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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0화 (110/257)

00110  (15) 무쌍(無雙)  =========================================================================

“탐라의 독립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천명한 것은 아버지와 숙부들이었어요.”

“우리는 온 힘을 다했다. 세상에는 불가항력도 존재하는 법이다.”

“용왕님이 현신했다면 불가항력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들이 용왕님인가요? 저들이 비와 태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나요? 무엇보다 지금의 결정……. 어머니와 숙모님들은 알고 있는 건가요?”

내가 말한 사실보다 소녀의 일침이 양산숙의 눈동자를 더욱 흔들리게 하였다. 섬일수록 여성의 인권이 높다는 통계가 있는데 그것은 멀리 바다로 나간 남자를 대신해 섬의 경제를 주도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노약자들은 한라산 언저리에 숨어 있다고 했으니 그들의 수발을 위해서라도 여인들 역시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모를 수 있다.

그 사이 나에게 복부를 채인 젊은 군관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송군도 기껏해야 오늘 도착한 것 같은데 사자가 오기를 기다려 회유를 위해 은자를 준비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 아마도 산서 명가가 그대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기 위해 착수금을 준비한 것은 아닐까? 때마침 내가 도착할 것을 알고 그 착수금으로 돌아가는 사정이나 캐보려고 했겠지.”

내가 한걸음 내딛자 전면의 병사들은 창과 칼을 당장에라도 내지를 듯 자세를 취했다. 젊은 군관은 나에게 당한 것이 어지간히 수치스러웠든지 일어서자마자 삿대질을 했다.

“감히 대국의 단련사를 능멸하다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화석강의 진실이 흘러나온 것도 살려두고 싶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와 동시에 요시치카가 가장 근접한 송군의 팔을 후려치면서 창 한 자루를 빼앗더니 날뛰기 시작했다.

“송군을 돕기 위해 나에게 달려드는 탐라인이 있다면 죽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다.”

내 손에는 젊은 군관의 군도(軍刀)가 들려 있었다. 정성스럽게 날을 갈았는지 얼굴이 환히 비치는 거울 같았다.

나는 시위하듯 칼을 사선으로 교차시키며 붕붕 휘둘렀다.

“죽기 전에 허세라도 부려보겠다는 것이냐? 네놈 따위는 나 혼자로도 충분…… 컥!”

젊은 군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단숨에 목을 잘랐기 때문이다. 허공에 치솟은 그의 입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순식간에 마무리되었기에 그 주위에 있던 병사들조차 눈을 껌벅일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깨닫자 황급히 나에게 창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송군의 지휘관은 내내 말이 없었던 장년 군관 한 명 뿐이었다. 젊은 군관이 허무하게 죽었음에도 그는 일체의 명령도 내리지 않고 등에 메고 있던 활을 조용히 풀어 내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명령을 내리는 시간보다 나를 화살로 쏴 맞추는 것이 더 빠르겠다고 판단을 내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순식간에 두 명의 복부를 가른 후, 다음 상대를 찾으면서도 시선은 장년 군관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래서 활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부터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알고도 못 막는다는 말이 있다. 분명히 쏘는 것을 확인했고, 몸을 움직였지만, 화살은 내가 생각한 시간보다 배는 빠르게 얼굴 앞까지 도착했다. 가까스로 몸을 비틀자 왼쪽 어깨 바깥쪽 살점을 도려내며 스쳤다. 핏물이 튀었고, 그중 몇 방울은 내 뺨에 닿았다.

수패가 있었다면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면서 다시 한 명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는 장년 군관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을 띠고 있었다.

힐끔 요시치카를 보니 오랜만에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벌써 여섯 명을 황천으로 보낸 뒤였다.

“그만! 모두 물러나라!”

장년 군관이 소리를 치자 송군은 허둥지둥 장년 군관의 뒤로 모이기 시작했다. 눈 몇 번 깜짝일 사이에 열 명에 가까운 인원이 죽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요시치카는 반대로 아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에게 다가와 ‘이제 손맛 좀 보나 했더니.’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국의 단련사가 죽었는데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아니 동료로서, 복수하지 않을 셈인가?”

