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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09화 (109/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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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무쌍(無雙)

“믿을 수 없어요.”

소녀는 조금의 믿음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초월적인 기적은 보지 않고서는 믿기 어려운 법이니까.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탐라성에 홀로 뛰어들겠다는 그 용기만큼은 인정해 드리지요. 그래도 두 사람만으로 탐라의 운명이 바뀌기에는 적들이 너무 강해요.”

소녀는 걷기 시작했다.

요시치카는 믿지 못하는 소녀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혼자서라도 능히 탐라성으로 달려가 능력을 확인시켜줄 기세였지만 나는 탐라의 사정을 파악한 것으로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아직 양씨와 부씨의 수뇌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섰지만 마치 서부 개척 시대를 보는 것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전쟁의 여파라고 했다. 노약자들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 한라산 기슭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이 마을은 전투를 위한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목책이래 봐야 겨우 전면만 두른 것을 보면 계속 밀리다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곳까지 걸어온 시간을 계산해보니 대략 삼성혈에서 4리(1.6km) 정도 떨어져 있는 걸로 추정됐다. 소녀에게 이곳에서 탐라성까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는데 12리(5km)가 조금 넘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참 단출한 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지금껏 경험해본 전쟁 중에서 가장 소규모의 전장이 아닐까?

소녀의 말에 따르자면 탐라성은 북쪽에 사라봉을 낀 제주대 사라캠퍼스 혹은 국립제주박물관 자리가 된다. 동쪽으로는 화북천이 흐르고 있으니 인근에서 이보다 좋은 자리는 없었다. 그곳에서 12리를 남서쪽으로 그으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마을인데 아마 제주지방법원 자리가 될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해묵은 진실이었지만 그 진실이 현실을 통해 나에게 닿았을 때는 묘한 감흥을 매번 불러일으켰다.

그 대상은 바로 삼별초였다.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로 삼았을 무렵, 진도가 위험해질 것을 대비해 다음 거점을 제주도로 삼았다. 그래서 제주도 공략을 시행했는데 당시 제주도에는 일천이백 명 정도가 방어에 나섰다고 적혀 있다. 삼별초는 그들을 격파하고 성을 쌓아 장차 고려 조정과 몽골의 토벌 연합군이 들이닥칠 것을 대비했다. 그들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은 것은 지금 전라의 귀화 귀족들이 구상한 전략과 같았다.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큰 섬으로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했고, 전략적인 측면에서 고려, 남송, 왜를 잇는 연결 고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탐라성의 구조에 대해서도 물었다.

‘ㄷ’자 형태의 석성으로 ‘ㄷ’자 안쪽으로 파고 들어와 양옆의 입구 두 곳 중 한 곳을 돌파하면 내성벽과 마주치게 되고 그 내성벽을 돌파하면 내궁에 다다르게 된다. 내궁의 복도는 미로처럼 되어 있고 알 수 없는 퇴로도 많아서 상대가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유유히 사라질 수 있다고 소녀는 말했다. 그래서 단독으로 침입하기 어렵다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왜성 구조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붙어 있었다. 요시치카가 있지 않은가? 그에게 후방 퇴로를 막도록 하고, 내가 정면에서 들이친다면 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일견 백 명은 넘는 사람이 나를 맞이했다. 대다수는 경계심과 불안감이 가득한 것을 보니 열세에 놓였다는 정보가 체험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정중앙의 중년인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에게 소녀가 거리낌 없이 다가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소녀의 아비인 것 같았다.

“나는 양산숙(梁山璹)이라 하오.”

임진왜란 시절, 진주 전투에서 용감하게 순사(殉死)한 장수 중에 양산숙이란 자가 있었다. 양씨의 시조는 제주에서 비롯된 것이라 임진왜란 시절의 양산숙 역시 제주에서 분파한 가문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미래에 용감하게 순사한 후손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선조라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고 침묵을 지켰다. 내가 사자라면 봉서라도 내밀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때 소녀가 아비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분들은 중재를 위한 사자가 아니에요.”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속이란 마지막 패를 꺼내 든 것은 탐라의 실상을 알리고 상대편 귀족들의 야심을 중앙에 알리는 회심의 패였다. 그런데 사자가 아니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자는 맞습니다. 그러나 중재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나섰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사자란 말인가?”

