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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00화 (100/257)

00100  (13)해몽(解蒙)  =========================================================================

그때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며 김한충이 일어섰다. 노안에는 분기가 가득했다.

“지금 고려를 능멸하자는 것인가! 장군 하나를 얻자고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에 공분을 금치 못하겠다! 이런 조잡한 음모를 꾸민 것에 대해 아무리 황족이라 하나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동계의 수장인 병마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야율대석의 태도가 김한충을 몹시 화나게 했던 모양이다. 그가 벌떡 일어서자 바야르와 칼둔이 경계했다. 야율대석은 그들을 밀치며 일어섰다.

“병마사는 본인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야율대석이 죽는다는 것은 곧 요와 고려의 전쟁을 의미한다. 김한충은 정말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야율대석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 어디 해보자. 말로만 상국이라면서 해준 것이 무엇이더냐! 고려가 참았던 것은 백성이 입을 괴로움과 고단함 때문이었지 너희의 강함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시급하고 중한 일도 국가 간에는 논의가 필요한 법이다.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고려 조정이지 요 조정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시급히 나섰던 것은 비판을 감수하면서 고려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썩 꺼져라!”

김한충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야율대석을 다루기 위해 논리적으로 생각했던 발언들이 입안에만 맴돌고 차마 써먹을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는 급히 김한충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꺼져라.’는 말이 나오자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파국까지 왔음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환갑의 노장이 약관에 미치지 못하는 애송이에게 휘둘린 격이니 그 분노는 능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노가 앞선 나머지 요나라의 실질적 위협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야율대석은 김한충의 외침에 입술이 비틀렸다.

“내가 이대로 떠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고려는 완안부를 도와 요나라를 뒤엎으려 한 대역무도의 죄를 지게 되겠지. 그래도 좋다, 이 말인가?”

김한충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역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큰소리를 쳤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담감이 얹어졌다. 그것을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

김한충이 야율대석을 노려보고 있는 사이 야율대석의 말은 이어졌다.

“설사 고려 조정에서 진실을 믿어주는 신료가 있다고 하자. 믿어주는 것과 실제 처리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반대파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설 것이다. 왕은 병들었고, 동궁의 기반은 약하다. 만약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수모는 수모대로 당하고 오욕은 오욕대로 당할 것이다.”

자신감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보니 이곳에 사자로 오기 전에 상당한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원론적인 과정과 결과를 읊긴 했지만, 예측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김한충은 야율대석의 말을 경청하더니 분노를 넘어 외려 싸늘해진 인상이었다.

“폐하보다 요의 눈치를 보는 신하가 어디 한둘이랴. 너희에게 선을 대는 자를 내가 예측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오랜 세월 동계에 있어 야인(野人)에 불과하지만, 가문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이고 태조의 공신이니라.”

뒷방 늙은이처럼 여겨졌고 호인이었지만 김한충의 가문 역시 대단했다. 호족 중심의 국가라 할 수 있는 고려에서 가문의 강함은 그 가문에 속한 개인의 강함과도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이자겸이 탄핵을 받았음에도 가문의 위세를 빌어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위(李瑋)가 올 1월 서북면행영병마사가 되어 임간과 함께 여진을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임간이 패전의 멍에를 썼으나 이는 이위가 여진이 두려워 출전조차 하지 않은 결과니 지켜본 내가 잘 아는 바다. 이위의 사람됨은 존경할만하나 천상 문인이라 사대(事大)만이 고려를 평안케 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평소 요와 가까이 지냈고 접객의 역할도 본인이 나서 도맡았다. 패전과 기망(欺罔)으로 파직한 임간과 그를 동조한 혐의로 같은 죄를 적용받은 황유현, 왕공윤, 조규가 이위에게 붙어 구명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리라 여겼던가!”

동계를 지키며 힘겨워하던 노장의 모습은 없었고, 오히려 노회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의 군부 지휘관은 송나라를 본떠 하나같이 중앙의 관록 있는 문신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야율대석이 급변한 것을 보니 김한충의 지적이 제대로 찌른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보통 우리가 편하게 읽는 역사 요약본을 보면 임간이 1차 여진 정벌의 실패자로 기록되고 그렇게 알고 있지만, 지휘관은 총 셋이었다. 임간이 중군이라면 직문하성 이위가 좌군이고 위위경 김덕진(金德珍)이 우군이 된다.

