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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06화 (106/257)

00106  (14) 이율(二律)  =========================================================================

“신혼이 한창인데 탐라로 떠나게 되는 것이 아쉽지 않으십니까?”

배를 기다리는 사이 요시치카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고려나 왜나 지금의 시기는 성에 관한 한 상당히 개방적이었기에 이소와 초야를 치르고 난 다음 날에 ‘좋았습니까?’라는 말을 만나는 사람마다 들었던 터였다.

‘현대 같았으면 징역을 살았을 테지.’

현대에서 이루지 못한 결혼을 두 번의 생을 통해 여러 차례 치른 것을 보면 복이 많다고 해야 할지 쓴웃음만 나왔다.

초야를 치르고 해가 밝았을 때, 이소는 단정한 자태로 내게 절을 하며 말했다.

-이제는 오라버니가 아니라 부군이라 부르겠습니다.

마른 눈물 자국이 보였는데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과 자매의 죽음 등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부터 웬만한 사람은 겪어보지 못할 파란만장한 인생의 소유자가 아닌가?

이소 곁에는 히카리가 남았는데 그녀는 떠나는 나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겼다.

-탐라에서 다타라 가문은 제법 가깝습니다. 힘이 필요하거든 주저하지 마십시오.

탐라를 둘러싼 다툼은 육상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치열할 것 같았다. 나는 히카리의 제안으로 하나의 패를 더 손에 넣은 것과 같았다.

기다리다 보니 배가 도착했다. 배는 군선이 아니라 탐라로 떠나는 나주 박가의 상선이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상행위는 필요한 법이었고, 탐라는 경상보다는 전라와 거리가 가까워서 전라의 거상 나주 박가가 유통망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런 나주 박가의 상선을 타고 남하를 시작했다. 선장은 나주 박가 방계 출신이라고 자신을 밝힌 박현이라는 자였는데 오래도록 상인 생활을 해서인지 아는 것도 많고 입담도 구성졌다. 그는 내가 승선한 것을 비밀로 하기 위해 미리 입 맞춘 정보로 나를 대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이 ‘영등’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무슨 뜻인가 싶었다. 그러나 박현의 설명을 듣고 무릎을 쳤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바로 제주의 영등굿을 가리킨다는 것도 깨달았다. 영등은 반인반귀(半人半鬼)로 평소 용왕국에서 조용히 사는 자였다. 어느 날 탐라의 한 어선이 폭풍을 만나 괴수 ‘외눈배기’가 사는 섬에 표류했는데 우연히 그것을 지켜본 영등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나섰고, 끝내 목숨을 희생하며 어부를 구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영등굿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지금의 내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영등이란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내가 그렇게 남하하는 사이 나의 대역을 맡은 죄수는 팔음도(八音島, 강화 인근 섬) 귀양에 처해 졌다. 강화도로 가는데 왜 남부로의 귀양인가 싶었겠지만, 개경의 지리적 위치상, 남경(서울) 이남은 모두 남부지방으로 봤다.

내 귀양지가 팔음도로 정해진 것은 그 인근이 서해 중부, 고려 수군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수군을 통제하면 내 종적이 쉽사리 알려지기 어려웠으므로 숙종과 윤관이 고심 끝에 결정했다.

“서해에는 큰 수군 기지가 다섯 곳이 있습니다. 동해에 세 곳, 남해에 두 곳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지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성인 개경부터가 서해 벽란도를 끼고 있었고, 요와 송 외에 각국의 배가 들락날락 거리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고려로서는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바다였다. 나도 수군에 대해 자세하게 듣는 것은 처음이라 참 부끄럽게 여겨졌다. 정치적인 부분에 신경 쓰다 보니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동해의 세 곳은 잘 알고 있었다. 강증이 그중 한 곳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흥진(元興鎭, 함경남도 정평군), 진명진(鎭溟鎭, 강원도 문천군), 영인진(寧仁鎭, 함경남도 금야군)이었다. 모두 북쪽에 치우친 것을 알 수 있는데 동해에서 가장 위협은 왜구가 아니라 여진 해적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구를 막는 것은 남해에 있는 두 개의 수군 기지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맞장구를 쳐주자 박현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서해를 북에서 남으로 훑자면 압록구(鴨綠口)가 가장 북방입니다. 그다음이 서경을 중심으로 한 대동구(大同口), 지리적으로 송과 가장 가까운 백령진(白翎鎭, 백령도), 도성인 개경과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예성구(禮成口), 마지막으로 방금 지나치고 있는 팔음도입니다.”

