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14) 이율(二律) =========================================================================
숙종과 윤관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나를 파견할 생각을 했으리라. 연락만 제대로 된다면 수군의 영향력은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이지? 고려 수군의 개입은 내정간섭에 속한다. 너희는 엄연히 일국이 아닌가?”
“제 질문에 먼저 답을 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하나씩 질문을 던지기로 했으니 소녀의 말이 맞았다. 그렇더라도 장정 둘을 상대로 자신의 뜻을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은 제주 여인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내 본래 이름은 척준경이라 한다.”
소녀를 믿을 수 있을까? 한순간 스친 의심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나에게 양도 수군이라는 배후를 언급한 것을 보면 집안 어른들이 나를 불러들인 것에 대해 능력에 대한 의심은 있을지언정 자신의 편이라는 믿음은 어느 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사실 남부 지역까지 내 이름이 알려졌을까 싶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어느새 전국구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각희에서 20명의 요나라 장사를 꺾은 것이겠지. 여러모로 나에게는 도움이 많이 된 행사였다.
혹시 모를 주위의 눈을 염려해 그녀가 아는 체하려는 것을 눈치 주자 그녀는 내 뜻을 알아채고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부씨와 양씨는 고씨와 민씨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차라리 고려가 탐라를 다스려달라고 요청했지. 참지정사는 주상의 뜻을 받들어 나를 파견했다.”
“아버지께서는 고려에서 사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장군께서 직접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실 것이 틀림없어요. 조정 대신들은 장군이 탐라로 파견된 것을 알고 있나요? 사실 귀속을 요청했던 것은 사자를 통해 적당한 중재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탐라의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개경 귀족들과도 연관된 것 같았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고려로의 복속이 아니라 조정에 공론화를 일으켜 공개적으로 정황을 살피는 사자가 파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 같았다.
만약 윤관이 아닌 다른 자였다면 분명히 조회에서 공론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남경 출타로 신료 대부분을 대동한 상태였고, 개경에 남아 숙종을 대행하는 것은 동궁이었다. 숙종에게 어지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동궁이었던 것이다.
양씨와 부씨로서는 당연히 공론화되었으리라고 여겼던 일이 은밀하게 추진되어버렸으니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당황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여럿 존재했다.
“공론화가 되면 탐라 이권에 개입하고 있는 조정의 대신 누군가가 몸을 사릴 것을 노린 것이냐? 그자는 양도 수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력자겠지.”
강력한 외세가 손을 떼면 양씨와 부씨로서는 한숨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려는 갈라전과 탐라를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 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방식을 지금까지 써왔기에 이번에도 적당하게 개입하고 중재의 대가를 받아낸 후 물러나리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소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예상과는 아주 다른 상황이 벌어졌으니 진짜로 고려에 귀속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던 것일까?
걷다 보니 주변으로 나무 그루터기가 여러 개 눈에 들어왔는데 땔감으로 쓴 것인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쓴 것인지는 몰라도 소녀는 그곳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표정이 심란한 것을 보니 나를 데려가는 것이 주저되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남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요시치카에게도 앉으라고 권했지만,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내 뒤를 지켰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둘 다 비무장이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나름 위장을 했던 것인지라 옷은 허름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자초지종을 말해줄 수 있겠느냐?”
소녀의 눈빛은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탐라가 고려에 귀속되는 것이 정말 싫은 모양이구나.”
“지금까지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잘살아 왔어요.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고 우리 역시 바깥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죠. 만약 성주가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귀속을 빙자로 고려의 중재 사자를 요청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에요. 지금 성주는 그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는지 답답할 따름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대입해보면 어감이 이상했다. 고씨가 양도 수군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고씨가 어려워서 나섰다기보다는 이미 그전부터 고씨를 충동질한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유력 귀족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았다. 양도 수군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전라도에 세력을 가진 자여야 했다. 관군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으려면 보통 귀족으로는 어림없다. 최소한 고려 개국 시 공신 가문으로 지정될만한 오래된 지역 토호여야 했다.
박현의 설명을 빌리자면 나주 박가나 동래 정가, 명주 김가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사병은 중앙군으로 귀속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양도 수군은 애초에 유력가의 사병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가문일까?
그것을 질문했지만, 소녀는 여전히 대답하길 꺼렸다. 그러면서 진실을 알게 되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하게 될지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을 작게 내뱉었다.
영문을 모르던 내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양도 수군의 편을 들어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조정에서도 그 영향력이 깊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가문 중에는 전라도에서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문이 없었다.
굳이 하나 꼽으라면 이자겸이 장차 태의가 될 것이라며 소개해주었던 내의 최사전이 생각났다. 그가 강진 최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굳이 그의 영향력을 따지자면 전통적인 유력귀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강진 일대를 주름잡는 정도라고 할까?
“나는 누구에게 휘둘릴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나는 무척 흥미가 생겼다. 만약 네가 진실을 말해준다면 나는 너에게 한 가지 권한을 부여하마.”
“무슨 권한을 말이지요?”
내 제안에 그녀는 약간의 흥미를 보였다.
“이번 일이 어떤 식으로 해결되든 귀속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너로 하자.”
소녀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린아이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장군은 자신의 입으로 어지(御旨)를 받은 참지정사의 명을 받았다고 말했어요. 설사 장군이 ‘그들’과 조금의 연이 없다고 해도 ‘어지’는 장군에게 있어 무엇보다 앞서는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아는 것이 없다지만 그 정도 이치는 깨우치고 있습니다.”
