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14) 이율(二律) =========================================================================
현실 정치에서 진보가 보수에게 지는 원인을 분석할 때, 언론을 통해 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진보는 일이 닥치면 토론에 열중하고 오지도 않을 허물에 대해 반성을 먼저 한다. 반면 보수는 이론을 정립하기 전에 투쟁과 실천에 나선다. 이긴 다음에 정당한 이론을 쌓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 강점기를 겪은 후, 친일파 청산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지식인 중 일부는 그 잘못을 우리의 민족성으로 돌리며 우리가 못났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해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어떠한가? 전쟁의 정의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며 자신들에게 가해진 ‘자학적 역사’의 굴레를 벗고자 애를 쓰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고 증인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역사 왜곡은 그치질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항주의의 현실화…….’
우리는 지금껏 자라오면서 문명세계의 일원답게 폭력적, 배타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자라왔다. 그러나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지배자, 권력자, 상위자의 논리다. 자신은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약자의 폭력과 배타적인 행위를 죄의식이라는 굴레에 가두려고 하는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을 무렵 영국은 기독교를 인도에 전파했다. 성경을 전하며 세상에 좋은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다고 했을 때, 인도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좋은 종교를 믿으면서 당신들은 왜 우리를 못살게 굽니까?
얼마나 신랄한 비판인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정치적 약속’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오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되자 전후 처리를 위해 회담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카르타고 인들이 외려 놀랄 정도로 관대한 조치를 담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근현대의 역사가들이 회담 주재자인 스키피오 개인의 이해 때문이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제안은 더욱 멀리 보고 있었다. 지중해에 있는 경쟁자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 피지배층에게 용서가 없는 정부.’의 출현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상적인 정치라서가 아니라 반(反) 로마적 정치에 대해 로마가 이해하고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정치와 외교가 예측 가능해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있었다. 그에 더해 적의 도시가 경쟁자로서 살아 있는 동안 로마는 끊임없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진 입지가 과거와는 너무 달라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 선택의 연속이었다면 이제는 서서히 그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답마저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언제까지 갈팡질팡하며 있을 수는 없었다.
그중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이 바로 내 처신이었다. 척준경이었기에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준경 본연으로서의 능력을 제한했다.
“뭘 고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소는 핏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하얀 손을 내 손에 겹쳤다. 서늘한 기운이 열이 나던 내 손을 식혀 주었다.
“나는 항상 오라버니의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줘.”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나를 믿고 지지해줄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열정이 솟았다. 나는 이소의 손 위로 말없이 남은 한 손을 덮었다.
그렇게 삼 일이 지났다.
그 삼 일간 조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동계 병마사 김한충이 직접 상경하여 야율대석과 있었던 일을 낱낱이 공개하면서부터였다.
이해관계에 따라 크게는 주전과 반전 두 무리로 갈렸고, 그 무리 중에서 또 소무리로 갈렸다. 그 사이 경주 김가와 공감대를 이룬 인주 이가의 입김은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 해결책을 내놓는 성과를 보여 단연 주목을 받았다.
숙종으로서는 여진과 전쟁을 생각하기도 전에 느닷없이 출현한 요와의 마찰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먼저 해결책을 내놓은 경주 김가와 인주 이가가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니 본래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백산부와 나와의 약속은 김한충과 강증이 입을 다물어 준 덕분에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국과 마찰을 일으킨 장군, 척준경을 그 죄를 물어 파면(罷免)한다. 상급자로서 하급자의 경거망동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부화뇌동한 동계 병마사 김한충을 2년 정직에 처한다. 동계 수군을 맡는 시어사 강증은 이번 건에 책임이 없다고 여겨 유임한다.”
파면은 공직자를 퇴직시키는 행위 중 중징계에 속하는 것이었다. 파면되면 아무리 왕이라도 일정 기간에는 재임용할 수 없는 것이 법칙이었다. 그것은 현대 공무원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누구의 책임이든 간에 요의 사신이 와서 내부 간섭을 벌이는 것은 모두가 질색하는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빨리 정리하여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뜨거운 소재였음에도 비교적 빨리 정리되었다. 물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주 이가 같은 가문도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모든 가문의 입김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경주 김가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인 김한충의 정직을 대가로 화폐로 유통되고 있던 은병(銀甁) 1만 개를 조정을 대신해 요에 대한 진상품으로 내놓기로 했다.