“탐라는 고려의 충실한 번국이었고 그 지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번국의 내정에 감히 주상도 모르는 일을 신하가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역모를 다스리기 위한 사자라는 말인가? 이 사실을 조정 대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인가?”

양산숙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소녀가 나에게 질문했을 때도 조급한 기색을 보였다. 조정 대신 중에는 귀화 귀족이 있다. 그들이 지금의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리한 행동, 또는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 것을 염려했을 수도 있다.

“나는 주상의 어지를 친히 내려받은 참지정사의 명으로 이 땅을 밟았습니다. 주상과 동궁, 참지정사 외에는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양산숙의 눈동자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그들이 알든 모르든 어떤 경우에도 불안한 상황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다 나는 뇌리가 번쩍했다.

“그렇단 말이지.”

중인들이 썰물처럼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십여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주변으로 족히 일백은 넘는 인원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들의 복장이 눈에 익었다. 바로 송군이었다.

나는 주변을 휙 둘렀다. 군관은 둘이었다. 스물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과 서른 정도로 보이는 장년이었다. 장년은 등에 활을 메고 있는 것이 특이했고, 청년은 일반적인 무관의 전형으로 허리춤에 도를 차고 있었다.

“놀랍군. 귀화 귀족들이 송군까지 끌어들였을 줄이야.”

송의 군사 정책은 지방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다. 최전선인 대명부가 거란과 서하를 막기 위해 존재했다면, 다른 지역은 착취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 시기 민란의 발생지들은 북방보다 남방에 치중해 있었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이들이 송 조정의 명령을 대리한다기보다 일개 권력자의 의지로 이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송군이 탐라를 점령한다면 고려 조정도 탐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밖에 없다. 명분은 송군이 탐라를 점령한 것으로 하고 실질적인 관리는 귀화 귀족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예상이 떠올랐다.

양씨와 부씨가 사람을 뭍으로 보내 고려 조정에 탐라 실정을 알리려고 한 것이 알려졌다면 반대편에서는 그에 대해 대비를 했을 것이다. 중재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양씨와 부씨를 항복시킨다면 어떨까? 그들을 모두 죽인다는 것은 앞으로 탐라 경영을 위해서 결코 이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적당한 협박과 회유를 통해 이들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중재 사자쯤은 양씨와 부씨 선에서 적당히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우라면 나를 돌려보낼 수 없다. 전혀 다른 뜻을 품고 탐라에 왔기 때문이다. 내 입을 막아야 이들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다.

소녀는 몰랐던 사실인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 청년 군관이 뒤로 손짓하자 두 명의 병사가 묵직한 상자 하나를 낑낑대며 들고와서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상자가 열리자 주변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눈치가 있다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받아들이겠느냐?”

상자에는 고려 영토를 본떠 만든 은병이 상자를 메우고 있었다. 숙종이 야심 차게 도입했던 화폐가 호사스런 빛을 발하며 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군, 현의 유지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이었다.

거절하면 목숨이 날아갈 것이고 받아들이면 귀화 귀족의 하수인이 된다는 의미니 범인(凡人)이었다면 고민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척준경이었다. 절로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이 비웃음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소국의 사자가 감히 대국의 단련사(團練使)를 우습게 보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요시치카는 이미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적에게 뛰어들어 무기를 탈취할 심산이었다.

“단련사라……. 어디의 단련사더냐. 산서 명가가 연결했다면 산동이렸다?”

산동이면 등주 지방이다. 중국의 해안선을 보면 우리나라를 향해 유독 삐죽 튀어나온 부분을 볼 수 있는데 그곳과 개경을 일직선으로 그으면 송으로 가는 최단 노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고려의 무역항로는 등주보다 훨씬 남쪽인 명주를 택하게 된다. 하북 상인들은 등주의 경제를 되살리고자 노력했지만 가장 큰손이었던 고려가 빠지니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밀주(청도)를 밀고 있었지만 고려 조정에서 밀주를 교역항으로 지정하지 않는 이상 발전은 요원했다.