그 말은 강화 이남으로 수군 기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안정되어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남해에 있는 두 곳의 수군 기지만으로도 버틸 수 있다는 뜻일까? 궁금해서 물으니 박현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태조께서 고려를 세우실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곳은 해상으로 부를 쌓은 거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거상들은 자체적으로 호위 선단을 보유하고 있었지요. 대부분은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지금처럼 해상 운송이 활발하여 해적도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국가의 힘만 믿고 아무런 안전보장 없이 막대한 물건을 싣고 다니는 거상은 없습니다. 남해에는 두 곳의 수군 기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전라 수군은 양도(壤島, 진도)에 본부를 두고 있고, 경상 수군은 합포(合浦, 마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전라에서는 본가가 될 것이고, 경상에서는 동래 정가가 됩니다.”

그들을 호군이라 칭한 것은 단순히 명예를 내려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동래 정가만 하더라도 왜국과의 무역이 잦을 것인데 매번 수군의 호위를 받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왕건이 지방 귀족들의 군사력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두 가문의 수군이 살아남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해도 여진 해적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삼진을 제외하면 이하 남부 지방은 명주(강릉) 김가의 수군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껏 고려의 해안이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명주 김가의 인물을 한 명 알고 있었다. 이자겸의 손위처남이라고 소개를 받았던 김인존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경주 김가가 김한충을 구제하기 위해 뭉쳤을 때, 명주 김가 역시 같은 집안일이라며 김한충 구제에 앞장섰다. 동계가 뚫리면 강릉이 위험한 만큼 그들로서는 종친이 동계를 맡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고씨는 수백 년 동안 성주와 왕자 자리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세습제가 아니라, 삼성혈(三姓穴)의 주인들인 고, 양, 부 삼성(三姓) 합의제였는데 고씨의 힘이 강해지면서 합의제가 유명무실해진 것이지요. 기세등등해진 고씨가 양씨와 부씨를 사성(賜姓)이라며 몰아붙인 탓에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과거는 역사의 거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보통 제주 공항이나 항구에 도착하면 먼저 보는 유적지 중의 하나가 삼성혈로서 제주도 신화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에서는 서귀포시 같은 제주 남부가 더 주목받고 관광지로도 인기 있지만 지금 시기는 탐라 주민 대다수가 제주시 인근에 몰려 살았다. 뭍과의 교역이 쉽고 산지보다 평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에서도 삼성혈의 역사를 두고 고, 양, 부 종친회가 치열한 법적 다툼을 벌였던 것을 기억했다. 1962년부터 시작된 해묵은 분쟁이 40년이란 긴 시간을 지나며 또 다른 오해와 불신을 만들게 된다.

삼성혈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삼성사 재단’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고씨 종친회에서 ‘고, 양, 부 삼성사 재단’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갈등은 시작되었다. 당연히 양씨와 부씨는 발끈했다. 고씨가 먼저 앞에 배열된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름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런 차에 그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사건이 터졌다.

대대로 탐라성주를 지낸 고씨가 수족 같은 두 가신에게 성을 내렸는데 그것이 양씨와 부씨라는 것이다. 오랜 믿음인 삼성혈의 전설과도 동떨어지는 해석에 양씨와 부씨는 극렬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재현되고 있었으니 어찌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탐라의 가호는 제가 알기로 8천 호 정도 됩니다. 다툼을 피해 탐라 남부, 주변 섬에 이주한 가호까지 모두 합친다고 해도 1만을 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라산 일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언제 분화할지 몰라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대답을 듣고 가호 대다수가 북부에 몰려 사는 또 다른 이유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이 시기 한라산은 활화산에 속해서 100년 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002년(고려 목종 5년)~1670년(조선 현종 11년)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화산 분화와 두 차례의 대규모 지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기록에 남지 않은 재해도 충분히 존재했을 시기다. 사람들은 분화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았고, 그것이 북부에 몰려 살게 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1만 호도 안 되는 가호라면 탐라의 크기로 봤을 때 분쟁 없이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수치였지만 환경의 영향이 그들을 밀집하게 하였고, 분쟁을 키운 것을 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자연재해나 질병이 전쟁보다 무섭다 보니 그들은 육지보다도 열심히 신의 존재를 믿었고, 빌었다. 용도별로 신들이 존재하다 보니 1만 8천에 달하는 신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얼핏 보면 일본의 토속신앙과도 맞닿아 있다. 그 정도 신이라면 한 집당 두세 명의 신을 모시는 것은 보통이라는 것이 아닌가?