고려의 영토를 본떠 만들었다고 알려진 은병은 숙종의 명령으로 일천오백만 개 정도가 만들어졌다고 하고 각 지역의 유력 가문 숫자를 생각해보면 경주 김가 정도의 진상 비율이라면 가문에 비치된 모든 은병을 끌어모았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기에 다른 가문들도 진상품에 대해 큰 이견 없이 넘어갔다.
위위경 김덕진이 김한충을 대신하여 동계 병마사로 임명된 것도 별 무리가 없었고, 강증이 동계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그가 남아 있기에 백산부와의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의 사신이 미처 온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전에 전쟁에 관한 것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104년 8월의 중순, 나는 지금 벽란도 선착장에 서 있었다.
바로 탐라로 가는 배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요시치카가 묵묵히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탐라 행이 결정된 이유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정된 일이었다. 주된 이유로는 요의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김한충과 나를 벌했다는 근거를 대기 위해 남부로의 귀양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귀양 명령이 아니라 나름의 고심이 들어 있었다.
노령인 김한충은 고향으로 돌아가 쉬는 것이었고, 나는 숙종과 동궁에게 탐라 제압의 밀명을 받았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공교로운 명령이었다.
탐라국은 고려 치세 하에서 번국(蕃國)으로 존재해왔다. 마치 요나라를 대하는 고려처럼 고려를 요나라 대하듯이 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내년인 1105년에 고려의 1개 군(郡)으로 편입된다. 편입된 이유에 대해 실록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탐라가 절로 신속(臣屬)한 것인지 아니면 강압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자치를 누려왔던 역사를 비춰볼 때 순순히 종속을 택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많았다. 그런데 그 의문의 열쇠가 바로 나로 귀결된 것이다.
탐라의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은 바로 내 혼례식장 자리에서였다.
요나라의 장사들을 꺾으며 영웅으로 떠올랐던 신성이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에 파면되었다는 사실에 백성은 요나라의 입김이 들어간 것은 아닐까 분개했고, 저잣거리에서 나는 때를 잘못 타고난 불운의 사나이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때에 인주 이가가 숙종에게 이자위의 귀양을 풀어 달라고 조회에서 요청했고, 이자위의 노령과 나와 이소의 혼례에 참석할 혼주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자위가 언급된 것은 이자겸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인주 이가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숙종과 동궁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니 이자위 복귀를 단순히 혼례식 참여에만 한정시킨다는 이자겸의 양보 수는 예상보다 더 좋은 효과였다.
애초 계획대로 중도파와 협상하여 마치 그들의 의견에 따라 이자위의 복귀를 철회한 것처럼 유도하고 그들이 송나라 정기 사은사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윤관을 대신해 새롭게 추밀원사에 오른 최홍사와, 비서감 정문이 그 혜택을 받아 송으로 떠났고, 중도파는 이자겸에게 우호적이 되었다.
내 혼례식은 8월 초하루로 잡혔는데 숙종이 남경으로 떠난 다음이었다. 그렇게 잡은 것은 동궁은 개경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이자위의 영구적인 복귀를 막아낸 것으로 만족했는지 아니면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동궁이 내 혼례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자겸의 말을 빌리자면 혼례를 통해 인주 이가가 결집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감시의 의미로 참가했을 것이란 예측이 있었다. 나 역시 공감했다.
숙종으로서는 설마 예종이 이자겸의 딸에게 반하는 일이 있으리라 상상했을까? 그러나 그 빈틈을 이자겸을 노렸다. 그리고 그런 노림수가 실제로 잘 맞아떨어졌다. 예종이 이자겸의 둘째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고려사에 너무나 잘 적혀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성대하게 치른 혼례식에서 나는 동궁에게 한 가지 선물을 남기기로 했다. 그에게 술을 받는 자리에서 화폐 제도 개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남경으로 떠난 숙종이 그곳에서 신하들과 화폐 제도의 개선을 논할 것이었지만 내년이면 예종이 왕이 된다. 그의 호감을 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지적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복제 방지에 대한 조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쓰임새의 확대였다. 복제 방지는 기존 은병의 모양을 개선하자는 내용과도 일치했다. 기존의 은병이 고려 영토를 본뜬 것이라 호리병 같은 모양이라면, 현대 동전과 같이 원형으로 만들되 원형 주위에 빗금을 치는 주조 방법이었다.
