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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96화 (96/257)

00096  (13)해몽(解蒙)  =========================================================================

에르킨(Erkin)

위구르 제국의 태동은 부족 연합이었다. 부족장들은 에르킨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그것을 인정해주겠다는 것은 나를 자신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대등한 입장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흑우에 올라탔다.

“저 역시 조건을 걸지요.”

아구다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내가 동맹을 맺는 것으로 감지덕지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건 오산이다. 나를 시험한다면 나 역시 그를 시험할 수 있다. 그것이 대등한 관계가 아니겠는가?

“14명을 되돌려 줄 것을 원합니다.”

“14명? 누구를 말이냐? 고려 노예?”

아구다는 북에서 내려온지라 14명의 의미를 잘 모를 것이다. 나는 우야소를 바라보았다. 우야소는 나와 아구다의 눈길을 받자 두 손을 들며 껄껄 웃었다.

“과연……. 그것으로 고려의 신임을 얻겠다는 것이오? 일전 귀 선물보다 더 값진 선물이 되겠군. 그러나 14명 모두 보낼 수는 없소. 개중에는 꽤 원한이 깊은 자들도 있어 그 죗값을 치러야 하오.”

우야소의 설명이 더 이어졌다. 그제야 아구다는 이해했다.

14명이란 1차 여진 정벌, 즉 내가 각성했던 그 전쟁에서 고려가 형편없이 밀리자 화의를 청하기 위해 여진의 제의를 윤관이 들어주면서 생긴 일종의 인질이었다.

우야소는 고려를 대신해 변방을 담당하던 망명 여진 관속(官屬) 중 자신들을 적대했던 일부 대상자와 14명의 단련사(團練使)를 인질로 받았다. 단련사는 변방을 담당하는 진지의 수장으로 그들을 빼앗겼다는 것은 가뜩이나 무관이 모자란 고려로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변방을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단련사의 임무인 만큼 일부 부족과는 증오에 가까운 적대 관계도 존재했다.

“아우의 맹안은 우리 부족 중 제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포위를 뚫는다면 장군의 제안은 고려해볼 만하오. 14명을 맞춰 주겠소. 고려로 망명한 여진 관속을 포함해서 말이오.”

아마 일부는 인질로 잡힌 즉시 목숨을 잃었던 것 같다. 망명 여진 관속 역시 고려의 녹을 먹고 있으니 그들을 합쳐 14명을 구출한다면 고려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공적인 셈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먼저 떠나라.”

아구다가 마찬가지로 동의를 표하자 나는 말에 탄 요시치카에게 말했다. 요시치카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너의 기마 솜씨가 미덥지 못하다. 내가 너를 보호해줄 수 없다.”

직설적인 화법에 요시치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사는 주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주군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어떤 수하가 실력이 없다고 하여 먼저 떠나겠습니까?”

내가 개경으로 간 사이 열심히 말을 탄 것 같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지켜본 요시치카의 기마술은 딱 보통 수준이었다. 고려군을 상대한다면 그럭저럭 같이 싸울 수 있겠지만, 여진을 상대로는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한 가지가 틀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들으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너 역시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

아구다와 맹안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

“호기인지 자신감인지 곧 확인할 수 있겠지.”

아구다의 중얼거림이 맹안의 마음을 대변했다.

“주군이 강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속하를 물리치고 직접 싸우신다면 속하가 존재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럼 앞장서라.”

“네?”

“싸우게 해주겠다. 네가 선봉이다.”

내가 쉽게 생각을 바꾸자 요시치카는 환호성을 지를뻔하다가 이내 문제를 깨달았는지 허우적대며 당황스러워했다.

추격을 당하는데 앞에 선다는 것은 후방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추격군과 싸우는 것은 후미다.

“착각하지 마라.”

나 혼자 몸을 피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요시치카의 치기를 들어준 것은 어쩌면 이번 기회에 나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선두가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보다 더 빠르게 달리거나 최소한 같은 속도로 달렸을 때다. 그런데 네가 타고 온 말의 품종도 그렇고, 너의 실력을 봐서도 곧 따라잡힐 것이다. 우리는 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한다. 일천 명 중 일부만 상대해도 될 것을 전부와 싸워야 하는 경우란 말이다.”

요시치카는 이해를 하면서도 얼굴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일본에서 검의 귀신이라 불렸던 일대검호답게 어떤 불리한 전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투지가 마음에 들어 영입을 결심했던 것이니 어떤 의미로는 지금의 상황이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데리고 온 나의 업보일 수도 있었다.

