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15) 무쌍(無雙) =========================================================================
주동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병사를 이끌고 사라졌다. 위정국의 시신이 거둬졌는데 아까운 인재를 급하게 처리한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입맛이 씁쓸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며 뜨끔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재를 등용하고 쓰는 방법을 두고 보즐이 던졌던 외침이 떠오른 것이다. 지금 시대는 오히려 삼국지 때보다 자료가 없는 시대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불완전한 정보에 기인한 것으로 그것을 전부라고 믿을 수 없다. 고정관념에 빠지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심성을 수양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헌데 또 다르게 해석하면 위정국은 나를 압박하고 심지어 죽이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여유롭게 그를 제압할 수도 있었다. 왜 굳이 그를 죽였을까?
나는 내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후한 말, 하얗고 길었던 손가락은 시커먼 강철처럼 단단했다.
‘내가 이준경이 아니라 척준경이기 때문에?’
손을 썼을 때 확실하게 끝을 맺는 건 예전의 내 모습은 아니었다. 문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있는 그대로 살자며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자신에게 되묻는 것은 그만 하고자 했다. 존재만으로도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문득 내가 가장 싫어했던 철학자 하이데거가 생각났다. 그의 저서들은 하나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 수사를 밥 먹듯이 써먹은 탓에 해설서를 읽어도 그 뜻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하나만은 지금 이 순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공원을 산책하면 나무도 있고, 의자도 있고, 곤충도 있고, 새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원자, 분자, DNA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들은 각각의 현상을 통해 우리에게 존재를 각인시키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보여주는 현상을 통해 존재의 특성에 대해 짐작은 할 수 있을지언정 몰아일체와 같은 경험은 할 수 없다. 단지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러면 존재는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인가? 하이데거는 존재자(사물)가 존재(행동)와 관계하면 현존재(現存在)가 된다고 말했다.
존재자와 현존재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존재자가 인간뿐 아니라 인공물(컴퓨터), 무생물(바위)도 정의하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존재자는 타 존재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존재 방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나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 존재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다. 단지 나는 내가 행동한 모든 것이, 그리고 순간순간의 선택이 올바른지를 불안해했을 따름이다. 아마도 하이데거는 그런 불안감을 익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삶을 어떻게 살지 규정하는 ‘행동, ‘진리’, ‘이상’은 애초에 없다.
올바른 삶에 대한 행동, 진리, 이상이 있다고 믿는 순간(예컨대 종교) 우리는 삶이 가진 주체성, 차별성, 우연성을 배제하고 세계를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바라볼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했다. 내가 꾸던 같은 꿈이 그런 것이었던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각자가 가진 이상의 교집합이었을 따름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큰 목표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절실한 목표가 아니라 이루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목표에 불과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자신들만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좌파의 독선주의는 외려 민주주의의 짐이 되었던 잠재적 ‘자코뱅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내 행동이 쉽게 바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내가 아니라 예전의 척준경이었다면 위정국 하나로 끝났을 상황은 아니었다. 주동을 살리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이미 나는 ‘현존재’로서 살아 있다.
그리고 현존재로서 택한 것은…….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진리’에 몸을 맡기는 것은 ‘실존’의 포기라는 하이데거 주장에 대한 반기였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송군이 허무하게 돌아가자 나를 어찌 대해야 할지 양산숙은 여전히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지금 나를 편든다고 해도 내일이 되면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없애야만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바꾸고 싶었던 사람들이지. 결국, 그들은 그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지. 이루어진 꿈은 꿈이 아니니 말이다. 이제 각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정치를 통해서, 누군가는 저술을 통해서, 누군가는 교역을 통해서, 누군가는 땅을 일구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이기에 급급했던 불신의 시대가 얼마나 덧없던 것이었는지 각자의 삶에 충실하면서 증명해낸 것이다.”
“탐라 역시 그러했소.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이렇게 움직이게 했던 것이 아니겠소? 그보다, 정말 송군을 홀로, 상대할 수 있겠소?”
양산숙에게는 내 독백이 그저 허공에 스치는 바람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마음이 급한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도 당면 위기 외에는 잘 들어 먹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은 꿈이란 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강요하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뿌려야 할 씨앗인 셈이다. 보편적이고 타당해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가치지만 그 가치를 잃어버리면 너무나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
자유, 평등과 같은 단어로 갈음하기에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는 것이 있다.
“우리가 영등을 기리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용기있는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에요. 그런 자를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요.”
양림이 끼어들었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석양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지는 어느 영화의 마무리처럼 이들은 내가 그래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들의 꿈이지 내가 꾸는 꿈은 아니었다.
“본래 영등은 죽지 않아도 되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는 누구지?”
“그야 외눈박이…….”
양림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등은 섬에 표류한 어부들에게 관음보살의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섬에서 빠져나갈 길은 외눈박이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주문을 외우면 외눈박이들이 종적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부들은 열심히 외우면서 길을 걸었다. 끝에 거의 다다르자 안심한 어부들은 주문 외우기를 그쳤지. 그러자 외눈박이들이 눈치채고 폭풍우를 일으켜 길을 가로막고 어부들을 잡으러 나섰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양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영등은 그런데도 외눈박이를 막아섰고, 어부들은 도망칠 틈을 벌 수 있었다. 잠자코 시키는 데로만 따랐더라면 영등이 죽을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럼에도 영등이 그들을 살리고 자신이 목숨을 버린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양림, 너의 말대로 말이다.”
