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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97화 (97/257)

00097  (13)해몽(解蒙)  =========================================================================

변변한 무기를 챙기지 않아 아까운 병력이 죽어나가는 현실에서 아구다는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아구다는 손가락으로 전면을 가리켰다.

“갈라전의 여진과 흑룡강의 여진은 다르다.”

뿌리가 오래전에 갈라져 문화나 말이 다른 예도 있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했더니 아구다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태어나서 말을 타기 시작했다면 저들은 나무를 타기 시작했지.”

나는 무릎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떤 문헌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진의 시작은 마치 삼국지에 등장하는 산월처럼 산악에 거주하는 형태였다고 말이다. 갈라전이 백두산을 비롯한 함경도의 산지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거주하던 여진은 만주 쪽의 여진과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저들은 실수했다. 아무리 지금이 적기라 하나 이곳은 평야다.”

아구다가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거침없이 적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쓰러진 적들의 병장기는 뒤따라오는 맹안의 몫이었다. 하나둘 점차 냉병기를 손에 쥔 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소한 비기거나 도망은 칠 수 있을 정도로 위험상황은 벗어났다고 판단했을 때, 본진으로 출발했던 사자가 돌아와 창백한 안색으로 우야소에게 외쳤다.

“본진도 교전 중입니다!”

“뭣이? 잔당들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본진에는 구천이나 머무르고 있지 않으냐!”

우야소는 믿기지 않는지 벌컥 화를 냈다. 전령이 재차 외쳤다.

“올량합(兀良哈)과 알타리(斡朶里)입니다.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우야소는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요나라의 통제를 받는 숙여진(熟女眞)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요나라의 암묵적 동의 내지는 교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갈라전의 여진이 힘을 얻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았다. 참으로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이때의 상황을 따로 적은 것이 없다. 일만 이상이 겨루는 전쟁은 작은 것이 아니다. 내가 개입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그러다 문득 생각난 한 구절이 유독 걸렸다.

-동여진이 스스로 장채(場寨)를 헐고, 공형지조 등 68명이 관문에 와서 화친을 청하였다.

동여진이란 표현이 조금 애매하지만, 갈라전의 여진이 서여진이 많았고, 동여진은 완안부를 가리키거나 그들과 관련된 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시기상 맞다. 내가 개경에 가 있던 시기와 맞물리기에 나는 요시치카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요시치카는 대번에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동여진이 화친을 청하는 사건은 유신이 죽기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 이야기는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이유로든 뒤로 늦춰졌다는 이야기다. 만약 아구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요나라가 알았다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율사부!”

문득 각희를 치르던 자리에서 만난 태주 관내 관찰사 야율사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주는 요의 오경(五京) 중 하나인 상경 임황부에 소속된 지역으로 숙여진을 관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함께 왔던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 역시 혐의 선상이었다. 안원군은 옛 발해의 땅이다. 지금은 완안부가 그 지역에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니 얼마든지 구실을 만들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망신살을 뻗쳤다고 생각하여 겸사겸사 처리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 행로는 얼마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조정에는 요나라의 입김에 좌지우지되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급히 우야소에게 물었다.

“그대의 수하 중 공형지조가 있는가?”

“어찌 그를 아는가? 그는 속부(束部)의 추장이오.”

속부라면 완안부를 따르는 부족이란 것이다. 올 1월 내가 처음으로 우야소를 대면하고 기억을 되찾았을 때,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이 남하하자 두려움을 느낀 동여진(東女眞) 남녀 1,753명이 귀부를 청했다. 오아속은 남하의 변으로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가 자신을 적대시했다고 밝혔다. 속부(束部) 공형지조(公兄之助)를 참가시켜 공격하게 했는데 그가 이끄는 기병(騎兵)이 정주(定州, 함경남도 정평군)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오해로 시작된 고려와 완안부의 전쟁이었지만 결과는 완안부의 완승이었다. 승자 측에 있던 공형지조가 채 반년이 지나기 전에 고려에 화친을 요청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쩌면 나는 지금의 상황이 그때도 벌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동계의 병력이 설욕을 위해 움직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 또는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주성 안으로 피신한 것, 두 가지의 경우가 떠올랐다.

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우야소 역시 친위병들을 이끌고 아구다를 돕기 위해 출진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인원은 다해야 일천에 불과했다. 그중 삼백 정도는 이미 죽었고 대략 칠백 정도가 끈덕지게 저항하고 있었다. 적들의 수는 못해도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구천의 지원병이 못 온다는 것은 최소한 적도 그에 상응한다는 뜻이다. 아구다가 분전하고 있었지만 이제 고작 일백 정도만이 무장했을 뿐이다. 그 사이에도 죽어가는 자가 속출했다. 병력이 오백 이하로 줄어드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 상황, 만약 가후가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 처리했을까? 그러자 문득 가후의 환영이 나타나 ‘이런 자잘한 상황까지 저에게 맡기려 하십니까?’라며 웃고 있는 듯했다.

“그래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수없이 겪었다.”

여기서 아구다가 죽어봐야 요의 힘만 강해지는 결과다. 내가 원 역사와 같이 아구다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황제에 오르고 금사(金史)에 적길 고려에서 건너왔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 금의 사신이 밝힌 것처럼 승려 출신이 선조라 그런가 고려 못지않은 불교 정책을 펼쳤다.

