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14) 이율(二律) =========================================================================
그의 주장들은 지나친 자기합리화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런 자존감이 권력의 상층부로 이끌었는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틀린다고 말해도 옳다는 확신 아래 수단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모사들이 이런 존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야기해봐야 같은 이야기만 반복될 것 같았다. 그의 신념에 대해서는 이제 눈을 감고도 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읍을 하고 밖으로 나가는 내게 이자겸이 말했다.
“안채에 들르거라. ‘소’가 딸아이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이소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문득 이소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이소에게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홀로 고민했고, 홀로 결정하며 이 자리에 섰다.
생각해보면 내게 불만이 많았을 법도 한데 내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새삼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왜일까?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자매의 죽음을 잊을 수 없어서?
아니다.
이소가 이따금 나를 바라볼 때면 내 전신을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서늘한 눈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믿음이 이소를 침묵하게 하였던 것은 아닐까?
안채에 기별하자 곧 문이 열렸다. 안에는 이소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자겸의 두 딸이었다. 이자겸은 딸이 넷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첫째는 병으로 일찍 죽었고, 둘째가 예종에게 시집을 갔고, 셋째와 넷째가 예종의 아들인 인종에게 시집을 갔다. 그중 넷째는 언니들과 나이 차가 많은 편이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다.
그러니 지금 나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이자겸의 두 딸은 둘째와 셋째였다.
인주 이가가 황후를 많이 배출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두 딸의 미모는 이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마음씨까지 착해서 부군을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 이자겸의 명을 거역하는 경우를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그녀들이 물러나고 나는 이소와 마주앉았다. 밀실에 남녀가 둘이 있다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은 고려 시대에는 없던 말이다. 성관계도 비교적 자유롭던 시대였으니 현대의 규범보다도 더 자유로운 풍조가 있었다.
이소는 사촌들과 곡주 한잔을 나누었던 참인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배꽃 같은 얼굴에 홍조가 드니 이제는 새삼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온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퉁명스럽다고 여길법한 냉랭한 말투였지만 이소의 성격을 이제는 알고 있는 탓에 걱정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개경에 온 지 알고 있었기에 급한 일을 처리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일부러 시간을 냈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탁자 밑에서 하얀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온 것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만약에.”
우리는 흔히 비밀을 숨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밀의 벽에 나를 가둔다. 나는 그것을 이소의 얼굴을 보고서야 알았다.
왜 민국 시절에 제갈량, 방통, 서서 등과 미래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이민족도 몇 세대만 지나면 중화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의 역량이 자칫 내가 알지 못할 방향으로 흐를까 염려되었던 탓이다.
선한 본을 보이자. 딱 거기까지가 내가 정한 선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진보가 항상 낙관적인 답이 될 수 없으며, 퇴보가 비관적인 교훈만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역사적 선택에 의해 미래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대안은 나뿐만이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뭔가에 의해 다수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행동은 하면서도 그 행동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결정하는 과정이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어려웠다. 선택에 따른 장점과 단점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이상적인 변화 체계를 찾아가지만, 역대 수많은 철학자가 대명제의 종속 변수 하나 가지고도 옳음의 증명을 위해 평생을 바친 것을 생각하면 얄팍하기 그지없는 고민의 연속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알던 현대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민국실록이 꾸준히 전해져 식자들의 정신의 한 부분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민국실록을 찾고자 했고, 그것이 경주에 없는 것을 확인한 이상 수호지에 등장하는 호걸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송나라, 아니 중원 전체를 샅샅이 뒤질 생각도 했다.
조선의 정조는 ‘실록은 만 년 이후를 기다리는 책이다.’라고 국조보감 서문에서 언급했다. 국가멸이(國家滅而) 사불가멸(史不可滅)이란 말이 있다. 나라는 망해도 역사는 없앨 수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 없애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나라고 생각했다.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하늘이 나를 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 하나의 본을 만들기 위해 발해의 부활과 금, 서하, 송, 왜 등등을 아울러 적정한 규모의 여러 국가가 지역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도 생각했다.
