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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92화 (92/257)

00092  (12) 전극(電戟)  =========================================================================

“요가 무너지는 순간을 항상 꿈꿔왔지. 그리고 그곳에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말일세. 그러나 자네의 의견은 고토 회복을 넘어 체제의 전복(顚覆)을 꿈꾸고 있다. 반역이지. 고려의 장군으로서 고토 회복에 앞장서겠다는 생각은 없는가?”

나는 정지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꿈꾸었던 고토 회복은 어떤 것이었을까?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일까? 척준경을 역당(逆黨)이라며 몰아낸 그가 아니었던가? 그에게는 고토 회복이 우선이었을까? 고려에 대한 충정이 우선이었을까?

이제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무력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을 밝힐 차례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일민 등의 송인을 바라보았다.

“오대십국의 최종 승자는 송이었습니다. 당시는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송이 최고의 수혜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란족의 요나라입니다.”

이일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대십국의 최종 승자는 분명히 송이었지만 그들이 중원에서 투닥거리는 사이 초원에는 새로운 패자가 나타났다. 오대십국의 연원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초원에서 비롯된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상한 결과다. 하지만,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오대십국에서 하북에 기반을 둔 국가 중 어디 초원을 발판으로 두고 있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중원에 발을 디딘 순간 초원은 어느새 뒷전에 중원의 패권에만 몰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만큼 중원의 풍요로움이 초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연 자신들의 근간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소홀한 곳에서 새로운 지배자가 출현하여 자신들의 목을 옥좼다.

“민이 당으로 넘어가는 근 십 년의 혼란기와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는 근 칠십 년의 혼란기는 그 이후 왕조들이 문치주의를 표방하게 하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무법천지의 종언을 고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입만 산 간신들이 두려움을 모르고 횡행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법이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번에는 정지상과 윤언이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태조께서는 숭무를 개국의 기치로 삼고 고토 회복을 추진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은 변명할 거리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윤언이 같은 경우는 아버지가 윤관이니 지금도 고토 회복은 추진하는 중이라고 외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동북 9성 이상의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분은 고토 회복이었지만 기실은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이 커지고 있는 귀족들을 견제하고, 새로운 지지세력을 손에 넣고자, 백성 수만을 강제 이주시키기 위한 일종의 내부 정치 행위라고 나는 이해한다.

“숭무를 앞세웠으면서도 무과는 없고, 장수들은 하나같이 귀족들의 추천으로 등용되었다. 이래서야 귀족들의 수족이나 다름없으니 고토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지금의 고려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으랴.”

정지상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을 얻어 자네가 왕이 되겠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이상적인 국가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인가? 무력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느냐고? 바꿀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 역사가 올바른 것인지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맞아.”

외침과 거의 동시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즉각적인 수긍에 정지상은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닫아 버렸다.

“역발산기개세라는 항우는 끝내 실패했다. 무력으로 역사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예겠지. 그렇게 어려운 일인데 그것이 올바른지까지 증명하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라 득도한 신선이겠지. 보자기에 가려진 과일이 썩은 것인지 맛있는 것인지는 보자기를 벗겨봐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항우가 되겠다? 그것참 무섭고도 놀라운 일이군,”

이일민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항우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 이 자리에 모인 송인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장강 이남 출신들에게 항우는 비운의 영웅이었다.

“나는 거란과 여진을 양손에 쥘 것입니다.”

“요나라를 대신하겠다는 것인가? 과거의 자네 신분이 어찌 되었든 지금은 어엿한 귀족일세. 그리고 아무리 자네가 발해의 역할을 꿈꾸고 있다고 해도 고려 조정은 자네를 반역자로 낙인찍을 걸세.”

“그렇게 하고자 해도 공격하지 못할 걸세. 나는 의협의 시대를 만들어보고자 하네.”

“의협의 시대? 도대체 자네의 대답은 시원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네.”

“도성을 두고 옥좌에 앉아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물 곳은 파오(包, Ger)이며 불의함이 있는 전장이 될 것이다. 내가 달리는 곳은 대지의 시작에서 끝을 아우르며 중원은 단지 천하의 일부분에 속할 뿐이다. 누구나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함께 할 수 있고,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누구나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대체 그것이 무슨 뜻…… 설마! 자네!”

정지상의 표정이 급변했다. 나라를 세워 다스리는 것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다. 선정을 베풀어 이웃까지 영향을 주기 바랐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의 효과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국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정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찌해야 하겠는가? 예전의 나는 내가 직접 위정자가 되어 본을 보이는 길을 선택했다. 카이사르와 같은 길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알렉산드로의 길을 택했다.

‘그가 머무는 곳이 곧 제국이었다.’

유라시아를 종횡하던 칭기즈칸은 거대한 제국을 세웠지만 나는 제국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사자가 될 것이고, 호랑이가 될 것이다.

“산동에 양산박(梁山泊)이라는 곳이 있지.”

정지상과 윤언이가 내 발언에 대경했지만 이일민은 오히려 껄껄 웃고 있었다.

“송 개국 초에 하수(황하)의 둑이 터져 양산(梁山) 부근, 많은 논밭이 온통 물에 잠긴 적이 있지. 그물이 빠지지 않아 사방 수백 리나 큰 호수가 생겼는데 그때부터 그곳을 양산박이라고 부른다네.”

