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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93화 (93/257)

00093  (12) 전극(電戟)  =========================================================================

“고려의 양산박인가?”

이일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역사를 보면 기술의 발전은 항상 권력자의 이목보다 빨랐다. 방관하고 있을 때 기술은 발전했고, 그것을 악용하려고 했을 때, 역효과가 흘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반발은 대개 불법적이다. 권력자는 억누르려고 했지, 그 반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땜질 처방만 하는 사이 풍선 효과처럼 반정부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양산박의 비참한 최후처럼 불법단체의 말로는 정해져 있다. 명분상 이미 범죄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이상향을 쫓는다고 해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일국의 거대한 힘을 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인가?

“정사보다 민담(民譚)으로 회자(膾炙)되고 싶습니다. 억울한 자를 돕고 부패한 자를 처단하는 일이 그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주고 그 이면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란 애초에 가진 자의 욕심이 끼어 있는 이상 어렵다고 본다면 저는 그 질문을 오래도록 남기는 방법을 선택하겠습니다.”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통쾌한 마음과 함께 한 번쯤은 그런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홍길동을 제외하고는 비록 그 끝이 불우했고, 불법적인 일도 자행되었지만, 그 행간에 숨겨진 뜻은 시대의 부조리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그래서 현대에서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즐겨 읽히는 것이 아닌가?

할 말은 다 했다. 나는 더는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자네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지상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수부(水夫)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주송에게 소리쳤다.

“고려 전선입니다. 중선 열 척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추격군을 보낸 것일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뱃놀이 잘 즐겼습니다. 그리고 이준 자네.”

나는 이준에게 다가가 어깨를 쳤다.

“나는 머지않은 시일에 송으로 향할 것이다. 그때까지 양산박에 대해 잘 파악해두도록 해라.”

“양산박의 도적들을 거두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양산박으로 수호지의 인물들이 모이기 전이다. 앞으로 10년은 더 있어야 하지만 이소를 만나기 위해 송을 종횡하면서 그들 중 일부와 이미 만난 나다. 역사는 이미 바뀌고 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면에서 염상의 정보력은 내게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떠나 이준 자체의 매력도 상당했지만 말이다.

나는 이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일민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겪게 되는군.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되는 사람은 보았어도 스스로 도적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 도적도 어디 보통 도적인가. 천하를 움켜쥐고자 하는 도적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르지.”

그는 술잔을 깨끗이 비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자네의 말을 믿겠네. 일찍이 민 태조는 선업(善業)으로 민생을 구제하려 했으나 그 끝은 한, 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선업의 혜택을 받은 150년간의 수혜자들에게는 그보다 좋은 시절이 없었고, 태조께서 남기신 유훈도 평화와 안정, 번영의 기간을 최대한 늘려놓는 것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셨었다. 그 뜻은 겸양이 아니라 후대의 제왕들에게 이루기 어려운 숙제를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었지. 후대의 왕조들은 그런 유훈 자체가 짐이었다. 권력자들에게 있어 무지몽매한 백성은 항상 미래를 봐야만 했다.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할 수 있는 자들이 많을수록 자신들은 점점 풍족해졌고, 다스리는 일 또한 편했지. 종교에 심취하도록 조장하여 조정이 응당 책임져야 할 삶의 평온함까지 회피했다. 고금을 통해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라는 경구를 남긴 성현은 없다. 공자도 맹자도 장자도 노자도 그 어떤 이도 없었지.”

부모가 되면 항상 듣는 말이 있었다.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고. 과연 그 말은 옳은 말일까? 그렇다면 그 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는 자신의 아이를 희생해야 맞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희생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 그럼 언제쯤에야 부모는 부모의 삶을 살 수 있는가?

