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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90화 (90/257)

00090  (12) 전극(電戟)  =========================================================================

이일민은 뒷짐을 쥐며 갑판으로 걸어나갔는데 이미 이런 일을 예상했는지 갑판은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절로 헛웃음이 흘렀다. 장강 이남 출신답게 출렁이는 배 위에서의 싸움은 능숙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량을 모두 발휘할 수 있고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환경을 제대로 고른 셈이다. 만에 하나 치욕을 당할 가능성을 아예 만들지 않겠다는 것일까?

내가 수벽타의 기수식을 취하자 그는 생경하지 않은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의 장수라면 거의 모두가 배우는 무예인만큼 기본 지식은 인접국에도 흘러 있었다. 물론 지금부터 내가 보여줄 것은 그가 알고 있던 수벽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 역시 기수식을 취했다. 갑판에서 중심을 지키기 위해 두 다리를 일정 이상 벌리고 양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자세는 남권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남권북퇴라는 말처럼 권장 위주의 빠른 상체 공격이 위주가 될 것으로 보이니 나는 마치 젊은 날 나의 우상이기도 했던 이소룡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장자시니 당연히 한 수를 양보하겠지요?”

본인이 허락하는 것과 내가 허락을 구하는 것은 어감부터 다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놓쳤다고 생각한 것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렴.”

“그럼 갑니다.”

나는 갑판을 박찼다. 나는 이미 배 위에서의 전투도 상당수 경험했고, 말을 지겹도록 타는 사람이라면 튼튼해지는 허벅지의 안정감을 경험했다. 즉, 그는 이 장소가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말이다.

‘첫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은 내 수족이나 다름없는 열 명의 무승 중 유일하게 내공을 다룰 줄 알았던 양욱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삼절오은은 새롭게 그 자리에 합류한 노준의까지 합쳐 네 명이었고 그 네 명은 모두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무공 특성에 내공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탁은 군부 무예의 정점이었고, 노준의는 봉을 수족처럼 부렸고, 적설은 검의 달인이었다. 끝으로 대리의 황족인 단정홍은 재빠른 경공과 놀랍도록 정확한 암기술이었다.

그런 자들 사이에서 남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촌경이나 발경 같은 말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는 통용되어도 발로 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진각을 하는 이유도 주먹과 손바닥에 힘을 모으기 위해서다.

아직 이일민과 제대로 겨룬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지금껏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도 내공을 의심하게 하였다. 적설도 나이가 많았지만, 그는 노인답지 않은 정정함을 대면부터 느꼈다. 그러나 이일민은 겉으로 봐서는 그저 늙은 어부, 상인 정도에 비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돌진하자 그는 내밀었던 양팔을 뒤로 거두었다. 뻗기 위한 준비동작이었다. 기수식에서 주먹을 쥐고 있었던 것이 점점 펴지며 장을 이루자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삼절오은 정도 되는 고수가 장법을 쓴다는 것은 십중팔구 내공을 쓰겠다는 것이다.

양욱은 말했다. 내공을 발동하기 위한 조건은 매우 까다로워서 그 과정을 단축하고 그 조건으로 상대를 몰아가는 것이 고수라고 말이다. 내공을 상대에게 투사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접촉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효과적이다. 만약 육체적인 파괴력을 더하겠다면 주먹을 쥐는 것이고 내공을 극대화하겠다면 최대한 손바닥을 펴는 것이다.

상체를 주로 쓰는 남권은 기합소리를 유난히 많이 낸다고 한다. 힘을 끌어모으기 위해 기합이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는 만큼 오랜 경험의 산물이겠지만 남권을 쓰는 자들의 기합은 괴이하다고 할 정도다. 이소룡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상대를 위압하기 위한 과정도 녹여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이소룡을 보고 자란 나에게는 위협이 아니라 친근하게 다가왔다.

내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이일민은 쌍장을 내뻗었다. 무슨 장풍 같은 것이 날아올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장법 자체가 가진 기이한 열기는 느낄 수 있었다. 뜨겁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갓 잡은 소의 선지를 맛볼 때의 그런 느낌일까? 따뜻하면서도 진득한 기운이었다.

팔극권의 고수라는 이서문의 경우처럼 저 공격을 맞으면 붕 떠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느낌은 들었지만, 문제는 나 자신이 그 위험을 위험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타국의 사람이 한 말도 아니고 명의 용장이었던 척계광이 명의 무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남겼었지. 중원의 맨손 무술은 허황하고 실전성이 없다고. 차라리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며 본인이 직접 병사들에게 적합한 검법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양팔을 뻗어 그의 허벅지 부근에 태클을 시도했다. 태클이 먹히자 그는 뻗어 가던 양장을 허우적대며 벌렁 넘어졌고 나는 그의 상체에 재빨리 올라탔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지켜보고 있던 주송과 이준이 당장에라도 나에게 뛰어들 기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입식타격이 전부인 줄 알고 바닥을 뒹굴 때는 뇌려타곤이라며 도망치는 방법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상당히 생소하면서도 수치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이들은 알까? 그래플링(grappling)을 통한 서브미션(submission)이라는 것을.’

