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12) 전극(電戟) =========================================================================
“실력이 있다 하여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천 리를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름도 모를 부족에게 쫓겨서였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지요. 제가 탄 말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실력은.
“다섯 명을 죽이자 수십 명이 저를 쫓기 시작했고, 다시 다섯 명을 더 죽이자 추격자가 수백 명으로 늘어나더군요. 황무지라 숨을 곳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천 리를 달렸을 때, 한때, 수백 명의 추격자였던 적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포기하고 돌아갔던 것일까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오만도 괜한 자신감도 아니다.
죽을 만큼 극한 상황에서 얻어낸 나만의 자산이다.
다들 나를 보며 한기를 느끼는지 스산한 표정이었다.
“그래 확인해보자꾸나.”
이일민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조금 전의 대결에서 한 수를 양보했던 너그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를 동격으로 인정한 것이다.
나는 그의 공격을 일일이 받아치기 시작했다. 수도는 그냥 받는다 쳐도 장법으로 변환할 경우는 장심과 닿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으로 충격을 완화했다.
보통 내공은 물과 비유되곤 하는데 물의 파문을 내공의 움직임과 흡사하다고 보는 관점 때문이다. 우리의 몸을 도는 피 또한 물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견해가 일리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 파문의 충격이 몸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접촉면에서 파문이 확산 될 가능성을 막아야 방어라 할 수 있다. 파문을 끝까지 내뿜을 수 없도록 적이 거두게 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바로 고통이다.
내 몸 어딘가에 장심이 닿았다면 나는 그의 몸 어딘가를 재빠르게 타격하여 방어하는 식이었다. 고통은 참을 수 있다지만,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도 없애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상황은 마치 한때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무예 대결처럼 바뀌어버렸다. 오가태극권의 오공의와 백학권의 진극부가 1954년 마카오에서 대결했던 동영상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상상이 깨지는 것을 느꼈었다.
일반 싸움과는 다르다는 인식은 확실히 심어주었지만, 이것이 과연 실전에 적합한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배운 품세로 승리하기 위해 시종일관 규칙적인 동작을 선보인다. 필살의 자세라고 불리는 것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성룡의 취권이 보는 재미는 있지만, 실전에서 써먹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 공격을 나는 수벽타의 동작을 적절히 활용하며 막고 또 막고 간혹 초식의 상성에서 밀릴 것 같으면 바닥을 굴러주기도 했다. 그렇게 일백 합을 넘었을까? 체력의 차이는 곧 호흡의 차이기도 했다. 이일민의 입가에서 거친 호흡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백오십 합이 흘렀을 때 이일민은 공격을 멈추고 선언했다.
“그만하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 말을 듣기 위해 그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주고 지금껏 대응했던 것이다. 과연 삼절오은 정도 되는 인물이 온 힘을 다했을 때 내가 버틸 수 있는 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수확이 있었다. 오래도록 기예를 연마한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확실한 수가 있었고, 그것은 일순간에 승패를 판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나한테도 그것은 먹혔다. 단지 내게는 주춤한다든지 바닥을 구른다든가 하는 약간의 손해로 나타났을 뿐이다.
회심의 초식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공격했다가 내가 별 피해 없이 일어났을 때 그가 짓던 표정은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수양이 깊어도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깨지는 순간은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준아, 내 옆에 서거라.”
이준을 불러 자신의 옆에 세우는 이일민이었다. 이준이 곁에 서자 이일민은 내게 포권하며 말했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번 비무로 다 들은 것 같소. 사정을 봐주어 고맙소. 준이의 생사는 앞서 약속했던 대로 이제 그대들에게 귀속될 것이오.”
처음엔 하대로 시작했던 그의 말투는 몹시 누그러져 있었다. 그것보다 나는 이준이 극심하게 반발할까 싶었는데 오히려 잘 부탁한다며 내게 포권하는 것이 아닌가?
“저도 눈이 있으니 지금의 대결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실로 개안한 느낌입니다. 태사부를 능가하는 무인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허, 다 키워놨더니 소용이 없구나.”