강화에서 탐라까지 5일 정도가 걸렸다.

전라 수군 기지인 양도에 들르는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들러봐야 좋은 일이 없다고 박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 이상 수군을 만나봐야 상납만 당한다는 그런 인식이 깔렸었다.

마침내 탐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요시치카는 선상 생활이 지겨웠는지 활기가 돌았다. 탐라의 첫 관문인 포구는 고씨가 장악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양씨와 부씨가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작은 포구들이 주위에 적지 않게 있었지만, 대선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지금 내가 내리고 있는 이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박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기억하는 제주 지도를 그렸고, 그 지도위에 정보를 하나씩 채워갔다. 지금 내가 내린 포구는 제주항 국제 여객선터미널 선착장이 들어설 자리였다. 고씨는 포구를 중심으로 일도동, 건입동, 화북동을 세력권으로 두고 있었고, 양씨는 제주시청 자리를 중심으로 이도동 일대를, 부씨는 제주 퍼시픽 호텔을 중심으로 삼도동, 용담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탐라의 도읍은 고씨의 세력권 정중앙, 일도동에 자리 잡은 탐라성이라고 했는데 성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규모라고 했다. 지방 호족이 기거하는 저택 수준이라고 보면 될까?

전쟁하면 싸우는 총원이 이천 명을 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일견 이해가 가기도 했다.

박현이 포구에서 고씨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와 요시치카는 분주히 움직이는 일꾼들에 섞여 포구를 이탈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삼성혈이었다.

세 가문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삼성혈만큼은 그 중요성을 고려해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곳을 중심으로 물물교환의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필요성이 암묵적으로 인정되면서 치외법권 지대 비슷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바로 그곳에서 나는 양씨 측 인물을 만나기로 했다.

삼성혈에 도착하자 물물교환 시장에 대한 상상은 사그라졌다. 규모도 매우 작았거니와 교환되는 품목도 전부 보잘것없었다. 벽란도를 보다가 이곳을 보니 오히려 벽란도가 대단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영등?”

건장한 뱃사람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구리 피부의 늘씬한 소녀가 다가왔다. 하긴 남자들은 하나같이 배를 타고 어업활동에 나서거나 병사로 나서야 하니 여자들이 잡무를 맡았을 것이다. 이 시기 어부는 먹고살기 위해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약탈 행위를 벌였고, 그런 행동은 때때로 목숨과도 직결되곤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두말없이 신형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제법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소녀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이 궁금해서 앞서 걷는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설명했다.

“성주(고씨)와 분쟁이 치열해지면서 장정이 모자라기 시작했어요. 쓸만한 장정 중에는 분쟁이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며 훌쩍 배를 타고 떠난 경우도 적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외지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지요. 주로 남부 호족의 사병들이지요. 대가를 약속하고 빌리는 것인데 이번에 성주가 무려 100명이나 외지인을 불러들였어요. 우리가 두 명을 불러들였다고 하면 그쪽에서는 외려 쾌재를 부를 만한 소식이지요. 그러니 그들이 알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보다…….”

삼성혈을 벗어나 4리 정도를 걸었을까? 인적이 점차 뜸해지지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나와 마주쳤다.

“솔직히 무엇을 기대하고 왔는지 몰라도 우리나 부씨들은 정말 가진 게 없어요. 생선이나 나물을 실컷 먹으려고 왔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아버지는 대체 그대들에게 무엇을 약속한 거죠?”

소녀의 아비가 아마도 양씨의 수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하나도 전해 들은 것이 없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 역시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100명이나 외지인을 끌어들였다고 했는데 100명 정도를 흔쾌히 지원병으로 내줄 정도라면 상당한 유력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성주는 누구와 손을 잡은 것일까?

“공평하게 하나씩 서로 알고 싶은 것을 질문하도록 하자. 어때?”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질문에 먼저 답을 해주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세력은 실로 뜻밖이었다.

“양도(진도) 수군이에요.”

입술을 질근 거리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이름만 떠올려도 불쾌한듯했다. 양도라면 전라도를 담당하는 수군이다. 그들이 탐라의 이권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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