회사에 다니면 흔히 듣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족 같은 회사, 친구 같은 회사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것을 뒤집어 해석한다. 회사란 공적이고 계약에 얽힌 냉정한 관계다. 계약 관계라는 것은 미래 가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현실을 보는 것이다. 올바른 회사는 현재의 가치를 충실히 반영한다. 임원의 입에서 ‘회사가 커지면 그 혜택을 나눠주겠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은 그전에 나를 자르겠다는 신호다. 정말 가족 같다면 때론 잘못도 눈감아주고 격려도 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성장을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만 항상 어려운 상황에서만 가족을 논한다. 희생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108 호걸들이 왜 양산박에 모였던가? 그들이 대의를 품고 있어서? 아니다. 권력자가 희생만을 강요하고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하면 제대로 된 대가를 준다.’ 이 너무나 쉬우면서도 간단한 법칙을 지키지 못했기에 송도 고려도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최소한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나눔의 전통이 있었다. 그것이 부족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기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자네의 생각은 실로 위험하여 역모죄로 자네를 고변(告變)한다면 조정이 발칵 뒤집힐걸세. 모르긴 몰라도 이자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한안인 같은 중신들이 자네를 이자겸 일파와 한데 엮어 사화(士禍)를 조장할지도 모르지.”

정지상은 무거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내게 그리 무겁게 들리지는 않았다. 만약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정지상은 이런 말을 심중에만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정지상 등을 비롯한 서경파는 이제야 슬슬 기지개를 켜는 형국이었다. 묘청이 등장할 때쯤에야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욕심을 내비치게 된다.

“내가 여기서 얻은 화두를 천천히 생각해보겠네. 정심(淨心) 대사에게도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고.”

“정심 대사?”

나는 질문을 던졌다가 내심 깜짝 놀랐다. 정심이면 묘청의 또 다른 법명이다. 묘청은 태어난 일시와 실제 가계(家系)가 어떠한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서경 인근 사찰에서 정심이란 이름으로 명성을 떨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불교, 도교의 구절을 현 상황에 맞춰 뭔가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던지 아니면 낭중지추(囊中之錐) 둘 중 하나가 그의 정체일 것이다.

“척 장군 계시오이까!”

열 척의 중선이 가까이 다가오자 가장 먼저 들려오는 것이 나를 찾는 외침이었다. 딱히 내 이름만 먼저 부를 턱이 없을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나와 관련하여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소리치자 군관 한 명이 나는 듯이 뛰어넘어 내게 달려왔다.

“장군을 한참 찾았습니다. 벽란도에 계시다기에 급히 달려왔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셔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고 낭장이라고 밝힌 그는 전신이 땀으로 흥건했다. 배가 출항하는 것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곳까지 쫓아왔던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아구다가 정주성 인근에 일만의 여진 기병을 거느리고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아구다가?”

지금쯤 흑룡강 일대에서 열심히 여진 복속에 열을 올리고 있을 시기다. 요나라는 그에게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반란 세력의 토벌을 맡겼지만, 오히려 그 반란 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겼다는 우스개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 그가 나를 만나러 일만의 기병을 이끌고 왔다니? 그의 형인 우야소가 남쪽 방면을 맡은 이상 그가 일부러 내려올 일은 없었다. 그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동계에서 장계가 오자 추밀원사께서는 급히 장군에게 복귀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곳의 일이 일단락된 후라 다행이었다. 그때 이일민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으로 공교롭군. 만약 지금까지 자네와 드잡이질을 벌였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등골이 오싹하네. 과연 사람의 운수는 한 치 앞을 짐작할 수 없구먼. 여진의 대군이 국경에 다다른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니 어서 가보게. 다시 만날 때까지 준이를 제대로 담금질해놓도록 하지.”

나와 정지상, 윤언이는 이일민 일행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중선에 올라탔다. 배가 벽란도에 닿을 때까지 나는 아구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추측해보았다.

실록에도 전혀 없던 사건인 것을 보면 점차 역사가 바뀌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내가 우야소와 손을 잡은 일이 아구다를 고려로 불러들이게 되었을까? 아구다와 한 차례 대면한 적이 있었다고 우야소에게도 말했던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개경에 제대로 들를 사이도 없이 나는 말을 달려 정주성으로 향했다. 정지상과 윤언이와는 개경 인근에서 헤어졌는데 유신의 묘소를 찾아가 오늘의 일을 고하는 것은 그들이 대신해주기로 하여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정주성까지 쉬지 않고 달려 인근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내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나와 인연이 있는 많은 사람이 정주성문 앞에 모여 있었다.