나는 칼날을 바닥으로 내리고 있었는데 방금까지 내가 벤 자들의 선혈이 채 식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장년 군관은 침중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평범한 사자로 보이지 않소만.”

어지간히 궁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오직 한 발을 쏘았을 뿐인데 내가 피한 것을 보고 공격을 포기한 것을 보니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라고 했지?”

“영등……. 그리고……. 용왕.”

소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지금 상황을 그녀 처지에서 헤아려 보자면 아관파천(俄館播遷), 일본을 피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친 고종의 심정이 이럴까?

영등이란 이름은 탐라인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수호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래 용왕국의 일원이라는 설화도 전해져 온다. 그 이름이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양산숙을 비롯한 양씨와 부씨들이 표정이 소녀와 같이 복잡해졌다.

장년 군관은 그들의 반응에서 내 이름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위 단련장도 또래치고는 제법 높은 무예를 지니고 있었는데 단숨에 그를 제압하고, 죽였소. 게다가 내 화살마저 피했으니 그대는 필시 고려에서 유명한 장수임이 틀림없겠구려. 그러나 만부부당(萬夫不當)이 아닌 이상 모두를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오. 지금 이곳에 있는 송군은 이백에 불과하지만 일천의 본대가 탐라성 외곽에 진을 치고 있소. 탐라성주의 병사와 합치면 이천에 달하는 병력이오. 게다가 본대를 지휘하는 장수는 활이나 쏘는 나와는 달리 진짜배기 무인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러나라는 뜻이 역력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적지 않은 송군이 희생해야 할 것 같으니 이런 선택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기호지세였다. 원 역사에서 탐라는 결국 고려를 택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순순히 물러나 귀화 귀족과 동관, 하북 상인들을 살찌워줄 이유가 없었다.

그와는 별도로 나는 장년 군관의 안목과 신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젊은 군관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인지 그가 죽는 것을 거의 내버려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외 대처는 안정적이었다.

“대국의 단련사가 죽었는데도 나를 순순히 보내주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소. 나는 이미 옷 벗을 각오를 했소이다.”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이 새로워 보였다. 오히려 뒤에 늘어선 병사들이 놀라며 ‘주 도두(都頭)!’를 외치고 있었다. 도두라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중위에서 대위 정도의 직책이다. 단련사에 비하면 조금 낮은 직급이라 할 수 있었다.

혹시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일까 싶어 실존 인물의 이름을 열심히 떠올려 보았지만, 주씨로 시작하는 사람은 도통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상관이 어지간히 미웠던 모양이구려. 병사의 목숨은 아까워하면서 그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대가 빠른 판단을 내렸기에 그나마 희생이 적었소. 만약 지금 이 시간까지 싸웠다면 그대 뒷줄 절반은 줄었을 것이오.”

도발적인 언사였지만 주 도두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 선 병사들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창을 치켜세우며 반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주 도두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심술궂은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대의 말이 옳소. 만부부당이 아닌 바에야 어찌 이천이 넘는 병사를 모두 상대할 수 있겠소. 그리고 그런 자가 어디 흔하겠소? 고금을 통해 다섯 손가락이나 다 펼 수 있을까?”

내가 그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내 말에 동조하는 빛을 보였다. 나는 싱긋 웃었다.

“송군이 참으로 딱하구려. 만부부당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주 도두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그리고는 활을 멀찍이 던져놓더니 칼을 뽑아들었다.

