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15) 무쌍(無雙) =========================================================================
한편, 내 엄포가 재미있다고 여겼는지 청면수 양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험상궂게 웃었다. 그런 양지를 제지하며 또 다른 군관이 나섰다. 그는 양지보다도 키가 컸고, 덩치도 훨씬 컸다. 양지의 푸른 얼굴에 잠시 눈이 팔려 그를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었지만 지금 보니 과거의 ‘그’가 절로 떠올려질 정도로 흡사한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대도 관승.’
양지와 관승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스쳐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관승이 관우와 다른 점은 수염이 관우보다 짧다는 것 그것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몸보다 큰 대도를 들고 있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환도가 아니라 언월도의 일종이다. 송 시대의 대도는 중무장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주요 병기로서 화기가 발달하기 전까지 활발하게 쓰였다. 특히 언월도를 전술적으로 잘 활용한 장군이 악비인데 악비는 1140년의 언성(?城) 전투에서 대도와 대부로 무장한 중장 보병을 양익에 배치하여 중장 기병을 막아냈다. 길이가 길다는 것을 십분 활용해 말의 다리를 먼저 노리고, 여의치 않으면 말에 탄 무사의 가슴을 노리는 전법인데, 악비는 병사들에게 땅만 보고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관승이 나서자 양지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이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긴 관 총순(總巡)은 저놈과 원한이 있었구려. 아끼던 위 단련사를 잃었으니 말이요. 아쉽지만 양보하리다.”
총순은 치안을 담당하는 순검(巡檢)의 장을 가리켰고, 무관직으로 환원하면 비장(裨將) 정도가 된다. 비장은 지방장관의 막하(幕下)가 된다.
관승은 양지의 양보에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내 앞에 섰다. 둘이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다 잡은 물고기를 대하는 격이니 나로서는 오히려 투지만 끓어 올랐다.
관승은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칼을 뽑는 순간, 죽는다고 호언했지? 너는 칼을 뽑지 않아도 내 손에 죽는다.”
“내가 위정국을 죽였기 때문에?”
누가 들어도 명백한 시비조로 말했다. 관승의 미간이 살짝 올라가는가 싶었지만, 그는 말없이 대도를 내밀었다. 말이 필요 없다는 뜻이리라.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공을 넘어 관우와 여포의 대결이 나와 관승의 대결로 이어진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마치 여포가 내 곁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수한, 너는 네 사위다.’
관우는 죽기 직전 일만의 오환돌기를 사자후 한 번으로 후퇴시키며 전설로 남았다. 여포 역시 전설로 남았지만, 최후의 여운이 세인들의 뇌리에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관우보다 별로 회자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이었다.
기실 내가 요시치카와 병기를 바꾼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여포는 창을 잘 다뤘다.
‘사위 잘 얻으셨습니다.’
관우의 후예라고 알려졌으며 수호전의 모든 인물을 합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무예의 달인을 상대로 나는 기꺼이 승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주변을 잠시 살폈다. 관승을 아는 자들은 관승이 진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지 여유로웠다. 그러나 곧 이들의 표정은 바뀌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이천 명이 많은 것 같지?”
선공은 내 차지였다. 빠른 찌르기가 연달아 들어가자 관승은 선기를 빼앗기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떤 전쟁도 모두를 몰살시켜 승리를 따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나한테 덤비는 놈만 상대하면 이긴다는 것이지.”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자가 늘어날수록 승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척준경의 행보를 보면 하나같이 그러했다. 수만의 적 사이에서 적의 수뇌를 찾아내 그들을 처치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말로는 쉽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전략, 전술을 무용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모습은 한국사에서 그 본을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맹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현대 축구사에서 찬사의 수식어로 사용되는 ‘그가 곧 전술이다.’라는 말을 기꺼이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가 바로 나다!
병사용 창은 재질과 마감이 군관과 비교하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관승은 힘으로 눌러 창대를 부수려고 했지만 나 역시 직접 부딪치는 초식은 피했다.
창의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것에 있었다. 언월도 계열은 기본적으로 베기에 적합한 병기다. 창은 찌르기에 적합하다. 종공격과 횡공격의 대표적인 두 병기가 부딪치는 셈이다.
원을 그리며 대도의 직격타를 흘리고 찌르기가 쉬지 않고 들어갔다. 지루할 정도로 같은 형식의 공격이었지만 관승의 몸은 차츰 자잘한 상처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법 여유롭던 표정의 관승은 첫 상처가 났을 때는 미간을 곤두세웠고, 자잘한 상처가 수를 셀 수 없게 되자 미간에 내(川) 골이 파이며 눈빛은 점차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야수가 날뛴다고 해야할까?
육중한 언월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흙먼지가 용오름처럼 솟았다. 한 번의 공격만 허용한다면 나로서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세였다.
이제는 주변 역시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다.
오직 요시치카만이 내 승리를 믿으며 나직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타압!”