원래 이 시기는 김한충이 임기가 끝났다며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김덕진이 들어가야 하지만 내가 그것을 틀어 버리는 바람에 김한충이 유임되었고 김덕진은 중앙에 남게 되었다. 내 기대대로 김한충은 나에 대한 공적을 평가절하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보고해주는 바람에 임간을 비롯하여 전쟁을 낙관한 관료 몇몇이 파직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중 부사대장군 송충도 있는데 그가 김한충의 발언에서 빠진 것은 아마도 별무반 결성 이후 송충이 전투 도중에 전사한 것과도 연관이 있지 않나 싶었다. 분위기에 편승해 임간 등을 일시적으로 편들었다가 파직당했지만, 곧 복귀하여 나중에는 윤관과 김한충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다 전사에 이르니 말이다.

나는 지금의 일과는 별개로 위위경 김덕진을 나중에 따로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군사 실무 전반에 두루 익숙한 숨은 인재였다.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나설 초기에 맹활약하다가 끝까지 머무르지 못하고 중앙으로 복귀하였던지라 그가 계속 남았더라면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 적이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김한충의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이위의 이름이 김한충에게서 흘러나온 것이 가장 놀라웠다. 예상치 못했지만 생각하니 그 이름이 나올 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만큼 알려지지 않은 것이 고려 역사다 보니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위의 본관은 수주(樹州)인데 수주는 부평을 가리킨다. 부평 이씨인 셈이다. 부평 이씨 중 초기에 가장 출세한 인물로 이위를 꼽는데 그가 요직을 두루 거쳐 공신 칭호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인종은 이위의 외손녀를 비로 맞기도 했는데 공예태후 임씨가 바로 그녀다.

계양과 부평, 부천을 세력권으로 삼고 있는 수주 이씨는 인접한 인주 이씨와 경쟁의식이 있었는데 현명했던 것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서에 좋은 쪽으로든 싫은 쪽으로든 밥 먹듯이 기록을 남긴 인주 이씨에 비하면 수주 이씨의 기록은 드문드문한데 그러면서도 가문이 성세를 이루었던 것은 시류에 영합을 잘했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당대의 세도가이면서도 인주 이씨와 척을 지지 않았던 김부식과도 비슷한 일면이다.

패전 책임을 지고 파직을 당한 이들이 삼 년 이내에 모두 복직에 성공한 것을 보면 지금의 사건과 유사한 형태의 사건이 일어났을 수도 있음을 방증한다.

“수주 이가, 안동 임가 등이 머리를 조아리니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쯤은 쉽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경주 종친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마.”

“가문의 위세만 생각하고 나라의 안위는 생각지도 않는군. 진정 전쟁이 일어나도 좋단 말인가!”

야율대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김한충은 냉소만 가득 품고 있었다.

“약관에 미치지 못한 애송이가 하는 말을 천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천자에게 십만 금을 보내면 없던 정(情)도 생길 것이다. 너의 말과 십만 금 어떤 것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어디 해보자꾸나!”

처음 김한충이 이성을 잃고 막 나간다고 생각했지만, 하나하나가 자신 있게 계산한 발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아무리 요나라라도 송이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고려를 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야율대석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족이지만 황위 계승권은 없는 많은 야율씨 관료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을 김한충은 꿰뚫고 있었다.

야율대석은 김한충과 나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짤막한 말이 흘러나왔다.

“본국으로 돌아간다.”

나와 김한충이 말릴 새도 없이 총총걸음으로 빠져나갔다. 말없이 뒤를 지켜보고 있는데 야율대석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송이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면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나약한 송이 고려를 도와줄 것으로 생각한다면 꿈도 꾸지 마라. 우리가 먼저 자신들을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저들에게 불가침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원하던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지. 탐관(貪官)에게 재물을 안겨줄 것이고 오리(汚吏)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거절에 대한 원한이 지나친 것일까? 아니면 본래 그런 웅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혼자 생각했다고 보기에는 그 수단이 참으로 악하지만, 실용적이기도 했다. 마치 한비자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 같았다.

