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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1화 (111/257)

00111  (15) 무쌍(無雙)  =========================================================================

그런 그가 아마도 지금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악비를 만났던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주동은 뒷말을 이으려 하다가 돌연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소. 그가 삼절오은에 들고자 했다면 언제든 들 수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고, 내가 보기에도 그만한 자격이 충분히 되오.”

대체 어떤 자이기에 주동의 믿음이 강한 것일까?

“더구나 지금 그대가 죽인 위 단련사는 그를 스승처럼 여겼소. 지인을 죽인 자를 용서할 만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소. 그대는 결국 죽게 될 것이오.”

주동은 마치 내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왜 일까? 내가 위 단련사라는 자를 대신 죽여줬기에 고마워서? 하대하던 내 말투가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강하다고 칩시다. 내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그대의 과실을 공으로 바꿀 기회가 아니겠소?”

주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나라를 방비하는 것이야말로 송의 시급한 문제인데 동경의 고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고자 귀한 병력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있소.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나 마음만 있을 뿐 불의를 지적할 용기를 내지 못했소. 그러다 그대에게 화석강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했소. 고려인조차 화석강이 잘못되었음을 꾸짖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새로운 화석을 구하여 공을 세울 수 있을까만 치중하여 나라의 뿌리인 백성을 등한시했소. 비록 내가 군자는 아니나 내가 받는 녹이 백성에게 연유된 것을 아는 까닭에 이제 늦게나마 용기를 내기로 한 것이오. 그러니 나에게 깨달음을 안겨 준 그대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소이다. 일보 후퇴는 탐라를 차후 다시 밟아 뜻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오.”

거의 즉흥적으로 떠오른 화석강 이야기가 주동에게는 양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흐뭇함과 별개로 나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위 단련사, 그리고 그의 스승격인 고수가 있다. 어째 수호전에 등장하던 자들이 아닌가 싶은데…….’

수호전에서 내가 아는 위 단련사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부정했다. 위 단련사라는 자는 소설 상 가상 인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서에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근거였다. 묘한 것은 아까 내게 죽은 군관이 자신이 능주에서 왔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소설 상에서도 위 단련사라는 자는 능주에서 재직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아니지. 그자의 부장 격이라고 소설 상에서도 소개되고 있으니 주모자로 이름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송강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자는 일만의 달한다고 알려졌으니 말이다.’

머리 아프게 계속 추측만 하는 것보다 주동에게 물어보면 금세 알 일이었다. 나는 주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수호전에도 주동이란 동명이인이 출현한다. 수호전에 등장하는 자는 ‘미염공 주동’이라고 불리는데 마치 관우의 수염처럼 수염이 길고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별호다. 의협심이 무척 강한 인물이라 지금 내 눈앞의 주동과도 일치할 것 같지만 내 눈앞의 주동은 짧은 수염뿐이었다.

‘실제로 난이 일어나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하니 어쩌면 그 사이에 수염을 기른 것인지도 모르지.’

후일에 악비의 스승, 주동이 수호전의 미염공 주동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것을 아는 자는 오직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역사를 안다는 기쁨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내게 일격에 당한 단련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동에게 물었다.

“이자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소?”

“위정국(魏定國)이라 하오.”

주동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내심 탄성이 흘러나왔다. 탄성은 내 생각이 맞았다는 기쁨과 그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단숨에 베어버린 아쉬움이 교차했다.

‘젠장, 신화장군(神火將軍) 위정국이 저런 애송이였다니…….’

신화장군이라는 명호가 상징하듯 위정국은 화기와 화공에 능한 자였다. 그의 성격은 무척 직선적이고 단순해서 의협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따른다기보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자를 쫓는 성품이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그가 화기와 화공에 능하다고 알려진 것에서 나는 그가 무경총요(武經總要)의 전수자가 아닌가 싶었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지어진 무경총요에는 화약의 배합법이 실려 있는데 폭발력이 센 오늘날의 폭약이 아니라, 폭죽 같은 용도라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자욱한 연기를 발생시키거나 화공에 이용하거나, 소리를 일으켜 적을 놀라게 하는 용도인데 그 정도 제조법만 알아도 응용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아까웠다.