나와 요시치카에게 각 두 자루씩의 촉 없는 창이 전달되었다. 맹안 역시 촉 없는 창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추격전에 쓰일 유일한 무기는 오로지 이것뿐이었던 모양이다. 일부는 활을 매고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아구다는 최소한의 호신 수단이라고 밝혔다. 혹시 고려군이 오판하여 급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요시치카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곧 진영을 벗어나자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정면은 무조건 너의 몫이다. 정주성이 보일 때까지 앞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쓰러트려라!”

요시치카가 정면을 뚫고 내가 나머지 삼면을 막는다. 참 간단한 계획이었다. 요시치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들고 있던 창을 반으로 갈랐다.

부러지는 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요시치카는 뒤를 돌아보았고 두 자루의 단봉을 한 손에 부여잡은 모습을 보자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왼손으로 고삐를 더욱 조이며 외쳤다.

“고삐를 놓고 계속 달릴 자신이 있다면 너 역시 그러해도 좋다.”

조선 세종 때, 함길도 절제사가 야인들의 동태를 보고하며 그들을 막는 방법을 이야기하길 다섯 명의 병사를 붙여 한 명이 급하면 다른 네 사람이 구원하고, 두 사람이 급하면 세 사람이 구원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들이 장창을 쓴다면 우리는 수적 우세를 앞세워 한 사람은 방패를 써서 막고 다른 사람들은 거리를 좁혀 단창으로 치면 적들이 대응하기 어렵다고 고했다.

지금도 여진 기병 1명을 상대로 고려 보졸 10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최소한 5명은 필요하다는 것이니 그 강함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만약 그것을 내가 응용한다면? 여럿이 장창을 내지르면 돌파하는 처지에서는 막기 어렵지만 내지르는 쪽에서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남은 한 자루의 창은 안장 옆구리에 뒤쪽으로 길게 꼬리처럼 고정했다. 정면은 요시치카가 책임진다고 했으니 장창을 뒤로 길게 고정하고 움직이면 그 간격만큼 말들이 뒤에서 좁혀오기 어렵다. 말들은 예민해서 훈련하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는 꺼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약간의 멈춤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다.

지축을 울리며 일천 마리의 인마가 황야를 뒤덮었다.

위급한 와중이지만 인적 드문 황폐한 평야를 보며 나는 뜬금없이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일대가 산지라 논이 1할밖에 되지 않는데 함흥과 원산 사이의 동해안이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기 알맞은 땅이라고 설명하였다. 각각 함흥평야, 영흥평야라고 불리는 땅인데 고려 변방에서 보기 드문 기름진 땅이 여진과의 대치로 황폐해진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동북 9성 정책도 아무리 고토 수복의 명분이라지만 쓸모없는 땅을 얻을 작정이라면 시작할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동옥저(東沃沮)가 자리했던 곳, 많을 때는 5천여 호(戶)까지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 땅에 지금 존재하는 것은 나와 요치시카, 뒤쫓는 일천의 인마와 그들이 뿜어내는 황진 뿐이었다.

격돌이 시작되자 대지의 열기는 땀으로 승화했다. 말과 사람의 비명이 섞여 아우성이었고,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귀를 울렸다. 잠시 한눈을 팔며 멀리 후방을 보니 아구다와 우야소가 호위병과 함께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순조로웠다. 요시치카는 아예 일천 명 모두랑 붙어볼 생각인지 맹안이 자신을 앞지르자마자 아예 달리기를 포기하고 말을 붙박이처럼 세워놓은 채 싸우기 시작했다. 장점인 검술을 살리기 위해서였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먹혔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체력의 소진을 피하기 어려웠다. 대략 일백 정도를 상대하니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나는 나름 순조로웠다. 일정 공간을 점유하며 단창으로 양쪽을 모두 상대하자 버티기는 수월했는데 선두의 요시치카가 점점 지치기 시작하니 요시치카의 방어를 뚫고 나에게 접근하는 자가 나타나면서 손발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보름달이 만개하여 밤이 낮과 같았다. 그 시간까지 겨뤄 3할의 사상자가 생기면 궤멸이라 칭할 만했지만, 오늘의 특수한 대결은 3할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어느새 요시치카는 내 곁까지 밀려왔다. 나는 살짝 웃었다. 다수가 계속 공격하는 와중에 일백 명을 이긴 것만으로도 그의 귀신같은 검술이 통용됨을 확인했다. 그의 고집마저 한풀 꺾였으니 오늘과 같은 무모함은 자제될 것이다.

“나를 뒤쫓아라!”

정체된 소강상태였다가 내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가자 황급히 창으로 벽을 세우려고 했지만, 양손에 든 단창으로 일일이 쳐내며 길을 만들었다.

“선봉이란 막고 있다면 뚫는 것이다.”