일반인이 사자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기술을 한 가지 꼽으라면 격투가들은 대부분 서브미션을 꼽는다. 상대를 때려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이기려는 방법, 살아남으려는 방법, 체급 차를 이겨내려는 방법으로 서브미션만한 것이 없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이일민을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일민이 선택한 방식이 쪼잔하고 치졸하게 보였던 지라 나 역시 쪼잔하고 치졸한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별하는 성격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양욱에게 들은 바로는 발경, 또는 촌경이라는 것은 진각 또는 수련자 나름의 내공 운용 원리를 통해 상대를 격중하는 그 순간까지 내공의 흐름이 면면부절해야 한다. 중간에 끊어지게 된다면 마치 존재하지 않던 물건처럼 아무것도 없던 것이 되어버린다. 십 년 전, 양욱이 어린 나에게 형편없이 당했던 것도 면면부절을 하면서 상대를 정확하게 격중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비슷한 경우였다. 한창 힘을 끌어모으다가 하체를 공격당하고 상체를 억누르자 그는 여느 노인과 다를 바가 없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짓수의 젊은 황제, 호저 그레이시가 종종 선보였던 깃쵸크자세를 재빨리 취했다. 목 부분의 뒤 깃을 잡아당기면 손목이 자연스럽게 목을 압박하게 된다. 머리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경동맥을 압박하는 것이다.

“제가 이겼습니다.”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호흡의 곤란을 경험할 정도만 하고 나는 그의 상체에서 내려왔다. 주송과 이준이 달려와 이일민을 부축하자 이일민은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수벽타에 그런 동작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북방의 이민족이나 한다는 각희가 이것과 유사하다고 들었지. 그들과 오래도록 대립하다 보니 동화되기라도 한 것인가? 이것은 청정한 무예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숨을 잔뜩 끌어모아 바닥을 향해 장을 내뻗었다. 순식간에 갑판에 손바닥 두 배 만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두껍고 단단한 목재를 쓸 것인데 과연 그것을 일수에 격파하는 것을 보니 그의 실력이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격파를 잘한다고 모두가 고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 무예가 사도(邪道)라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누가 봐도 근본도 없는 투로에 드잡이질이다. 어찌 이것을 무예대결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껏 제가 만나본 삼절오은 중 가장 약한 분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참으로 재미있군요.”

이일민의 안색은 잔뜩 일그러지면서도 한 줄기 호기심이 일었다. 삼절오은은 서로 활동하는 지역이 달라 이름 정도는 알아도 교류는 드물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친절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제가 처음으로 만났던 분은 섬전수, 단정홍 대인이었지요.”

“단정홍! 그자를 만났단 말인가?”

단정홍이 속한 대리와 이일민의 송은 애증으로 얽혀 있는 상태였다. 이일민이 내 기술을 두고 각희를 비난한 것을 보면 단정홍에 대한 생각도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분께 많이 배웠습니다. 제게는 마음속으로 품은 여러 스승이 계십니다. 단 대인 역시 그 중 한 분이지요.”

이일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과연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시선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했던 포용의 중화사상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중원의 것이 최고라는 전통적 중화사상을 그의 눈빛에서 읽은 순간 가슴 한편으로는 아릿한 느낌마저 받았다.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경공과 암기술은 최고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막기 위해 수패를 들어야 했지요. 그러다 또 한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탁이지요.”

“철대인(鐵大人) 이탁?”

어느새 이탁의 위명은 철대인이란 명호까지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 명호를 곱씹을수록 그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검호 적설 대인도 만났지요.”

“이미 세상을 떠난 검호까지……!”

이일민과 주송, 이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생 한 명도 만나기 어렵다는 무예 고수들을 나는 인연이 있었는지 만날 수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이일민은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제가 그를 만났을 당시는 삼절이 아니었지만, 천수가 다해 돌아가신 검호를 대신해 새롭게 삼절에 오른 이입니다.”

짜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구동성으로 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옥기린 노준의!”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일민은 계속해서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연발했다. 무엇보다 내가 자신을 가장 약하다고 평했다는 것은 그들 모두와 겨뤄봤다는 뜻이었기에 더 믿을 수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일민이 그들보다 약한지 강한지 알 수 없다. 그 당시에는 내가 이길 수 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제는 이일민을 쉽게 이긴 것을 보면 내가 일정 수준에 올랐다는 감만 잡혔다. 서로 무예를 보는 기준이 달라서 옳고 그르다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부와 연관되어 실전 무예에 강했고, 이일민은 은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실전보다는 경연, 대무에 치중했을 것이니 만약 올림픽에 우슈 같은 종목이 채용된다면 이일민 같은 자가 더 잘할 것이다.

“내가 비록 오은에 속하지만, 평생을 태호 인근에서 살았기에 교류가 있는 자는 양순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개 고려의 군관이 네 명이나 만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오은 중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양순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또 어떤 내력을 가진 자일까? 이 와중에 궁금증이 도지는 것을 보니 이것도 오지랖 병인 듯싶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겨뤄보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방법을 쓰지 않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자부심 하나만은 인정해야겠구나. 첫수를 얻었다고 하여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닌가?”

손목까지 걷어붙이는 것을 보니 본격적으로 해볼 작정인 것 같았다. 너무 손쉽게 이긴 탓에 환호성조차 지르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지켜봤던 정지상과 윤언이가 나에게 꼭 이기라고 손을 잡아 주었다. 명문 사대부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상당히 모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수도(手刀) 자세를 취했다. 정면 자세를 취하는 남권의 특징과는 조금 달랐지만, 형식만 다를 뿐 운용하고자 하는 방법은 똑같다. 다만, 장법을 쓸 때에 비해 수도는 장기와 혈맥에 직접 타격을 주는 방법이기에 공격 수단이 더 다채로워진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부터 진심으로 겨룰 것일세. 원한다면 무기를 들도록 하게. 이 배에는 제법 좋은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네.”

“하하하!”

앙천광소라는 말이 있다면 지금의 내 웃음이 그 표현에 딱 맞을 것이다. 한참을 호탕하게 웃고 나서 나는 수벽타를 취하며 이일민에게 말했다.

“제가 무기를 들면 누군가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일민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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