이준의 너스레에 주송 조차 웃고 있었다. 갑자기 화기애애한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정지상과 윤언이였다. 내가 당황스럽지 않았던 것은 이런 상황을 전생부터 수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이일민은 뒷짐을 쥐고 저 멀리 중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집안이 부유하여 모든 것을 쉽게 익혔지. 몸이 약하다고 하니 소림 속가 출신의 출중한 무예 사범을 붙여주었고, 바둑에 빠지자 인근에서 가장 이름난 명인을 사범으로 초빙했다. 시를 짓겠다고 하니 경사(京師, 수도)에서 낙향한 한림학사를 천금을 주고 불러들였지.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내 이름 앞에는 태호삼기라는 허명이 붙었다. 그런데 그 허명이 싫지 않았다. 조용히 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나보다도 세속적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다면 집착이라도 강해지겠지만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으니 집착하고자 하는 대상은 분산된다. 어쩌면 그가 바둑과 시를 무예 앞에 놓았던 것이나 은거를 핑계로 삼았던 것은 오랜 명성이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젊은 시절은 분명히 강했겠지만, 흥미를 잃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다음부터는 무예에 한해서는 퇴보가 시작한 것이다.
“바둑도 무예도…… 졌으니 이제 시 하나만 남은 것인가?”
오히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치아료각사가사(癡兒了?私家事), 쾌각태호의만청(快閣太浩倚晩晴), 낙목천산천원대(落木千山天遠大), 장강일도월분명(長江一道月分明)이라.”
한 줄씩 음미해보니 곁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능한 놈이라 집안일은 미뤄놓고, 저녁 맑은 날에 태호의 쾌각에 올라 마음을 의지한다. 온 산에 낙엽은 지고, 하늘은 멀지만 크게 보이니 장강에 머문 달빛 속에 또렷하기만 하구나.
지금의 심경을 노래하는 것인가? 송시의 특징이 사대부의 교양과 품격을 드러내고 점잖은 풍유(諷諭, 풍자)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시는 그것의 모범처럼 들렸다.
시가 끝났다고 싶었는데 정지상이 대뜸 나서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대구(對句)했다.
“주현이위가인절(朱弦已爲佳人絶), 청안료인미주횡(靑眼聊因美酒橫) 십리귀선농장적(十里歸船弄長笛) 차심오여백구맹(此心吾與白鷗盟)이라.”
-거문고 붉은 줄은 임 가신 뒤에 끊겼지만, 좋은 술이 있어 눈이 절로 뜨여지네. 십 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피리를 부니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갈매기와 더불어 한 짝이라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힐 대구였다. 그건 이일민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히려 나에게 열세를 인정했던 것보다 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일민의 자조 섞인 시가 과거를 회상하고 후회를 말하고 있다면 정지상의 대구는 그것을 현재 시점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이십 리를 십 리로 줄여서 말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그 뜻은 전해졌다.
지금 우리가 있는 해상은 벽란도에서 불과 이십 리 떨어진 곳이었고, 그런 곳을 마치 일만 리 밖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심정으로 노래했으니 어찌 풍자와 해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황정견의 등쾌각(登快閣)을 변용(變容)하여 사용했습니다.
이일민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탄식했다.
“고려에 이렇게 인물이 많은 줄 몰랐구려. 하나 남은 자부심마저 잃어버렸으니.”
“무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주제라 그런 것일까? 정지상은 여느 때와 다르게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진실하고 의미 있는 문장을 풀어내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武)에 예(藝)가 붙고 기(棋)에 예가 붙는 것처럼 시에 예가 붙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가 곧 내가 머무른 시간을 충만하게 만드는 수행이자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상이 누군가에게는 별것이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참 별일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시가 아닐까요?”
정지상의 말은 곱씹을 만했다. 남의 시를 지식 삼아 배우는 일은 있어도 정작 나만의 시를 만들어 본적은 극히 드물었다. 대가(大家)의 시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활용도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런 내 생각은 모두 일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내가 무엇을 한다는 것이 전혀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이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참 별일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시라…….”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이일민의 사고 역시 순수함에서는 변질하여 있었다. 명호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즐거운 취미가 아니라 누군가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경쟁이 된다.
“준이를 원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준이의 성품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지만, 무예에 대한 자질은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네. 평범함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지.”
“요나라의 성세가 언제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하십니까?”