황급히 뒤쫓고 있던 요시치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은 짐작이 갔다. 수십 차례의 합이 오고 갔고 앞은 점점 환해져만 갔다.

그때였다.

내 왼편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고 점차 가까워졌다. 나를 공격하던 완안부의 맹안이 고개를 돌렸고, 후방에서 뒤쫓던 아구다와 우야소 역시 그 시선이 함성이 들리는 동쪽을 향했다.

만약 같은 완안부라면 그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함성 중에 휘파람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아챈 맹안의 표정이 한결같이 핼쑥해졌다. 그들은 우리를 버려두고 일제히 아구다 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쓰러져서 미처 말에 올라타지 못한 맹안에게 급히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지금 저들은 누구냐!”

가까워지는 그들의 복색을 보니 여진의 일파로 보였다. 대다수는 경보병의 형태였고, 일부만이 기병이었다. 동쪽은 동해가 바로 인접이다. 저렇게 많은 무리가 북쪽에 자리 잡은 완안부의 감시를 피해 우회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여진 해적이로구나.”

여진 해적이라면 기병이 적고 경보병이 많다는 것이 설명된다. 그런데 대체 왜 그들이 완안부를 기습하는가?

나는 저번의 일을 떠올렸다. 마포란 자가 고려에 충성을 맹세한 서여진의 진상(進上) 무리에 끼어 나에게 접근했던 것을 말이다. 완안부가 그런 식으로 밀정을 관리한다면 완안부 내부에 다른 부족의 밀정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저놈들은 백산부(白山部)입니다! 백산부와 우리는 오랜 숙적, 오늘의 일을 알고 기습을 한 것입니다!”

맹안이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서성이던 말을 타고 아구다에게 달려갔다. 요시치카는 돌변한 상황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산부라.”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백두산과 두만강 인근에 살면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말갈의 이름이 백산부라 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백산부는 뿔뿔이 흩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대에 흩어져 명맥을 유지해왔던 모양이다.

완안부는 흑룡강 일대가 세력권이었다. 그런 그들이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두만강 이남의 여진에게도 손을 뻗쳤다. 그들 중 일부는 고려에 신속했고, 일부는 해적이 되었다.

우야소가 고려의 국경이라 할 수 있는 정주관 인근까지 다다른 것도 끝까지 반항하던 여진을 복속시키거나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때마침 고려가 우야소의 행동을 국경을 넘는 침탈 행위로 보고 공격을 했다.

완안부에 반기를 들었던 여진 부족들로서는 구사일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는 고려에 진상품을 보내며 귀속을 요청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백산부라는 부족이 완안부의 숙적이고 그들이 흩어지면서 동해에 여진 해적이 탄생했다면 여진 해적은 완안부에게 반기를 든 여진 부족을 흡수하고 세를 늘릴 좋은 기회다. 더구나 완안부의 핵심인 아구다와 우야소가 모두 한 자리에 있다.

머리가 있는 자라면 우두머리를 전부 쓰러트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 나와 겨루었을 때 나왔던 비명과는 다르게 피가 맺혀 있었다. 완안부의 맹안 중 활을 소지한 자들이 반격에 나섰지만, 촉 없는 창밖에 갖추지 못한 자들은 몸으로 칼을 막으며 하나의 병장기라도 회수하여 동료에게 넘겨주고자 애를 썼다.

“갈라전(曷懶甸)은 대대로 우리의 땅이었다! 우리의 땅을 되찾자!”

계속해서 적들이 밀려들었다. 그들 중 추장으로 보이는 한 명이 칼을 높이 들고 주변을 독려했다.

갈라전.

나는 그 단어를 이렇게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갈라전은 두만강 이남에 거주하는 여진들이 자신들이 사는 땅이라며 붙인 이름이었다. 고려는 갈라전을 기미주(羈?州)라고 불렀는데 그 땅에 사는 여진들이 고려와 밀접한 관계였고, 영향을 받다보니, 일종의 귀속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명 여진 관속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완안부의 아구다가 요나라로부터 생여진 절도사로 임명되었던 것과 같다.

나는 흑우를 몰아 아구다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나에게 덤벼드는 자들도 있었으나 가볍게 차주고 칼 두 자루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지친 요시치카에게 한 자루 던져주자 표정부터 달라졌다.

내가 아구다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이미 나머지 기병이 머무는 진영으로 사자를 급파한 뒤였다. 위기의 상황이었고, 아끼는 맹안이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속말부(粟末部), 백산부(白山部), 골돌부(??部), 안거골부(安居骨部), 불날부(拂涅部)…….”

설마 그 모든 부족이 연합했단 뜻인가? 완안부를 상대하기 위해? 아구다는 웃고 있었다.

“나에게 패배한 부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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