이리를 피하니 호랑이가 온다고, 소녀는 내가 받은 명령이 결코 자신들에게 이득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문제였다. 현대에서 우리는 제주도를 당연히 우리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제주도가 귀속된 것은 고려 시대였다. 그것을 떠올리면 내가 중국화를 염려하여 고려의 영토를 늘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계속된 주제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탐라를 고려로 놓고 보면 고려는 요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 단지 그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요나라만큼의 간섭이 없다는 것이 탐라로서는 다행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탐라가 귀속을 결정했던 이유 한 가지는 주변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고려의 정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자유롭게 살던 자들이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탐라에 온 것이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한 고려에 의탁하는 것이 탐라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한반도의 왕조들은 왜 중국에 편입되지 않고 자주성을 지켰어야 했느냐는 논리와 배치하기 때문이다. 또는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하고 신탁통치가 결정 났던 시절, 차라리 푸에르토리코나 괌처럼 미국령이 되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는 일부 국민의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치르고 연방으로 출발했을 때, 겨우 13개 주로 시작한 것을 상기하면 말이다. 버몬트, 텍사스, 하와이는 엄연히 독립국이었다가 통합되었다. 그 과정을 보면 미국이 원래 다민족 국가라서 통합이 쉬웠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했던 논리도 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매국노라고 욕하는 친일파 중에는 강대국 일본과 합쳐지는 것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길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사고로 생각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현대의 발전된 정치 체계와 철학의 수립과정은 과거의 잘못을 계속 갱신하면서 변화를 거듭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푸에르토리코의 예를 떠올렸다.
푸에르토리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지만 1898년 미서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전하여 미국으로 관할권이 넘어온 경우다. 오래도록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탓에 언어도 스페인어를 쓰고, 문화도 스페인이었지만 경제는 미국이 지배한 형태가 되었다. 독립주의자들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외치자 미국은 푸에르토리코가 독립하면 원조 중단과 지금까지 혜택으로 부여했던 무관세를 철폐하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때 주민 투표를 통해 최초로 민선 지도자를 뽑게 되는데 무뇨스 마린이란 정치가다. 그는 ‘기아 속의 독립은 모든 것의 상실이자 후퇴.’라는 말을 남기면서 당선이 되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민이 투표를 통해 독립보다 자치령으로 남기를 원한 것은 스페인과 비교해 미국의 정치가 그리 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참정권만 없는 미국 시민권 혜택은 다른 카리브 국가가 누릴 수 없었다. 자주권보다는 이득을 선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막대한 이득을 식민지에 보장해주면 정당한 지배는 성립할 수도 있다.’라는 답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정당한 지배에 대한 답이 그것뿐일까?
예전에 가후는 나에게 정치는 군자가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쩌면 정당한 지배를 계속 마음속에 되뇌고 있는 것이 과거 고민의 연장 선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은 바뀌기 어려운 것인지 같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는 결과라고 말하는 이유가 답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답을 미리 내놓고 과정을 짜맞추는 것이 아니라…….
뇌가 번쩍이는 느낌이 들었다.
‘칸트가 말했었다. 평등의 원리에 기초하여 만인의 통합된 의지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 정치다. 현실의 정치가가 공리와 윤리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보증은 공개성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 국가와 주민 대다수가 노예 출신인 푸에르토리코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일본이 우리를 병합했던 과정이 국민의 의사가 철저히 무시되었고 비공개적인 절차였다면, 푸에르토리코는 국민 투표를 통해 공개된 의사를 모았다. 그렇다면 강대국이 식민지를 침탈하는 사례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푸에르토리코의 사례를 들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그렇다면 지금 탐라의 경우는 어떤가?
고려가 탐라를 복속하는 시기는 내년이 맞지만, 자치권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이 보장했다. 그리고 탐라가 자치권을 포기한 것은 그로부터 근 300년 뒤인 조선 시대다. 내가 푸에르토리코가 떠올랐던 것은 귀속 과정이 몹시 흡사하기 때문이다.
원나라가 근 100년간 탐라를 지배했던 적이 있었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 탐라를 되찾게 되는데 자치권을 탐라에 그대로 돌려주었다. 선왕들의 외교 노선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스페인의 압제에서 미국이 구원자로 등장한 것처럼 탐라의 당시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자치를 허락받은 뒤에도 경제적으로는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계속 받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강제적인 무력이 동원되었다면 탐라는 독립을 지키려고 투쟁했을 것이다. 번외의 생각이지만 탐라를 대한 관대함만큼 대마도에도 쏟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내가 어떤 약속을 해야 네가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나는 팔짱을 끼고 하늘에 피어오른 뭉게구름을 감상했다.
“나는 원래 곡주 출신으로 그 지역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어 토호는 없고, 잡척만 득실대는 곳이다. 외부에서 보면 거칠고 각박한 삶이지만 그래서 더욱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마음은 이곳 탐라의 백성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정해주마. ‘귀속’과 ‘자치’는 다른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탐라는 고려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이는 귀속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뭉게구름을 열 개쯤 셌을 때였을까?
“양도(진도) 김가를 아시나요?”
“아!”
가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내력이 다른 명가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뒤이어 나오는 가문들의 이름을 들으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전혀 다른 배경이었다.
“중원 지가, 화산 백가, 산서 명가와 함께 무안과 영암, 양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귀족입니다.”
이들 가문은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활약했던 후한(後漢) 말, 또는 그 이후에 일어난 난리를 피해 전라도에 안착한 가문들이라는 것이다. 즉, 중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