자 그자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래도 대역무도한 죄인이라는 말은 차마 쓸 수가 없었던 모양이구나. 내가 진짜 참람한 짓이 무엇인지 알려줄까?”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실히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금이었다. 피를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 지금의 나였다.

백창직의 칼이 내 손을 따라 중년인의 복부를 그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 그저 눈을 껌벅이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자 고통의 신음을 발하며 누각 바닥을 뒹굴었다. 허리를 양단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삼분지 일의 깊이로 그었기에 고통을 제대로 느끼며 살기 위해 바동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죽을 것이다.

“백창직에 이어 나주목 지원이 죽었다. 이제 우리도 끝이다.”

죽은 두 명이 남은 다섯 명의 상전쯤 되었던 모양이다. 놀랄만한 사실은 살아남기 위해 바동대는 중년인이 나주목이라는 것이다.

나주목은 조정을 대신해 탐라와 교통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명목상으로는 양도 수군의 상급자이기도 했다. 장흥, 영광, 영암,보성 등의 지역을 담당하는 남도의 실세였다.

지원이라는 이름을 보니 중원 지가의 인물이 분명했다.

남은 다섯 명은 비장한 표정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여기서 살아남아도 둘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죽게 될 것이라는 아득함이 그들을 자포자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포자기한 운명처럼 차례차례 구천으로 떠나고 있었다. 마지막에 구천으로 떠난 젊은 군관은 악 바친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네놈이 죽인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고 그러는 것이냐? 장담하건대 네놈 역시 삼도천(三途川)을 건너게 될 것이다. 백 장군은 양도 수군의 지주(支柱)인 상장군 백휘직의 하나뿐인 아우이다. 나주목 지원은 또 어떻고! 중서시랑평장사 지안 대감과 숙질 관계일 뿐만 아니라, 지안 대감을 대행하여 가문을 이끌어 왔다. 알겠느냐? 네놈은 지금 저지른 짓으로 말미암아 네놈 하나뿐 아니라 네놈의 구족과 친우 역시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을 것이다!”

“말이 많다.”

무심한 어조로 그를 누각 아래 계단으로 차 버렸다. 대치하고 있던 병사들은 시체가 굴러 오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성벽 아래를 보니 요시치카는 성벽 가까이 다가오려 했지만, 워낙 병사들이 에워싸니 쉽게 접근을 못 하고 지루한 전투 상황이었다.

그사이, 주동의 수신호에 따라 병사들이 계단에서 물러났고, 주동이 직접 계단을 오르며 나와 마주쳤다.

“이제 장군이 용서받을 길은 사라졌소. 내가 가만히 있겠다고 해도 다른 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장군의 실력은 호언장담대로 항우와 비교할만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전력이 보충될 것이고, 항우가 그러했듯이 언젠가 무릎을 꿇게 될 것이오. 차라리 인질을 잡았더라면 섬을 빠져날 수 있었을 것이오. 왜 모두를 죽이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오. 나는 이해할 수 없구려.”

나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 한번 해보자고.”

이미 다른 선택지를 고르기에는 멀리 와버렸다. 주동 역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나누는 것은 순수한 의미로 나의 실력을 안타까워하는지도 몰랐다.

“예부상서, 중서시랑평장사, 양도 수군의 상장군, 탐라성주…….”

지금부터 내가 상대해야 할 실력자들이 줄줄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이번 일에 깊게 관여한 송의 간당(奸黨)과 응봉국(應奉局)의 관리들.”

간당은 말 그대로 간신의 무리를 일컫는다. 채경과 동관, 고구 같은 간신들은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청렴한 관리들을 오히려 간당이라 부르며 배척했는데 그야말로 적반하장인 셈이다. 내가 간당이라 칭한 것은 그것을 비꼬는 것이었다. 즉, 채경과 동관, 고구야말로 진정한 간당이라는 말이었다.

그들이 간당으로 몰아붙인 관료들을 보면 이미 죽은 자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명망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사마광, 문언박, 소식, 소철 같은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북송의 멸망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동은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만큼 내 기세가 사나웠기 때문이리라. 나는 누각에서 탐라성 인근 모두가 들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의 권력과 재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권력과 재력은 더 큰 권력과 더 큰 재력에게 무너진다. 무예로 이들을 상대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이들에게 내린 죽음이 너무나 편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탐라에서 이들을 몰아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나는 이들이 남들을 핍박했던 그 방식 그대로 되돌려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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