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12) 전극(電戟) =========================================================================
의외였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지상이나 윤언이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내 이일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있구나.”
수호전 108성(水滸傳百八星)이라는 말이 있다. 수호전에 등장하는 108명의 호걸을 가리키는 것인데 36명의 천강성과 72명의 지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역사에 실명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천강성인데 그중 내가 참 좋아하는 표자두 임충 같은 경우는 허구의 인물이라 그 사실을 알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각 인물은 별자리를 하나씩 점하고 있는데 그중 혼강룡 이준의 별자리는 천수성(天壽星)이다. 염상 출신으로 양자강의 물길을 제집 드나들듯 오간 이준의 경력을 아는 자라면 ‘수’가 물 수(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수호전에서 목숨 수(壽)가 그보다 어울리는 이는 없다.
양산박에 합류한 것도 송강과의 인연 때문이지 본인이 의협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협의와 영웅에서 한발 비켜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참가한 전쟁에서는 특유의 인간적 매력을 발휘하여 공을 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세히 그의 공을 살펴보면 적장 또는 지역의 유지를 설득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을을 손에 넣는다는 식의 전공이다. 후수호전에서 그의 행보를 보면 송강이 조정에 이용당하며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하자 따르는 동료를 모아 섬라국으로 향하고 그곳의 왕이 된다. 송강을 따르던 양산박 두령들의 끝이 대부분 비참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직관은 높이 살만하다.
“이문을 남기는 것보다 사람을 남기는 것이 상도(商道)라 할 수 있다. 그대는 그 이치를 잘 알고 있구나. 이준은 내게 사손이 되고, 제자의 사업을 장차 물려받을 아이다. 그런 아이를 얻겠다는 것은 전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욱 독한 요구다.”
“그럼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러가도 상관은 없었다. 언제고 이준을 다시 만날 기회는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일민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지만 이일민은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는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라 추측했다.
이일민은 잠시 주송과 이일민을 일별했다.
“좋다. 받아들이겠다.”
이일민의 몹시 진지한 모습에 정지상이 내 옷깃을 잡아 당기며 급하게 말했다.
“자네의 묘수로 한 차례 승리를 일궜지만, 저자에게 두 번 같은 수를 쓸 수 없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자고 질 것이 뻔한 제안을 내밀었는가? 혹여 저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인가?”
“내가 알려준 중앙 포석이 기묘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교함이 필요하네. 상대방이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더욱 수를 세밀하게 계산해야 하지.”
“나도 두면서 그런 생각을 했네. 그러나 그것을 고려하고도 이일민은 수 읽기에 자신 있다는 것을 피력한 것이 아니겠나?”
나는 정지상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 이일민은 신경이 쓰이는지 바둑돌을 고르며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아까 나와 정지상이 의견을 나눈 후 진 것을 상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지상은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나직하지만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다.
“내가 지금껏 바둑을 두면서 자네가 말한 수는 듣도 보도 못했다네. 삼삼을 침입하라니!”
“이일민은 자네의 수를 역이용하려고 하겠지만, 이번 한 판에 자존심이 달린 만큼 신중하기 그지없을 걸세. 내가 그라면 정통적인 방법으로 귀를 확보한 후 중앙으로의 진출을 노릴 걸세. 물론 그렇게 되면 자네의 중앙 포석을 완전히 막을 수 없으니 절반만 걸치는 형태가 되겠지. 바둑판을 남북 둘로 양분하여 생각한다면 그중 하나의 방향만 점하여 만일을 대비하고 중앙 진출을 바로 시도할 것이라는 말일세. 그러니 자연 이런 모험수가 먹힐 여지가 있지.”
정지상은 그 수를 곱씹다가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와 바둑을 둘 때를 생각하면 도무지 지금 자네의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네. 분명히 자네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자네의 행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세. 어쩌면 자네는 곰의 탈을 쓴 여우인지 모르겠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면 이런 의심을 받을만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털어놓는 것이었기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자네의 의견이 내 생각을 웃도니 이번 대국 역시 자네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 그러나 지금껏 기예를 숨긴 이유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할 것일세. 만일 진실을 계속해서 숨긴다면 자네를 신뢰했던 유신 대감이 구천에서 통석(痛惜)을 금치 못하겠지.”