정말 뜬금없는 되물음이었을 것이다. 이준과 요나라가 무슨 관계라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이일민의 질문이 정지상과 윤언이를 함께 이해시키기에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십 년간 국외를 전전했습니다. 첫 시작은 해남도였지요.”
“해남도?”
우마르가 나왔고, 소동파가 나왔다. 지금까지 내가 지방을 전전하다가 기회를 만나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고 알고 있는 정지상과 윤언이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점차 길어지자 이일민은 잠시 이야기를 중단시키더니 술을 나누며 계속하자고 했다. 다들 흔쾌히 동의하자 갑판 위에 술판이 순식간에 차려졌다.
이야기하는 내내 나는 내 행적을 스스로 복기하는 기분도 들었다. 같은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던 나였기 때문이다.
고려로 돌아와 왜국에 다녀온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밝힌 이유는 그동안 정지상과 윤언이를 만나면서 그들이 아직 관리로 임용되기 전이라 일정 파벌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과 젊은이다운 순수한 의도로 고토 회복을 꿈꾸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자겸 등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번 일에 그들이 유신을 도왔던 것도 순수한 충정의 발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정사(正史)에 기록되더라도 야사(野史)라고 치부 받아도 할 말이 없겠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정지상의 반응이었다.
“요나라의 국내 사정이 혼란스럽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천하제일세(天下第一勢)라 할 수 있네. 폐하께서 여진을 먼저 치려는 것도 여진을 잡아야 그다음 요나라와 건곤일척을 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겠는가?”
“요나라를 치는 것은 지금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송과 고려가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그 발목을 잡는 세력들이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해보고자 한다.”
“영웅이 되려 함인가?”
이 시기 영웅이란 단어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개국(開國)을 빼놓을 수 없다. 정지상의 어조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고심했던 화두(話頭)가 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개인의 무력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
어렸을 적 강해지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빈한한 집안 사정을 탓하며 구름 위에서 노니는 그들을 따라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름 위에 편입하여 실상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류에 편승하는 뱀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류를 만들어내는 용이 될 것인가?
그러나 사람 사는 것이 그렇게 흑백 논리라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정지상이 말한 시의 정의가 내가 품고 있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 우화 중 어느 스님이 큰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개한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부처님이 이르길 일체중생이란 말이 있으니 그 중생에 모든 만물이 포함되어 있다면 개한테도 불성이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큰 스님은 “없다(無).”라고 단언했다.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방법들을 동원하는 순간 아무 의미 없는 말대답이 되고 만다. ‘있다’와 ‘없다’라는 두 가지 답에 연연하는 순간 그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주변이란 바로 내 의지다. 상대적인 대답은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내 신념과 의지를 시험하는 질문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지금 나는 누구를 의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큰 스님과 같은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없다’라고 말이다.
나는 좌중을 향해 선언했다.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참 별일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어느 시대나 계급의 구분은 있었고, 백성 대부분은 가감은 있을지언정 자신이 사는 시대가 가장 살기 어려운 시대였다. 현대도 마찬가지다. 현대를 사다리가 치워진 시대라고 하는데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용 낫다라는 말을 듣기 어려워진 시대라고 자조한다. 그러나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수천 년 전 고대 벽화에서 ‘요새 젊은 것들은 버릇없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우스개처럼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 사는 방식과 사고는 비슷하다.
요는 마음가짐이고 실천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사회 제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회 제도 역시 처음부터 그렇게 굳어진 것이 아니다. 그럼 그것을 누군가 바꿔주길 기다리는 것인가? 기득권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사회 제도를 고친 것인데 그중에 성자가 나타나서 고쳐줄 것을 기대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을 일일이 탓할 수는 없다. ‘없다.’라는 대답에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혼란이 일 것이다.”
이일민의 우려는 이곳에 모인 모두의 걱정이기도 할 것이다.
“질서 안에서 질서를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공산주의 혁명 사상가가 된 느낌이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올렸어야 했는데 쓰면서 내용이 너무 어렵지 않을까? 뜻이 제대로 전달될까, 쓰고 지우고 반복되다보니 약속을 어겼습니다. 불꽃처럼도 쓰기 시작했는데 오늘 올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일은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