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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08화 (108/257)

00108  (14) 이율(二律)  =========================================================================

중원에 온 성씨 중 소녀가 진도 김씨를 가장 먼저 거론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도 김씨의 시조 김국빈이 후한 말, 바다를 건너와서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왕건이 진도를 공략할 당시 진도 김씨는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진도의 호군이 되었다.

고려 정치의 중심은 개경이었기에 본가를 둘로 나눠 개경과 진도 양쪽에 머물렀는데 고관을 한명 한명 들춰 생각해보니 예부상서 김군국이 바로 진도 김가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

중원 지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중원 지가는 현대에는 충주 지가로 불리는데 시조는 지경(池鏡)으로 송나라 홍농 출신이다. 광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눌러앉은 경우였다. 고관 중 지씨를 곰곰이 떠올려보니 중서시랑평장사 지안이 생각났다.

화산 백가는 현대로 치자면 수원 백가를 가리킨다. 시조 백우경은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이라고 자칭했는데 당나라에서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고려로 귀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종 당시 요가 고려를 침범했을 때, 백씨는 장수 여럿을 배출시켰고 혁혁한 공을 세워 대장군의 자리에 오른 이도 나타났다.

그렇다면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 요직에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소녀는 양도 수군을 이끄는 장군이 백휘직이라고 했다.

역사적 인물들과의 관계만 생각하다 보니 내가 간과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산서 명가의 인물 역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소녀에게 물으니 일찍이 후당(後唐, 923년~936년)시절, 산서의 거상 가문이었으나, 후당이 석경당의 후진(後晉, 936년~946년)에게 밀리자, 고려로 가문을 이동, 여전히 교역에 치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라의 거상인 나주 박가와 부딪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인데 서로 영역이 구분되어 아직은 충돌이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절묘한 조합이었다. 전라 남부를 꽉 잡고 있는 토호들인 것도 모자라 조정에는 중서시랑평장사와 예부상서가 버티고 있고, 양도 수군을 직접 다스리고 있다. 이들은 평소 첨예한 사항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아니어서 나도 한번에 그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자들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탐라를 원하는 이유가 송과 왜의 중계 무역을 통한 이문을 얻기 위함이냐?”

재력을 얻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재력을 얻기 위한 것일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했다. 고려는 중앙 권력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토호들에게 이만한 천국인 시대가 없었다.

“탐라는 비록 번국이지만 어엿한 독립국이지요. 만약 탐라를 통해 송과 왜의 교역을 주재한다면 고려에 내야 할 조세는 어찌 될까요? 그리고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우리는 먹고살기 어려울 때 해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수군과 해적을 한 손에 쥔다면 경쟁자가 발을 붙일 수 있을까요? 합포와 동래의 교역량마저 모두 탐라로 가져올 속셈입니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핵심은 조세 회피도 있었지만, 교역량의 확대가 더 큰 목표였다.

고려 시대는 교역이 활발했던 동시에 제한도 심했던 시대다. 자국으로 들어오는 선단은 잘 받아들였지만, 자국 선단이 밖으로 여러 곳과 교류하는 것은 제한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지정한 몇 곳과만 교류할 수 있었는데 이는 고려사보다 송사에 더 잘 기록되어 있다.

요나라가 고려 국경 근처인 의주 인근에 3차례나 시장을 설치했었는데 고려가 적극적으로 교역에 응하지 않아 폐쇄했다는 기록이 있고, 금나라가 들어선 다음에도 국경 시장을 활성화하자는 제안을 2차례 냈다가 고려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혀 폐쇄로 가결했다. 일반 백성이 개인적으로 무역하는 행위도 근절시켰다. 그것은 고려의 주된 수출품이 쌀이었기에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 전반기는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던 절정기였고, 쌀 물가가 가장 쌌던 시기기도 하다.

쌀은 전략 물자나 다름없었기에 경쟁국에 팔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외교를 고려해 아예 판매를 안 할 수도 없으니 수량과 장소를 지정했다.

그나마 송나라는 우호적인 관계라 통제는 덜했지만 아주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벽란도가 발전한 이유도 외국 상선이 다른 항구를 사용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몰린 것도 있다고 한다. 송은 광주(廣州), 천주(泉州), 명주(明州), 항주(杭州)를 고려에 개방했고, 그중 명주(절강성 영파)가 주 항구가 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명주에 입항할 때 상선이 내는 입항료가 타국의 배는 교역량의 1/15인데 반해 고려는 1/19을 적용시켰다고 적고 있다. 그만큼 고려와의 교역량이 활발하고 중요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1079년에 나온 조칙이 그것을 증명한다. 송 조정은 고려에 대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물품을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도록 상인들을 독려했다. 문제는 고려였다.

토지세가 근간을 이르는 고려 조세 제도에서 무역세는 보다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였고, 그것을 여러 항구로 확대해 시행하기에는 벅찼다. 그래서 벽란도로 한정시켰고, 그런 조치가 송상이나 고려 상인 모두에게 불만을 일으켰다.