‘야율대석은 남면의 한인과 교류가 잦았다고 했다. 어쩌면 그에게 머리를 빌려주고 있는 자들은 송에 불만을 품고 있는 중원인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야율대석이 다시 외쳤다.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준 것은 여진이 중간에 길을 가로막아 우리와 소통하기 어렵다는 핑계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강동 6주가 안정된 이상 그 핑계를 다시 댈 수 있는지 보자. 또한, 동북 9주의 여진이 완안부의 행패를 참지 못하고 요에 도움을 청한 이상 그 땅을 차지할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 이제 동계의 오판까지 겹쳤으니 어디 그 잘난 가문의 힘으로 헤쳐 보아라!”

야율대석이 완전히 사라졌다. 야율대석의 마지막 외침을 들으니 나를 얻는 것은 부수적이고 원래 큰 밑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닌가, 절로 의심이 들었다.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생각한 명분이었고, 고려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기도 했다.

강동 6주를 서희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요나라가 땅을 얻기 위해서 고려를 압박했다기보다 고립된 국제 정세를 타파하여 아군을 얻기 위한 무력시위가 강했다. 그래서 고려의 주장을 들어주는 척하며 원했던 통교(通交)를 통해 고려보다 우선순위인 중원으로 전력을 돌릴 시간을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가 내세운 명분이 언제든 논란이 일만 한 것이었다. 요나라가 왜 자신들과 통교하지 않느냐고 했을 때, 그 이유를 서여진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전하게 성을 쌓고 길을 확보해야만 통교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요나라가 영토로서가 아닌 교역권 또는 자치권을 승낙했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여진의 위협이 없다고 양국이 동의한다면 요나라가 6주의 전부, 또는 일부를 내놓으라고 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치 영국에게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처럼 말이다.

또한, 동북 9주의 일은 야율대석의 구두에 의존해 이미 김한충이 움직인 다음이고 그 결과 요나라의 뜻과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기에 쟁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파직으로 이어지는 것과 요나라가 동북 9주로 진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대응이 나올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것 참, 별무반의 출전 시, 완안부와의 관계를 어찌할까 고민해왔는데 그 대상이 바뀌게 생겼구나. 요나라라…….’

별무반 출진 당시 완안부 기병을 최대로 잡아도 3만인데 요나라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출병시킬 것이 뻔했다. 그럼 우린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까? 별무반 17만도 3년간 짜내고 짜낸 병력이었다.

‘우리가 대비하기 전에 더 빨리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구나.’

만약 내가 각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소소한 분쟁은 있을지언정 내가 아는 역사처럼 흘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일을 후회하는가? 아니었다. 지금의 결과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역사의 조연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내가 주체가 되었다는 신호니까 말이다.

김한충은 내 표정이 심각하다고 여겼는지 어깨를 치며 말했다.

“술을 한잔하지 않겠느냐?”

김한충의 목소리는 아까 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때마침 강증까지 도착하자 술이 비워지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영문을 모르던 강증이 김한충에게 설명을 듣자 술잔을 벌컥벌컥 비우기 시작한 것이다.

“저는 반드시 동계에 남아 거란 놈들을 죄다 수장시킬 것입니다. 경주 김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영강(永康, 옹진) 강가(康家)의 저력은 누구도 부임하기를 꺼리는 동계의 수군 장령(將領)의 보직 따위는 유지 시킬 힘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를 내쳐서 시답지 않은 자들을 동계로 보낸다면 요와 국경을 코앞에 두자는 역적 모리배들입니다.”

여진이라는 완충지대는 요의 간섭을 상당 부분 차단하는 울타리이자 구실이었다. 여진의 폐해가 적지 않았지만, 요의 월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강증은 차라리 여진은 애교에 불과하다며 술을 벌컥 들이켰고, 나 역시 그 생각에 동감이었다.

“요가 사신을 보내기 전에 내가 먼저 상경해야겠다.”

“완안부가 북으로 돌아가고 숙여진과 대치한 이상 이곳에서 큰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습니다. 갈라전의 여진 중 반절은 숙여진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백산부에 의탁하고 있으나 이번 전투로 크게 쇠약해져 혹여 우리가 자신들을 노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관이 해야 할 일이 크게 줄었습니다. 병마사 영감을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강증 그대뿐만이 아니라 척 장군도 함께 간다. 진상을 듣고 요에 사대하자는 무리는 맹세코 모두 솎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동계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정주관문을 활짝 열고 감히 고려를 업신여긴 요의 방자함을 꾸짖어 줄 것이다. 내가 평생 살면서 가문의 위세를 빌지 않고자 했으나 이번만은 그 원칙을 꺾겠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그러나 그것이 기회일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강하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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