화약의 발전 과정은 어느 정도 알지만 깊게 공부한 것은 아니었기에 처음에 어떤 식으로 화약이 배합되는지를 알아야 이론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후한 말보다 더 조건이 나쁘군.’

인재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내 처지는 그때보다 좋지 않았다. 그때는 설득을 시도하면 인재들이 참고 들어줄 수 있는 권위가 있었지만, 지금은 권위도 권한도 그들과 공유할 꿈도 변변찮았다. 대의를 명제로 설득하기에는 지금 시대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척준경으로서의 힘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송, 요, 금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혼란기는 법보다 힘이 앞서는 시대의 전형이었다.

나는 양산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들을 물리치고 성주를 붙잡는다면 탐라의 독립을 이룰 수 있겠소? 그대들이 고려로 귀속을 원한다고 청했던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고 친다면 말이오.”

“탐라는 수백 년을 존속하며 독립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소. 당연한 말을 어찌 물으시오.”

“송군이 물러나고 그 빈자리에 왜군이 몰려온다면 그들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이오?”

“그게 무슨?”

일순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소녀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아비에게 설명했다.

“지금의 위기를 어찌 넘긴다고 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탐라에요. 우리가 힘을 쌓기까지 주변 세력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말이에요.”

“그거야 고려에 부탁하여 시간을 벌면…….”

양산숙은 반사적으로 답변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고려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이로군. 그리고 앞서 그대의 답변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오류가 대체 무엇을 말함이오?”

나름 영민한 자라고 생각하여 반군의 지도자로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탐라의 독립이라는 좁은 시야에 사로잡혀 대국을 보지 못하는 그릇이었다. 지금 당장 독립을 따낸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 역시 최악의 결과인 셈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어느 한 곳도 그대들보다 적은 역사를 가진 곳이 없다. 나라가 오래된 것이 독립의 자격이자 증명이라면 그대들은 망해도 벌써 망했을 것이다. 탐라가 수백 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대의 선조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부의 변화에 대응하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대의 마음가짐은 어떠한가? 위기를 넘기는 데 급급하여 책임질 수 없는 탐라의 귀속을 쉽사리 내뱉었고, 그 사이 상황이 불리하자 송군에게 백기를 들었다.”

지금 양산숙의 얼굴은 썩은 표정이라는 표현을 빌리고 싶을 정도로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좋다, 그것이 목숨을 살리는 최선이라면 지도자라서 당연히 져야 할 선택의 업보다. 그런 다음에는? 독립을 위해 뒤에서 칼을 갈아야 하겠지.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울까? 성주는 그대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협박과 회유가 이어지겠지. 나는 그것이 훤하게 보인다. 송으로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핑계로 그대의 딸은 볼모가 될 것이고, 그와 같은 일이 비단 그대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외지인들에게 그대의 영역을 나눠주고, 그대들에게는 탐라 남부의 개척을 명할 것이다. 집도 없고 먹을거리가 나올 기반도 없는 그곳에서 탐라의 독립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내 예상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비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소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대체 뭐죠? 고려를 택하든 송을 택하든 탐라의 독립은 불가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가요? 애초에 성주가 과욕을 부리지 않고, 귀화 귀족의 조건을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에요. 고려로서는 음흉한 속내를 지닌 귀화 귀족들을 정리하고, 탐라는 고려와 원래 관계를 회복한다. 이것이 절박한 심정으로 사자를 보낸 우리의 속내였지요. 고려와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였습니다. 이점을 살펴 주세요.”

그리고는 나를 가리킨 손가락이 반대로 향했다. 소녀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진실로 청하건대 만약 이번 고비를 넘기게만 해주신다면, 저, ‘양림’이 장군의 노예가 되어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탐라를 가엾게 여겨 영등의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양산숙은 소녀의 결심에 놀랐는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그럴 것까지 없다고 달랬고, 인파 중 누군가는 만약 내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다면 자신이 양림을 대신해 노예가 되겠다며 손을 드는 자도 여럿이었다.

나는 뒷짐을 쥐고 허공으로 시선을 향했다.