현대 주화를 보면 원형 주변에 빗금으로 이루어진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위조를 하려는 자들이 같은 둘레를 만들려면 일반 화폐를 만드는 것보다 더 정교한 기술과 시간, 비용이 필요하게 된다. 단순한 것처럼 보여도 그 방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효과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동전에서 10원짜리를 제외하고 모두 그 기술이 적용되어 있는데 10원이 제외된 것은 가치가 워낙 낮기 때문이다. 즉, 복제해도 오히려 손해라는 말이다.
또한, 쓰임새의 확대는 국제항인 벽란도에서 고려 화폐를 기축통화(基軸通貨)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현 화폐 제도는 단위가 큰 만큼 일반 백성을 상대로 유통하는 것보다 상인들을 대상으로 확대하는 것이 차후 보급에 더 유리한 면이 있었다. 숙종은 화폐가 은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외부로 유출하면 손해가 나는 것으로 인식하여 내부 확장에 주력했지만, 고려의 장점이 활발한 무역임을 참작할 때 이는 기우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화폐가 은으로 만들어졌기에 은 자체의 가치만으로 축재할 수 있다고 하지만, 화폐로서 살 수 있는 것이 은 자체의 가치보다 높다고 한다면 자연 화폐는 순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익에 민감한 상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동궁의 스승 자격으로 동행한 한안인이 무릎을 치며 동조해준 덕분에 동궁이 부왕의 명이라며 내게 탐라 행을 설명했을 때는 말투에서 미안한 감정마저 느껴졌다.
“탐라는 4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고, 양, 부씨가 오래된 토성(土姓, 호족)이고, 고씨의 외손인 문(文)씨가 근래 들어 강성해져 4성이 될 수 있었다. 태조께서 탐라를 갈라전과 같이 기미주 취급하여 자치를 허락하고 있었으나 최근 4성 간에 지배권을 두고 혼전을 벌이는 통에 백성이 뭍으로 나오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고 장계가 올라왔다. 4성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은 고씨이며 양씨와 부씨가 힘을 합쳐 견제하는 형국인데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의 자리를 고씨가 오래도록 독점한 것에 대한 불만이 터진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4성 중 하나인 문씨가 참전하지 않아 양씨와 부씨는 고씨를 상대로 팽팽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문씨가 고씨를 돕기 시작하자 지금은 몹시 어려운 처지라고 한다. 그러자 양씨와 부씨는 사신을 조정으로 보내 차라리 탐라를 고려에 귀속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구당사(勾唐使)를 파견하여 중재를 시킬까 생각했지만, 참지정사(參知政事, 윤관)가 너를 하릴없이 놀리는 것은 아국의 손실이라며 계획을 짰다.”
탐라국은 왕을 성주라 칭했고, 이인자는 왕자라고 불렀다. 왕자는 보통 성주의 동생이 맡았고, 성주의 아들은 태자 또는 세자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탐라국을 회유하거나 살피기 위해 무산계(武散階)를 수여하거나 구당사를 파견했는데, 무산계는 무관의 품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아무리 높은 직급을 받아봐야 문신이 받을 수 있는 1, 2급을 받을 수 없었으니 탐라 성주의 지위는 고려 상장군, 대원수 직급과 같게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당사는 벽란도에도 존재하는 관리의 명칭인데 외국과 왕래하는 나루터에 파견하여 도강(渡江)을 담당하던 관리직이다. 그러나 탐라에서만큼은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큰 권한이 있었다.
‘북방 갈라전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보며 윤관은 이번 기회에 탐라를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앞으로 탐라를 경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므로 내부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기를 바랐다.’
실권을 모두 잃어버린 나를 윤관이 떠올린 것이 그 때문이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남부 귀양을 명령받았다. 이제 나는 성도 이름도 없는 사람이 되어 고려 의탁을 결심한 양씨와 부씨의 일개 병사로 활약하게 될 것이다. 나라면 지금의 열세를 충분히 뒤엎으리라고 숙종과 동궁, 윤관은 확신한 것이다.
이자겸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다. 이자겸이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성공의 대가는 복귀였고, 탐라의 귀속은 고려나 자신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