“제법 눈치가 있구나. 이 몸은 능주(제남)에서 왔다.”

나는 이것이 황하를 근간으로 삼는 북방 상인과 장강을 근간으로 삼는 남방 상인 간의 분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은 아닌가 싶었다. 고려가 명주를 교역항으로 삼으면서 남방 상인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북방 상인은 요와 송을 오가며 막대한 매출을 올리지만, 불안한 정세가 자칫 상거래의 뿌리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반면 남방 상인은 비교적 전쟁에서 벗어났고, 동남아와 왜, 고려 모두와 교역이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귀화 귀족들은 고려가 지닌 중계 무역의 이점을 탐라로 옮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탐라의 중계 무역이 활성화되면 남방 상인의 이점을 뺏어 오게 된다. 이건 합포나 동래의 상거래를 흡수하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송나라에서 귀화 귀족과 손을 잡은 자는 누구일까? 이득에 민감한 자라면 나는 세 사람이나 알고 있었다. 북송의 삼대 간신이라 일컫는 채경, 동관, 고구다. 그중 채경과 동관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동관이로구나.”

지금쯤 동관은 도성인 개봉을 비롯하여 인근 군부의 수장쯤 되어 있을 때다. 채경과 고구가 안에서 전횡하고 동관은 이들의 칼이 되었다.

동관은 요나라에 대한 원한이 있었는지 아니면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사비를 털어서까지 군대를 유지하고 요나라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전력이 있다. 문제는 그의 재력이 부정축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감히 절도사 대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절도사 출신이었던 송 태조, 조광윤은 모든 군대 지휘권을 황제에게 두었다. 지방 군벌이 커질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절도사란 명칭은 명예직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관이 절도사가 된 순간 명예직이란 단어는 어불성설이 되어버렸다.

동관과 나는 악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해남도에서 동관의 일을 망쳤던 것이 나였는데 이곳에서도 동관의 흔적과 부딪쳐야 하게 생겼다.

아비와 나 사이에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를 향해 말했다.

“2년 전(1102년)에 응봉국(應奉局)을 소주와 항주에 설치했다.”

청년 군관이야 잘 알고 있겠지만, 양씨와 부씨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응봉국의 임무는 이런 것이었다. 대궐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화석(花石,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바위)을 수집하는 것이었지. 이렇게 황궁으로 보내는 화석을 백성은 화석강(花石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앞다퉈 화석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다. 기이한 화석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일단 그 집으로 무작정 들어가 황봉조(黃封條)라는 누런 딱지를 붙였다.”

“닥쳐라, 어디서 요언(妖言)을 일삼느냐!”

청년 군관이 도를 빼들고 나를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 이들에게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청년 군관의 손목을 수도로 내리치고 충격으로 떨어지는 도를 잡았다. 그리고는 발로 복부를 걷어차서 실신시켰다. 그러자 칼을 뽑는 소리가 분분히 들렸고, 청년 군관을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이 앞을 둘러쌌다.

“황봉조는 언젠가 화석을 가져가겠다는 경고장이었다. 황제에게 상납하기 전까지 잘 보관하고 있어야 했는데 화석을 빼돌리거나 잃어버리면 불경죄로 옥살이해야 했지. 어디 그뿐인가? 그렇게 수탈한 화석을 배에 가득 실어 동경(개봉)으로 가져갔는데 싣고 나르는 일은 모두 인근 백성의 몫이었다. 품삯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일했지만 외려 재촉의 채찍질만 더해졌다.”

양씨와 부씨들은 양도 수군이 고씨에게 가세하고 돌연 나타난 송군까지 그들의 편에 서자 저항해도 가망이 없다고 보고 체념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니 그들의 태도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 시기와 상대가 좋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 결과가 뻔히 보였다. 그래서 중원에서도 화석강의 횡포에 반발하여 각지의 호한(好漢)이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닌가?

바로 수호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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