오랫동안 간섭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다 보니 그 자유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희미해지게 되었고, 그것은 곧 자유의 상실로 돌아왔다. 지금 탐라의 상황은 구한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그저 탐라의 수호자, 영등으로서 이들을 구원해주고 사라지면 그것이 끝일까? 흔히 영웅은 할 일을 다하면 사라진다지만 간신히 위기를 넘긴 자들에게는 그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을 것이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시작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시작이 잘못되었든 아니든 간에 시작한 것은 내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하시오. 내일 정오, 탐라성 앞으로 내가 가겠다고.”

“그는 그대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지인의 복수는 반드시 하는데다가 자존심도 세서 협상의 여지도 없소. 만약 지금 이곳에 모인 자들을 돕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면 아까도 말했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오.”

“그대는 만부부당이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했고, 나는 그래서 가능하다고 말했소. 누구의 말이 옳은지 그대 역시 궁금하지 않소? 그래서 나와 내기를 하나 겁시다.”

송군의 장수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강한 상대였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떠나 진정으로 부딪쳐보고 싶은 상대였다.

주동이 뭐라 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제안을 꺼냈다.

“내가 진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이니 나는 목숨을 내놓은 격이고, 내가 이긴다면 그대는 평생 다시없을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니 내 부탁하나를 들어주시오. 물론, 그 부탁은 당신이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도, 불의한 일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오.”

“대체 그가 어떤 자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오?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그는 비록 삼절오은은 아니지만, 자신의 무예가 그들과 떨어질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고, 그 자부심을 뒷받침할 만큼 혈통도 뛰어난 실력자요.”

위정국과 관련이 있고 위정국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는 ‘그’밖에 없었다.

-대도(大刀)를 잡으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

수호전 108성 중, 천용성(天勇星)을 점하고 있는 ‘관승(關勝)’이 바로 ‘그’다.

관우의 후예라고 소문난 덕분에 흔히 ‘미염공 주동’과 인상이 겹치는 느낌이 들지만 둘의 실력과 활약은 크게 차이가 난다.

그리고 관승이 탐라에 왔다면 그의 의형제이자 부장(副將)이기도 한 정목안(井木?) 학사문(?思文)도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정목안은 이십팔수 별자리 중 들개를 뜻하니 그의 면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관승의 부장 중 추군마(醜郡馬) 선찬(宣贊)도 있긴 하지만 시기상으로 보아 그가 합류하기에는 일렀다.

‘관승에 학사문, 거기에 이천의 병사.’

수호전의 무예 순위는 삼국지보다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강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소설 상에서는 활약이 미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노준의는 등장부터 천하제일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고 송강이 양산박 수령의 자리를 그에게 양보하려고 했을 정도로 명성도 높았다. 그러니 일위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 뒤를 잇는 사람은 갑론을박을 벌이기에 충분하다. 현대에서도 수호전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다 보면 뜨겁게 달아오르는 주제이기도 했다.

양산박 두령 서열과 직책을 자세히 보면 기마대를 이끄는 마군오호장과 주전력을 담당하고 있는 보군 두령이 무예의 달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나름 주관적인 잣대로 이인자 그룹을 꼽아보자면 관승, 임충, 호연작, 진명, 동평, 노지심, 무송, 유당, 이규, 양지, 장청 등이 언뜻 생각났다.

내가 생각한 관승이 맞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나는 짐짓 궁금한 척 지휘관의 이름을 물었다. 주동은 숨길 것도 없는지 순순히 그 이름을 말했다.

“양지(楊志)라 하오. 오후(五侯) 양영공(楊令公)의 손자이며 삼대(三代)에 걸쳐 장군을 여럿 배출한 명문 출신이오.”

관승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청면수 양지의 이름이 느닷없이 툭 튀어나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내가 소설과 정사를 헷갈리면서 일어난 착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수호전의 원저(原著)라 할 수 있는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와 송사(宋史) 휘종본기를 보면 관승은 화석강을 담당하는 군관 중 하나였고, 양지가 동료였다고 적고 있다.

양산박에 가담하기 전의 양지를 보면 화석강 운반 실패를 겪고 파직을 당하게 되는데 간신 고구에게 뇌물을 사용해서라도 관직을 얻고자 하는 집념을 보인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무예밖에 모르는 그에게는 장군직이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양지와 관승이 모두 이곳에 있다면!’

관승, 학사문 조합에 비하면 승리가 월등히 어려워진 난이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미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로 웃음이 머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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