본래 전쟁이란 한쪽의 균형이 깨어졌을 때 일어난다. 현대에서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심해지는 것은 동북아의 축이 중국의 급격한 발전으로 상당히 기울었기 때문이다. 위기의식은 비상식적인 판단을 가져온다.
여러 생각 끝에 이렇게 딱 두 가지의 목표를 정했다. 그러나 일말의 고민도 없지 않았었다.
-그냥 고려가 동북아시아를 모두 점령하여 예전 민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발전된 정치 체제를 심어 놓자. 진보냐 퇴보냐는 후손들에게 맡기겠다.
대체역사물을 한창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비참한 역사를 바로잡고 영광의 역사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 대다수였는데 그것은 곧 한민족이 서구 열강이 했던 과거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예전 군대에서 장교가 심심풀이로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북한과 긴장 상태가 일어날 때마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휴전선에 방문하는 국회의원들 보면 공통점이 뭔지 알아? 다 면제라는 거야.
씁쓸함에 웃었던 기억이 선했다.
“뭘 말하고 싶은데 이리 뜸을 들이는 거야?”
이소의 재촉에 딴생각에 팔려 있었던 내 정신을 현실로 돌렸다.
“고려가 요나라를 공격해서 점령했다고 치자. 고려는 대외적으로 제국이 되었겠지. 그런데 세월이 흘러 거란 귀족들이 고려 귀족을 밀어내고 고려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자 자신들의 말과 문자, 문화를 고집하기 시작했지. 그렇다면 고려는 고려라고 할 수 있을까?”
이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소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일 수 있었지만 내게는 참 중요한 문제였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지금 세상에서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소동파라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
이소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훨씬 어린 이소였지만 이럴 때만큼은 연상의 여인인 양 어른스럽게 여겨졌다.
“당이 율령제를 도입한 것은 그것이 민에서 완성된 제도였기 때문이지.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호적에 오른 백성’만이 토지를 할당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세금, 부역, 병역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가 됐어. 초기에는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이 국가에 내는 양보다 많아서 성공적이었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당의 제도를 본떴던 것이고, 그렇게 개선된 제도를 당이 받아들였다. 실제 역사보다 더 나은 제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당은 망했어. 어느 순간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보다 국가에 내는 양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지. 그래서 사람들은 호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으로 숨기 시작했어. 일부는 귀족의 노비로 들어가기도 했지. 그렇다면 제도가 문제였던 걸까?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이 문제였던 걸까?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되고 율령제는 여전히 유용한 제도였어. 송이 건국하면서도 당의 제도를 상당 부분 수용했지. 망한 나라의 제도를 왜 받아들였을까? 나는 오라버니의 질문도 마찬가지라고 봐.”
이소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새롭게 떠오른 권력이 필요에 따라 전복(顚覆)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따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 그런데 만약 내게 그런 일이 닥쳐온다면 나는 저항하겠어. 왜? 내게는 그들의 문화와 말과 글자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그러나 나라에 불만을 품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차라리 기존의 권력자들이 자신들과 같이 비참한 꼴이 된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을걸?”
나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체제 전복에 대한 비판적 이론들이 국수주의, 또는 민족주의와 결합 된 사례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환경에서 뭉쳐도 어려울 판에 흩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렸었기 때문이다.
이미 역사는 일국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도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권력자들은 체제 옹호에 대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 꼬리표에 백성, 또는 국민의 안정이 항상 따라붙는다.
그런 시각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만능주의라고 불리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흘러가는 데로 맡겨두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다 힘있는 권력자를 대변한다는 데 있다. 단지 그 권력의 주체와 성격이 다를 뿐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그랬지. 기존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권력자들은 위기라 부른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자유 의지가 최대가 될 시기이며,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 세계의 미래를 구조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민국을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변혁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욱 활발해지고 적극적으로 변모한다. 그 자유의지를 어떤 방향으로 모으느냐에 따라 미래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20년간의 평화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애초에 내 전제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처음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목표를 설정했을 때, 위대한 민족사를 건설하더라도 언젠가 남의 것이 되고 우리의 것을 잃어버린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우리 역사를 못난 역사,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역사라고 계속 평가절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