해명 여하에 따라 정지상, 윤언이와의 연줄이 끊긴다는 사실과 진배없었다. 자초한 결과였지만 나도 모르게 가볍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일민과 정지상이 좌정하자 결과를 예측하며 떠들썩하던 주변은 정적으로 감돌았다.
돌이 하나씩 놓일수록 아까와는 양상이 달랐다. 선수를 잡은 정지상이 좌상귀를 손에 넣었고, 그 사이 아랫변 양 귀를 손에 넣고 중앙으로 뻗어 나가려는 이일민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막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으로 비집고 나가려는 이일민의 공세를 두서없이 막아내는 형국이었다. 귀 하나를 손에 넣은 것과 두 개를 얻은 것은 수에서 차이가 나므로 승패를 떠나 착수의 주도권은 정지상이 쥐고 있었다.
계속 막다 보면 공격의 형태도 되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 상대방도 의무적으로 둬야 하는 외통수가 생긴다. 30수가 넘어가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우상귀에 먼저 깃발을 꽂은 것은 정지상이었다.
시원스럽게 착수하자 이일민은 한동안 그 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 진실로 이 자리에 놓은 것인가? 혹여 잘못 놓은 것은 아닌가?”
“삼삼(가로 3, 세로 3번 칸)에 놓은 것이 실수라고 보신 것이라면 잘못 보셨습니다.”
“삼삼에 놓은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이일민은 믿기지 않는지 재차 물을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귀를 장악하기 위해 삼삼 칩입을 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으로 여겼던 것이 근 500년간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불변의 전통이 깨어진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다.
‘조훈현이 다케미야의 우주류에 현혹되어 따라붙다가 말려든 것과 달리 제자는 그렇지 않았지.’
1990년 3회 후지쓰배에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한 이창호가 출전하게 되고 16강 상대로 다케미야를 만나게 된다. 이창호로서는 경험 삼아 출전한 대회니만큼 누구도 다케미야가 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승인 조훈현이 무너졌는데 제자라고 별수 있었을까? 예상이 너무 뻔하다 보니 일본 언론들도 주목하지 않았다.
정지상이 실수하지 않았다고 확언하자 이일민은 자신이 모르는 묘수가 나올지 몰라 장고를 거듭하며 신중하게 돌을 착수했다.
아무도 쓰지 않는 수라는 것을 증명하듯 중앙으로 더는 확장할 수 없도록 꽁꽁 싸매두고 아까 경험했던 우주류의 장점을 살려 중앙에 큰 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지상은 내 조언대로 우중변에 돌을 놓아 본격적으로 진흙탕 싸움에 나섰다. 거대한 영토 안에 적국의 특공대가 떨어진 격이라고 비유하면 쉬울까?
이일민은 드잡이질을 선택하기보다 안전하게 실리를 선택했다. 살릴 수 있는 집은 최대한 살리려는 그의 행보는 정지상이 요소마다 뿌리는 특공대의 방해로 오히려 폭이 좁아졌다.
120수가 지나가 이일민의 입가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혈혈단신 무모하게 뛰어들었다고 생각한 특공대가 우중변에 처음으로 착수한 돌을 만나며 전체 3할에 달하는 우상귀를 모두 세력권으로 두게 된 것이다. 삼삼의 묘수가 바로 여기서 나타났다. 삼삼은 죽는 수라며 호기롭게 포위했던 것이 전원 몰살에 중앙 영토는 쓸만한 땅이라고는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그가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처음 시작할 때 얻은 하단 좌우 귀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한 어린 이창호가 다케미야를 상대로 삼삼을 시도했을 때 일본 언론은 미개한 바둑이라며 우리를 비웃었지.’
비록 8강전에서 이창호는 당시 강자인 고바야시를 만나 안타깝게 탈락했지만, 그 대회에서 보여준 뚝심은 그해에 41연승이라는 놀라운 상승세와 함께 어린 이창호를 세계 중심으로 올라서게 한다.