“실력이 있는 것은 인정하겠으나 하늘이 높은 줄 모르는 참으로 오만한 청년이로구나. 내 비록 너보다 무예는 낮을지 모르겠으나 목숨을 건다면 능히 죽일 수 있다고 자부한다. 전장의 실전은 무예의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처음부터 급격하게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칼의 경로는 나의 동선을 예측하여 매우 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즉,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고수 급에 속한다는 말이었다. 요시치카와 비교해도 별반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삽시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다. 송군은 주먹을 불끈 쥐며 주 도두를 연호하고 있었고, 탐라인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한순간, 주 도두의 칼이 힘껏 일직선으로 내리그어졌다. 나는 막아야 했는데 적당히 맞춰주던 것에서 벗어나 힘껏 주 도두의 칼을 밀쳐냈다.

상대는 내가 10의 힘을 내리라고 예측하고 15의 힘을 가했는데 나는 30의 힘을 순간적으로 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오히려 30의 힘을 처음부터 냈을 때보다 훨씬 강한 힘을 단숨에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표정과 행동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그의 칼이 높이 허공에 떴고, 놓친 손이 저렸는지 시큰거리는 빈 손목을 반사적으로 매만졌다.

나는 그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전장의 실전은 무예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말했지?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대는 얼마나 많은 전장을 경험했지? 얼마나 많은 적에 둘러싸여 살아남아 보았는가?”

“큭…….”

주 도두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자에게 경험이 적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자존심이 망가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왕진을 아는가?”

그러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자신이 아는 그 이름과 동일인인지 맞느냐며 눈을 껌벅거리는 모습에서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싶었던 짓궂은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한때, 80만 금군의 교두(敎頭)였던 왕진 님을 그대가 아오?”

“그 사람이 맞다. 그렇다면 북경대명부의 노준의는 아는가?”

주 도두의 눈은 더 놀라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북경대명부의 옥기린, 노준의를 모르는 자가 천하에 어디 있겠소? 하북삼절 중 가장 젊으면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여겨지고 있지 않소? 아직 임지가 달라 만나보지 못했으나 내 고향이 근방이라 낙향하면 제일 먼저 그를 만나보려고 했소.”

나는 단정홍, 적설, 이탁, 이일민의 이름을 연달아 나열했고, 호연작, 동평의 이름도 언급했다.

“신진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자는 호연작과 동평이라고 들었는데 그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그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는지 체통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들과 모두 만났다.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겨루기도 했지. 그리고 나는 지금껏 살아남았다. 아직도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천하에는 삼절오은, 여덟 고수가 아니라, 아홉 명이 돼야 했을 것이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고 믿을 수도 없소!”

“천수를 다한 검호, 적설을 대신해 노준의는 약관의 나이로 하북 삼절에 올랐고, 누구도 그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내가 말한 것을 의심하는가? 만약 몸으로 깨우침 받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는 매우 비쌀 것이다.”

대가는 이천에 달하는 병사가 될 것이다.

내 기세에 눌려 어느새 존대로 바뀌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주 도두의 눈은 공황에 빠져 있었다. 그와 내가 말없이 서로 응시하고 있는 와중에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점차 이성을 찾아갔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 주동(周同)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 그런데 그대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속삭이고 있구려. 거짓을 진실로 둔갑할 수 있는 사술(邪術)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반응과는 별개로 나는 무심코 나온 그의 성명에 내심 흠칫 놀랐다. 내가 아는 주동은 수호전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을 꼽으라면 항상 빠지지 않는 영웅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악비(岳飛)!’

지금의 악비는 태어난 지 1년하고 반년쯤 지났을 아기 시절이다. 어릴 적부터 무예에 대한 악비의 자질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본 집안 친척들이 가난한 사정을 쪼개가며 무예 스승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악비는 두 명의 무예 스승을 모셨다고 하는데 그중 궁술을 전한 사람이 바로 주동이다.

주동이 악비에게 궁술을 가리키며 탄복하길 스승보다 제자가 낫다고 평했는데, 악비의 궁술은 100m 안의 사물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고, 8명 장정과 맞먹는 완력을 가지고 있어 강노(强弩)의 시위를 홀로 수월하게 당긴다고 했다.

악비에게 궁술을 가르칠 정도였으니 웬만한 곳에서는 명사수로 인정받을 법했고,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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