“척 장군! 이제야 왔구나!”

나를 보자마자 안아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한충이었다. 그는 나보다 앞서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을 통해 개경에서 있었던 통쾌한 일들을 모두 전해 받았던지라 무척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구다와 일만 기병의 일로 근심이 가득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것을 보면 나를 믿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군, 속하의 칼이 녹슬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요시치카와 열 명의 수족이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요시치카와 무승들은 서로 우열을 가렸던 모양이다. 내공을 쓸 줄 아는 양욱이 요시치카를 상좌로 두었다는 것은 실전에서 병장기의 이로움과 숙련을 육장과 내공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형님, 저도 이번에는 형님을 돕겠습니다.”

동생 준신이 늠름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런 준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야’ 하며 이마를 어루만지는 모습은 영락없는 십 대 소년이었다.

“전쟁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형님도 제 나이 때부터 이미 전쟁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나였으니까.”

“네?”

“나였으니까 가능했다. 아직 너는 설익었다. 요시치카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게 되면 그때 허락하겠다.”

내가 요시치카를 눈짓하자 요시치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군은 아우를 전장으로 보내지 않으실 모양입니다.”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계속 질주했던지라 녹초가 되었던 전신이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나는 김한충에게 말했다.

“소장이 아구다를 만나보겠습니다.”

“장군이 직접?”

“그렇습니다. 아구다가 정주성까지 올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이유가 있다면 저를 만나기 위해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군을 만나기 위해서? 대체 무엇 때문에?”

“저도 그 이유를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는 동경(요양)에서 이미 한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지요. 게다가 우리가 상대했던 우야소는 아구다의 형입니다. 병마사 영감께 솔직히 고하자면 지난 전투에서 우야소는 저와 손을 잡았습니다.”

김한충은 크게 놀랐다. 그가 놀랄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믿을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진은 현재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있고,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반목과 쟁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병마사 영감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야소의 완안부는 잠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아구다라는 뛰어난 지휘관이 있는 이상 언제고 부흥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동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소장의 우책(愚策)이지요.”

“어허.”

김한충은 까닭 모를 한탄만 내뱉고 있었다. 내가 사실을 숨겼다는 것에 대한 실망일까? 아니면 명백히 월권을 저지른 나의 처리를 고심하는 것일까?

“장군의 그 우책으로 동계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 확신하는가?”

동북 9성 계획은 아직 수립되기 전이다. 김한충으로서는 여진이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동계가 평화롭다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소장의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건대 여진은 동계에 발끝도 들여놓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작정으로 전횡(專橫)했나이다.”

김한충은 뒷짐을 쥐고 잠시 서성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발걸음이 멈춰 섰다.

“좋다. 장군의 늦은 고백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장군의 행동과 견주어 그 의도에 사심이 없다고 믿겠다. 아구다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겠다. 그전에 이 자리에서 하나만 약속해다오.”

“말씀하소서.”

김한충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정녕 그 의도가 백성을 위한 것이고 바른 것으로 판단한다면 나에게 사실을 감추려 하지 마라. 내 능히 너의 성벽이 되어주리라.”

윤관이 동북 9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남쪽 지역 백성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성이 완성되기도 전에 백성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조바심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여차하면 그들을 병사로 쓰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김한충이 윤관의 조치에 반발했다.

-성이 완공되지 못한 채 백성을 밀어 넣는 것은 시급한 일이 있을 때 백성을 모두 죽이는 일이다. 백성을 지킬 수단을 취하지 못하면서 어찌 백성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원수(윤관)께서 말씀하셨지만 나는 감히 따를 수 없다.

반대했지만 윤관은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김한충의 예상대로였다.

============================ 작품 후기 ============================

어떤 반응이든 그것은 제가 감수해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항상 얻고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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