동질성이 있다는 것은 언제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현대에 들어와 동북공정을 시도한 것도 그런 동질성을 끊어내기 위한 맥락일 것이다. 그들이 우리나라 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구려를 중국의 고대 종족인 고이족(高夷族)이라는 부족이 세운 것으로 둔갑했을 때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올랐던가? 한사군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의 건국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태연히 읊을 때면 화가 나는 것을 떠나 어쩌면 이리 뻔뻔할까 하는 허탈한 심정이 있었다.

그런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전생에서 중화를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사고(史庫)를 조성하고 많은 기록을 남겨 훗날의 본으로 삼고자 했으나 결국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 현실이다.

현대의 우리가 처한 현실과 똑같지 않은가? 우리 기록의 미미함으로 말미암아 중국사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증할 수 없으면서도 사료를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 현실 말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보여준 역사 인식을 보면 중국의 역사 인식 역시 저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 왜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런 면에서 금나라는 기록으로나 행동으로나 고려에게 솔직했다. 이민족이 세운 요나라와 원나라에 비하면 양반에 가깝다는 것이 내 견해였다. 고려와 화친하고 일찌감치 중원으로 눈을 돌려버린 덕분에 장강 이남으로 밀려난 송에게는 불운이었지만 말이다.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일순간의 환상이었지만 가후가 자잘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고 있는 것이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요시치카 나를 따라라!”

흑우의 고삐를 힘껏 잡아당겨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르게 목숨을 건 실전이었지만 요시치카의 얼굴은 환했다. 죽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과 그냥 죽이는 것의 난이도는 어떤 것이 쉬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달려가면서 마주치는 아구다의 맹안마다 한 가지를 물었다.

“백산부의 추장이 누구냐?”

누군가 손가락으로 멀찍이 지휘하고 있는 한 중년인을 가리켰다. 여러 부족 연합이라 지휘관들이 여럿일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그중 백산부를 제일 먼저 목표로 잡은 것은 역사적 사실 때문이었다.

북사(北史)에 이르길 아구다가 언급했던 부족 중 불날부 동쪽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은 돌로 된 화살촉을 쓰는데 옛 숙신(肅愼)의 풍습이라고 했다. 왜 굳이 그렇게 적었느냐 하면 선비, 흉노 등과 달리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완전히 병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틀 안에서 경상도, 전라도 하듯이 숙신은 고구려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두산 동부에서 활동하던 백산부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이런 경우는 여진이 아니라 그냥 옛 고구려 유민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만큼 지금의 시기는 누가 여진인지 누가 고구려인인지, 발해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인들이 선택한 정체성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병력이 많았지만, 워낙 여러 부족이 한데 뭉친 탓에 그저 적이 보이면 공격하는 드잡이질 형태였기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백산부의 추장에게 인접할 수 있었다. 처음엔 겨우 둘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추장은 어느새 코앞까지 짓쳐들어오자 팔을 휘저으며 황급히 나를 막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삼십 명 정도가 나와 요시치카를 덮쳤지만, 말을 탄 이가 없었다. 오직 추장 한 명뿐이었다. 금세 정리가 될 것 같자 그는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는데 그것 역시 예측하고 있었기에 요시치카에게 뒤를 맡기고 도움닫기를 시작하자 숨 한번 몰아쉴 사이에 그의 등을 칼등으로 후려쳐 멈춰 세웠다.

“내가 이 녀석과 대화를 나눌 동안 막아라.”

적 심처(深處) 한복판이나 다름없었다. 어려운 명령이었음에도 요시치카는 오히려 신이 난듯했다. 나는 백산부의 추장을 말에서 끌어내렸고, 나 역시 그와의 대화를 위해 착지했다.

그는 내 행색을 보자마자 침음이 나왔다.

“거짓이었구나.”

“거짓이라니.”

“고려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 하더니 오히려 완안부를 도울 줄이야.”

고려를 움직일만한 세력은 요나라밖에 없다. 그것도 병력을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동계의 수장, 김한충을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 정주성에는 요의 사신이 와 있을까? 내가 속내를 밝힌 이상 내가 도착할 때까지는 김한충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되면 내가 위험해졌다고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그때였다. 동쪽에서 화광이 충천하기 시작했다.

백산부의 추장과 동시에 그것을 지켜보았는데 그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비통해했다.

“고려가 수군을 동원했구나. 어찌하여 오래도록 대방(고려)에게 사은(謝恩)한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고려의 적은 완안부가 아닌가!”

올해 초만 해도 완안부에게 비참하게 깨졌던 만큼 고려가 완안부에게 이를 갈 것이란 추측은 요에서 할 법했다. 백산부를 비롯한 갈라전의 여진 역시 그런 사실과 오래도록 고려에 충성한 사실을 떠올리며 고려가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요나라의 사신이었더라도 당연히 그런 점들을 앞세워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 정세라는 것이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완안부를 공격하던 부족들은 동쪽의 화광을 보며 혼란에 빠졌다. 숙여진이 남하한 이상 그들과 합류하면 되겠지만 화광은 곧, 여진 해적의 천적, 고려 수군의 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절대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전황 자체는 아직 이들에게 유리했다. 아구다가 발버둥을 치며 냉병기와 전술 진형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사이 칠 할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지금까지 겪은 최대의 군사적 실패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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