양림을 가리키자 사람들은 양림에게 시선이 쏠렸다. 아마도 그들은 양림이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 되짚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말에서 지금에 대입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불굴의 용기가 있으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영웅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영등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어부들의 후손인 너희는 영등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웅이란 각자에게 모두 존재한다고. 영등이 나서기 전에 어부 중 누군가가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앞길을 가로막았다면 그 어부 하나의 희생으로 나머지 어부들과 영등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어부는 영등을 대신해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영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죽는 순간이 부끄럽지 않게 해주는 용기. 그 용기를 먼저 내는 자가 영웅이다.”
같은 꿈을 꾼다는 것, 그것은 각자의 마음에 한 명의 영웅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영웅은 비록 육체적인 힘이나 뛰어난 지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정직이란 용기를 주고, 죽음을 숭고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돌아섰다.
마을 밖을 벗어나는 나를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짐작되었다. 요시치카가 내 곁으로 따라붙으며 보기 드문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의 이름을 연호하고 영웅의 밑으로 모이길 좋아하죠.”
내일 당장에라도 저들이 우리를 원호하기 위해 달려오리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마음과 행동은 다른 법이다. 현실은 다른 법이니까.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은 언제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영웅이 될 가능성을 닫고 사는 셈이다.
“칼 하나에 창 하나라……”
내가 들고 있던 칼을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요시치카에게 던졌다. 요시치카는 내 뜻을 알아챘는지 들고 있던 창을 나에게 던지고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주군과 저에게 충분하지 않습니까?”
요시치카가 창보다 칼에 능숙하여서 병기를 서로 바꾼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준 칼은 위정국의 칼이다. 일반 병사들이 쓰던 평범한 칼과는 제련 과정부터가 달랐다.
창을 받으니 거친 느낌이 풍겼다. 병사가 쓰던 창이니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다.
그렇게 탐라성까지 걸어갔는데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한 시진 만에 인근에 다다랐다. 탐라성을 굽어살필만한 높은 산은 모두 북쪽 해안으로 있었기에 우리는 인적이 드문 작은 동산을 찾아 하루 쉴 곳을 마련했다.
탐라성이 작아서 송군 병영이 외성 주변으로 널려 있는 것은 이미 확인한 뒤였고, 그곳에서 관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기에 하룻밤은 수월하게 지나갔다. 배가 고픈 것을 빼면 말이다. 하루 굶는다고 어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경이 예민하게 변하는 것은 느껴졌다. 이런 것 또한 상황에 따라 진리의 선택 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아침이 밝자 마땅히 준비할 것도 없이 탐라성으로 걸어갔다. 워낙 태연하게 걸어갔기에 경계하던 병사들도 미처 내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설마 이곳에서 허튼짓하는 자가 있으리라고 예상 못 할 것이다.
나를 알아챈 것은 양산숙과 양림이었다. 그들은 나와 요시치카가 나타나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제 그 이유를 곧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짐작은 대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외성의 문이 굳게 닫힌 채, 성문 위 누각에는 제법 화려한 옷을 걸친 자가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산숙은 거친 주름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가벼운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다 끝났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송군이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양산숙과 양림 곁으로 주동과 이름 모를 젊은 군관 두 명이 섰다. 둘 다 체격이 주동과 비교해 건장하고 우람했다.
그중 한 명은 금세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왼쪽 눈가 주변과 볼까지 푸른색으로 '오타모반(Ota's nevus)'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눈 주위 피부와 공막(눈의 일부분)에 청색이 넓게 펼쳐지는, 일종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저자가 푸른 얼굴의 짐승이라고 불리던 양지일 것이다.
양산숙의 말을 보충이라도 하듯 주동이 나섰다.
“척준경 장군. 아니 전(前) 장군이라고 해야겠지요.”
내 정체를 알았다는 것일까? 내 정체를 이곳에 알만한 자는 두 명뿐이었다. 나는 양림에게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양림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 명밖에 없다.
“나주 박가에서 말해주었는가?”
나주 박가가 나를 돕게 된 것은 다타라 가문과 활발한 상거래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내 정체를 밝혔다는 것은 어쩌면 나주 박가에서 먼저 내 정체를 걸고 다타라 가문이 주는 이권보다 더 큰 이권을 원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타라 가문이 필요한 것은 철광석을 다루기 때문인데 철광석은 송에서도 충분히 생산되고 있었다. 나주에서 왜로 가는 것보다 송으로 가는 것이 더 가깝고 안전한 만큼 충분히 거래 가치가 있다. 그에 더해 송에서 볼 수 없는 고려의 화석을 매매한다거나 추후 탐라와 송을 오가는 운송권에 지분을 주는 형태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왕의 밀사라 할 수 있는 신분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공식적인 것이 아니니 내가 죽는다면 아무것도 없었던 일처럼 묻혀버린다.
내가 아무리 강해도 이곳이 섬인 이상 배가 없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 처음부터 배신을 계획했는지 아니면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실소만 나올 일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가?
“다 집어치우고, 그렇게 강하다고 하는데 어디 나랑 붙어보자.”
양지가 건들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 여포가 서 있었다면 양지에게 해줬을 것 같은 대사가 내 입에서도 그대로 흘러나왔다.
“칼을 뽑는 순간, 너는 죽는다.”
수호전의 인물이라 호감이 가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수호전에 등장하는 호걸치고 제대로 된 정신 상태를 가진 인물이 별로 없다. 도둑 또는 비리 관리, 수틀리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다. 의협으로 포장하지만, 의리만 있었지 협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위정국을 베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상념에 젖었던 것도 과연 그런 내 선택이 앞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지 행동에 대한 반성은 아니었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린다. 지금의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이었다. 등장부터 건방졌던 위정국이 죽고, 그런 위정국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주동을 살려준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