정지상과 윤언이는 처음 들었을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삼자의 입장에서 양산박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논밭이 호수가 되었으니 인근 농민들은 곡소리가 났지. 그런데 하수를 따라 흘러들어온 물고기들이 풍부하여 큰 어장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빈농들은 저마다 작은 배를 만들어 생선을 잡았지. 농사는 한 해를 망칠 수 있어도 생선은 그래도 매일 잡혀주니 점차 인근 농가가 먹고 살만해졌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지.”

양산박이 생긴 원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빈농들이 양산박을 통해 나름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관리들이 이권을 노리고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항하려면 세금을 내야하고, 생선을 잡으면 일부는 상납해야 했다.

“탐관들이 이권을 노리고 설치니 백성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지. 불만을 품은 자들이 모여들고 실제로 움직임을 보이자 그곳은 관리들이 감히 손을 델 수 없는 치외법권이 되었네.”

“사정이 딱하지만, 반란이나 마찬가지입니까? 그런데 왜 그 지역의 관리들은 토벌군을 조직하지 않는 것입니까?”

정지상이 물었다. 이일민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나 이일민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뻔한 질문이었지만 정지상이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일 것이다.

“토벌군이 오면 양산박의 실상을 알게 될 테니까. 호랑이가 나타나면 여우가 비켜줘야 하는 것과 같네.”

어디 탐관이 지역에만 있으랴? 조정에도 수없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이 양산박의 이권을 탐낸다면 지역의 탐관으로서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그러니 자체 해결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것이 쌓이고 싸이다가 결국 터져, 송강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장군은 양산박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법이 미치지 못하는 왕족과 귀족들을 심판하는 역할 말일세.”

내게 일만의 거란, 여진 기병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일국을 뒤집는 것은 어려워도 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아무리 그가 삼엄한 구중궁궐에 있어도 죽일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이 길은 내가 겪은 하사신의 신념과도 비슷했지만 달랐다. 하사신이 종교적 신념이라면 나는 나 자신이 법 밖의 그들에게 법이 되고자 했다. 미국 코믹스로 치자면 다크히어로, 배트맨 정도일까? 배트맨은 고담시를 영역으로 삼았지만 나는 유라시아 전체를 영역으로 삼겠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네가 절대 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자네를 죽이기 위해 천하가 일어설 것일세.”

정지상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천하가 아니라 나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겠지. 부패한 왕과 탐관오리.”

“그들이 부리는 자들이 곧 백성이 아닌가!”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야. 그들은 오히려 증인이 될 것일세.”

“병사들을 오히려 증인으로 삼겠다고? 자네의 행동을 말인가?”

정지상은 너무나 허황하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너무 크다고 여겼는지 목소리를 잘게 떨고 있었다.

올바른 법치를 구현하고자 나는 본을 보이기 위해 이미 노력한 바가 있었다. 온전히 쓸모없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법치의 제정이 인간에게 달린 이상 변질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공교롭게도 현대 일부분이 떠올랐다.

업무차 싱가포르로 출장을 떠났던 나는 2004년 9월 23일 귀국하자마자 새로운 뉴스를 들었다. 성매매방지특별법이 발효된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유흥가가 서울과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당시 한창 혈기 왕성했던 나는 함께 출장 갔던 동료와 서울에 도착하면 안마라도 가자며 약속했었지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법이 발효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귀가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안마를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집에 와서 할 일도 없으니 법 조문을 찬찬히 훑어보았었는데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모범 격이라 이 법이 만들어진 이유를 의심케 했다.

맥락은 이렇다. 특정인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것은 허용, 불특정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는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홍등가, 안마 같이 불특정 다수로 영업하는 곳은 처벌되지만, 특정인에게 월 천만 원 주고 스폰서를 하는 행위는 화려한 일탈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부조리함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폭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네.”

정지상의 반응은 당연했다. 나 역시 그것을 놓고 고민했으니까? 대체 현대의 테러 단체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 다를까? 양산박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국가에서 공인하지 않은 불법 무장 단체가 아닌가?

“그러나 일부에게 교훈을 줄 수는 있지. 제대로 살라고.”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지상과 윤언이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분노와 당황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가 바다 한가운데가 아니었다면 벌써 자리를 일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는 더 좋은 기회였다.

“암군과 탐관에게 벼락이 되겠다. 올바르다면 그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선택은 나 혼자가 아닌 백성이 내릴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이 내가 살아생전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여주마. 내가 그들을 모두 쥐고 있겠다. 단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도 어려운 것인가? 암군은 선정을 이룬 왕으로 기록될 것이고 탐관은 양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겉이, 행동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겉치레의 단점을 이야기하면서도 예를 지키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무엇보다.”

나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주위를 보며 웃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성공한 항우가 될지, 실패한 항우가 될지, 나를 막든 돕든 그것은 모두, 각자 선택이다. 나는 억울한 사연을 가진 이들을 한데 모을 것이다. 나는 하늘의 징벌을 대신할 것이고, 그 업보는 모두 내가 질 것이다.”

민나라가 생기면서 없어진 일이 되었지만 오호 십육국 시절 북위에 최호(崔浩)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하여 근 20년간 북위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신임하던 황제에게 죽게 된다. 북위의 국사 편찬 작업을 맡았는데 북위가 저지른 만행이나 실정을 가감 없이 실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을 했는데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눈치가 없다고 처세가 없다고 그를 비난할 것인가?

만약 그런 일이 지금 다시 발생한다면 나는 결코 그냥 넘겨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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