이미 승기를 잡은 정지상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고려의 기풍은 어찌 보면 저돌적인 조치훈의 기질을 많이 닮아있는데 정지상 역시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 기사들을 보면 반 수 아래를 만났을 때 크게 이기는 고수와 막상막하로 보이지만 계가하고 나면 이기는 고수, 두 부류를 볼 수 있다. 이세돌과 이창호를 예로 들면 알기 쉬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지상은 마치 이세돌처럼 자비가 없었다. 여세를 몰아 힘껏 몰아붙이자 이일민은 탄식과 함께 돌을 던졌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구나.”
주변에서는 정지상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와 반대로 주송과 이준의 표정은 흙빛으로 변했다. 이 소문이 중원까지 흘러든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일까?
“젠장 인정할 수 없다! 나를 얻으려거든 나를 먼저 이겨라!”
젊은 이준은 성품이 제법 괄괄한 듯싶었다. 하긴 이 시대에 염상을 겸한다는 것이 어디 평범한 성품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 그가 주먹을 꽉 쥐며 정지상에게 덤벼들자 나는 재빨리 정지상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휘두른 주먹을 피하며 손목 깃을 잡고는 등을 돌려 어깨너머로 메쳐버렸다.
억 하는 순간 악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 모습을 보니 과연 요나라의 장사 스무 명을 홀로 상대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닌 것을 믿겠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정지상도 놀랐던 모양이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나에게 말하는 사이 바닥에 처박힌 이준이 뒷목을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시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그만!”
이일민이 손을 올려 그만둘 것을 명하자 이준은 주춤했다. 둘이 성이 같은 것을 보니 어쩌면 진짜 조손이거나 친척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네가 지금 내 얼굴에 먹칠하려 함이냐!”
“태사부!”
이일민의 일갈에 이준이 못내 억울한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이일민은 두 손을 모아 주변에 외쳤다.
“오늘의 약속은 여러분이 증인이외다.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약속은 지킬 것이오.”
생각보다 깔끔한 면이 있었다. 하긴 이 정도가 아니라면 어찌 삼절오은이라고 불릴 수 있었을까? 장내는 파장 분위기라 사람들이 축하와 함께 떠나가자 이일민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내가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한 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소. 마침 요기 할 때가 되었으니 나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겠소?”
이일민의 음성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유신의 부탁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터라 정지상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수락했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아마도 나와 따로 만났을 때는 오늘 있었던 일을 추궁받게 될 것을 생각하니 그때까지 부지런히 핑곗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우리를 자신들이 타고 온 배로 데리고 갔다. 배는 무척 커서 고려의 대선보다 약간 작을 정도였는데 가면서 주변을 살피니 군함 못지않은 방비가 눈에 띠었다. 해적의 위험이 상시 도사리고 있으니 자구책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식국의 융탄자가 바닥에 깔린 호화로운 선실에서 갖은 주호와 진미가 등장하자 탄성만 흘러나왔다. 고려의 연회는 대부분 불교 의식과 연관되어 있어서 진미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밥을 먹이기 위한 사람의 숫자가 많아서였다.
정지상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술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새 취기가 올라 입가에서 시 한 수가 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려사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니 나로서는 그것이 당연하였지만 이일민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이일민은 바둑, 시, 무공에 능해 태호삼기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앞으로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바로 맞아 떨어졌다.
“지금 이곳은 벽란도에서 서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해상일세.”
이일민의 말에 미주를 신나게 마시고 있던 정지상과 윤언이는 정신이 번쩍 드는지 깜짝 놀라며 이게 무슨 짓이냐고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의도는 없네. 바다 경치를 보며 술을 즐기는 것은 나의 오랜 낙 중 하나이니 말일세. 그리고 그 와중에 가볍게 비무를 하는 것도 말일세.”
비무를 빙자한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망신을 당했으니 두들겨 패서라도 분을 풀겠다는 것일까? 이준이 히죽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먼저 이준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결론은 나잇값 못하는 노인이 화를 풀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이일민이 눈을 빛냈다.
“우리가 화를 풀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나?”
이걸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후회할 겁니다.”
나는 양 주먹을 두둑 매만지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