불합리함을 바로잡고자 지방의 큰 항구 몇 개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물량과 품목을 지정하여 무역세를 걷었지만, 자유로운 교역을 원하는 거상들에게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밀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밀무역은 불법이었으니 자칫 걸리기라도 하면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었다.

탐라를 염두에 둔 것은 그런 번거로움을 타파하기 위한 일환에서였던 것 같다. 탐라는 엄연히 번국이니 고려가 교역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없다. 탐라를 중계로 삼아 송과 왜의 무역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은 그래서 현실성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탐라에는 배에 능숙한 장정이 널려 있었다. 때때로 해적이 될 수도 있고, 상대를 막아낼 수도 있는 유능한 인적자원이다.

“정2품, 정3품의 대신이 조정 요직에 있고, 양도 수군을 장악하고 있는 장군도 있으며, 그들의 뒷배를 봐주는 거상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형편없이 밀리게 된 원인을 알겠지요?”

나주 박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아마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이 나를 돕고자 나선 것은 지금의 판도가 깨지길 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세력 판도를 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역사에서 탐라가 내년에 귀속을 청한 것은 어쩌면 지금의 나와 같은 처지에 처한 누군가가 (그 누군가는 척준경 본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지금의 판도를 깼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들은 해상 왕국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치 장보고가 중계 무역을 독점하며 일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장보고는 불과 일만의 수군으로 주변 지역을 제패했다. 그것은 수군의 특성 때문이었다. 이 시대 배라는 것은 돈이 있다고 해서 단시간에 마구 뽑아낼 수 있는 물품이 아니었고 고도의 기술도 요했다. 만약 송나라의 권력층이 일부 동조하고, 상인 중에도 거드는 자들이 나온다면 해남도처럼 탐라가 중원의 일부가 되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탐라는 고려의 땅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먼저 덤벼드는 자가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탐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갈라전처럼 내버려두었었고, 이제야 조금 복속의 필요성을 느낀 상황이었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눈을 뜨고는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 두 자루가 필요하구나.”

“장군이 요나라 장사 스무 명을 통쾌하게 내동댕이쳤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유희였죠. 이곳은 그때와 달라요. 그런데도 우리를 돕겠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목숨을 걸 만큼 임금의 명이 중요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요시치카에게 말했다.

“우리가 칼을 잡는 이유는 뭐지?”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다시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는구나.”

소녀는 내 자신감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탐라성이 고려 일개 현의 토성보다 작다고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요? 왜성을 본떠 만든 탐라성은 통로가 좁고 곳곳에 복병을 배치할 수 있어서 지금껏 어떤 누구도 탐라성 심처에 거주하는 성주를 위협한 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밀렸던 것이기도 하고요. 변변한 성이 없어 목책에 의지하는 우리와 달리 그들이 공세 일변도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성주가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나는 소녀와 근접했다. 덩치가 가까이 접근하면 뒤로 멈칫하고 물러날 법도 한데 소녀는 움찔하면서도 꿋꿋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마을에 도착하면 날이 잘 든 칼 한 자루와 방패 하나를 다오. 내일 아침 일찍 밥을 든든히 먹고 탐라성으로 향하겠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어도 상관없다. 내가 성주를 잡아 오겠다. 만약 내가 뜻을 이룬다면 너희가 설사 귀부를 거부해도 막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실패한다면 부장이 이곳의 소식을 참지정사께 알릴 것이다. 참지정사는 중서시랑평장사나 예부상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자이니 너희의 본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어떠냐?”

“탐라성 심처에 숨어 있는 성주를 아무리 장군이라도 혼자서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이곳에서 내 이름은 영등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그 이름이 내게 붙은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영등은 폭풍으로 표류한 어민을 구하고 그들을 잡아 먹으려던 외눈백이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럼으로써 탐라 어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물론 나는 죽기 위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영등이란 이름으로 이곳에 온 이상 척준경이란 이름이 탐라에 남을 일은 없을 것이다.

‘영등제의 주인이 어쩌면 내가 될지도 모르겠군.’

나름 유쾌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것이 씁쓸한 미소라고 소녀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째서죠? 왜 목숨을 그리 허망하게 버리려고 하는 거에요?”

이해할 수 없다는 소녀의 악다구니에 나는 뒷짐을 쥐며 말했다.

“탐라는 용왕이 있다고 믿는다지?”

소녀는 주춤했다. 갑자기 용왕이라니? 무슨 소리를 내가 하려고 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용왕이 만약 이 자리에 있다면 성주를 끌어내리는 것쯤은 간단한 것이겠지.”

“물론이죠. 우리는 용왕님에게 원래 탐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제를 올리기도 했죠.”

“그렇다면 믿어라.”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설마 장군이 용왕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나는 소녀에게 더 다가갔다. 숨소리가 서로 가까워질 정도까지 근접하자 소녀의 눈빛은 두려움이 감돌았고, 뒤로 한발 물러나려고 했다. 나는 뒷짐을 풀고 한 손으로 그런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이제부터 탐라에서는 내가…….”

소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용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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