기합성이 점차 커지며 언월도의 세기가 점점 커졌다. 아마 그는 말을 타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강하지만 그의 본래 실력은 말을 타고 언월도를 휘둘러야 발휘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에 타서 싸우겠다고 할 리 없다.
“이만 끝내자.”
있는 힘을 모두 쏟아부으며 혼신을 발휘하고 있는 관승과 달리 나는 차분하기만 했다. 관승을 상대로 지지는 않을지언정 호각 상태를 한동안 유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50합을 넘어가기도 전에 벌써 상대의 패색을 확인하니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관우의 후예라고 해서 너무 긴장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미 답은 나왔던 것 같다.
소설 상에서 관승의 무예는 매우 신뢰받고 있는데도 그 공적 중에는 수만을 상대로 일기당천의 무용을 보인 적은 없다. 그가 토벌군으로 등장할 당시 양산박 호걸 다수를 상대하면서 호각세를 유지했던 것이 개개인이 겨루었을 때는 관승이 우위에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만들었다. 양산박에 합류한 이후, 양산박이 위기에 빠질 때면 구원군으로 등장해서 지는 전투를 뒤집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어서 과연 관승이라는 찬사도 받는다.
문제는 역사적 사실로 그를 고찰했을 때다.
산동 일대에서 송강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 숫자는 일만에 달하고 관병 수만이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사서에 적혀 있다. 초기에 관병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한때 맹위를 떨치기는 했지만, 전열을 정비하고 적의 보급을 끊자 결국 투항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민란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많이 있고 한때 맹위를 떨쳤던 자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름이 맹장의 반열에 오를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영향력이 전체로 퍼지지 못하고 일대에 한정되었거니와 역사를 바꿀 만큼의 파급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호전의 인물들을 임꺽정이나 장길산 같은 도적과 치환하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컥!”
계속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마침내 관승의 가슴에 창이 박혀 들었다. 다행히 급소를 피해서 빨리 치료하면 생명은 살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당분간 푹 요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편하게 요양을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둘 내가 아니었다.
“관 총순을 구해라!”
설마 이렇게까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양지는 급히 칼을 빼들고 주위에 소리쳤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하자 요시치카는 자신의 차례가 왔다며 웃고 있었다.
“관우가 울겠구나.”
관승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약하다면 그가 대규모 민란의 주모자 중 하나가 되었을까? 사서에까지 이름을 남긴 그이니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산동에서 제일 강한 자를 꼽으라고 하면 손가락에 꼽힐 수 있을 것 같겠지만,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자를 꼽으라고 하면 일백 명 안에도 끼일지 의심스럽다.
내 말에 관승은 눈물을 흘렸다. 조상의 위명에 먹칠했다는 마음일 것이다. 수호전에서 그는 술에 취해 말을 탔다가 낙마해서 죽는다. 그것 역시 관우의 후예라는 명성을 생각하면 우습긴 마찬가지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그에게는 명예로울 것이다.
바로 나에게 졌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세인들이 알아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창날을 힘껏 비틀며 뽑았다. 거구의 몸집이 털썩 바닥으로 쓰러졌고, 나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컥!”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 주인은 관승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이끌던 군관 하나가 튀어나와 관승을 제 몸으로 덮었고, 내가 내지른 창은 그의 등을 관통했다.
관승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학사문!”
관승의 충실한 동지는 그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쇄도한 양지가 나를 강하게 밀쳐냈다. 관승의 비통함에 잠시 한눈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몇 걸음을 밀려나서야 자세를 바로잡고 양지를 노려보았다.
양지의 시선 또한 사납기 그지없었다. 청면수라는 별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감히 소국인(小國人) 주제에 대국인(大國人)을 능멸하다니, 내 기필코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소국인?”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융다이불일의 이상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보아라!”
내 시선은 양지가 아니라 난전에 끼어들지 않고 그저 엉거주춤하고 있는 탐라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고려는 소국이다. 그래서 더 소국인 탐라의 처지를 헤아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오직 화친하기만을 바랐다.”
나는 창끝으로 양지를 가리켰다.
“탐라여, 그대들이 대국에 굴종하고 남는 것은 중원에서 자행되고 있는 화석강의 재현일 것이다. 진정으로 그것을 바라는가!”
땅을 박찼다. 양지는 내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허둥대며 칼을 휘둘렀지만 내 창이 칼등을 돌리며 가슴을 열었고, 그대로 어깨를 들이밀며 강하게 부딪쳤다.
“쿨럭!”
바닥을 몇 차례 구르고 난 다음에야 한가득 가래를 뱉으며 양지가 일어났다. 몹시 분기탱천한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아까 나를 밀쳤던 것에 대한 보답은 돌려준 셈이다.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굴종을 선택하겠다면!”
양산숙과 양림 등의 흔들리는 눈빛을 뒤로하고 저 멀리 탐라성 누각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탐라성주와 이번 일의 주재자들에게 선언했다.
“탐라는 이제 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