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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87화 (87/257)

00087  (11) 운로(雲路)  =========================================================================

내가 기득권을 쥐었더라도 이랬을까? 이런 상황을 보지 않기 위해 전생에서 애써 본을 보이려 했지만, 이상과 실천의 융합은 요원하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말았다.

술자리가 파하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의화에게 돌아갔다. 고의화는 한 사람과 대작을 하고 있었는데 어제 단상에서 보았던 중신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던 차에 고의화가 먼저 그를 소개해주었다.

“너를 만나러 온 손님인데 조금만 늦었어도 만나지 못할 뻔했구나. 인사 나누어라. 이쪽은 동궁시학(東宮侍學) 한안인(韓安仁)이다.”

고의화와 비슷한 연배에 친분도 적지 않게 있었는지 소개에 거침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는데 대체 이 자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진의를 파악하느라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안인은 이자겸이 권력을 잡기 전에 치열한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장단(長湍, 파주군 임진면)을 기반으로 하지만 과거 급제를 통해 집안이 급부상한 신흥 귀족의 대표주자였다. 자연 한정된 권력을 놓고 기존의 대호족과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동궁시학의 직책은 숙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예종의 측근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는 내가 요나라를 상대하며 동궁에게 보여준 호의를 예종의 측근으로 합류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고의화에 질문에 나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한안인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고, 한안인이 마음먹으면 내 행적을 수소문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오전에는 유신 대감에게, 오후에는 이자겸 대감에게 다녀왔습니다.”

내 성격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고의화는 ‘그렇군.’이라며 내게 술잔을 내밀었지만, 한안인의 낯은 급속도로 경직되었다.

“유신 대감께 글을 받기로 한 것은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추문(醜聞)으로 요직에서 쫓겨난 이자겸 그자가 장군을 은밀히 부른 까닭이 무엇인가?”

추문이란 이자겸의 동생이자 순종의 3번째 비였던 장경궁주가 궁노와 간통하는 바람에 폐비된 사건을 말한다. 승승장구하던 이자겸의 위세가 사그라져 지금까지 은신하게 한 유명한 사건이기에 다 알 법한 내용이었지만 나에게 그 사실을 넌지시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다.

“어제의 일을 치하하기 위해 불렀겠지. 아마도 이자겸의 사돈인 김경용 대감도 한 자리에 있었겠군.”

“맞습니다.”

고의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에둘러 한안인의 의심을 잠재우려 했지만, 한안인은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예종의 충복인 그로서는 자신들의 정치에 거치적거릴만한 자들은 모두 주의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한안인이 정작 딸의 혼례는 경주 이씨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경주 김씨의 대표격인 김경용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을 지도 모른다.

그럼 또 다른 경주 김씨, 김부식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부식은 한림원에 소속되어 문한직(文翰職)을 근 20년간 수행하게 된다. 즉 지금의 시기는 정치인이라기보다 학자의 삶이다. 그러니 온갖 사화(士禍)에서 중립을 지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자겸과 김경용을 만났다고 하니 그들에게 한배를 타자는 제의를 받았을 것이네. 그리고 나 역시 장군에게 같은 제안을 하고자 고 상장군을 찾아왔네. 같은 제안이지만 그들과 우리는 명분부터 다르다네. 우리는 앞으로 가문의 위세만 믿고 음서(蔭敍)로 출사한 대귀족을 배격하고 철저한 실력 검증을 통해 발탁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대귀족의 횡포로 썩어가는 고려를 쇄신할 것이네. 나는 어제 장군의 의기(意氣)를 보고 무척 감명받았네. 바로 장군 같은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재야말로 차후 고려를 이끌어갈 동궁에게 꼭 필요한 인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장군은 곡주의 향리 출신이라 들었네.”

일정한 격에 다다르면 당파별로 영입 전쟁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대략 세 개의 무리로 나눌 수 있을까? 이자겸을 위시한 권문세족,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과거 출신의 신진 관료, 그 외 이쪽저쪽에 끼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는 윤관, 오연총, 유신 같은 이들.

“이번에 주상께서 장군에게 매우 감명받아 그 공을 높이 사기로 하셨다네. 동궁께서도 역시 장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흡족할 만한 포상을 내릴 수 있도록 힘을 쓰라고 내게 직접 명하셨지. 곧 사성(賜姓)과 종보(宗譜)를 허락받게 될 것이고, 이는 확실한 것이니 의심할 필요 없네.”

사성은 임금이 공신에게 직접 성을 하사하는 것이고, 종보는 족보의 가장 첫 단계로 종가(宗家)의 시작을 알렸다. 종보에서 분파하면 족보의 이름이 지보(支譜), 파보(派譜)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을 보면 종보라는 것은 한집안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해야 할 일이겠지만 오늘만 세 번째로 듣는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힘을 썼다고 하니 이건 웃어야 할 일인가?

한안인이 돌아가고 나는 고의화와 마주 앉았다. 고의화는 술을 벌컥 들이켜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으냐?”

나는 묵묵히 술을 들이켰다. 오늘 술을 엄청나게 마셨음에도 별로 취한 줄 몰랐다. 워낙 다채로운 일들을 겪어서 그런 것일까?

“주상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동궁에게도 충성을 약속하면 나에게 병부상서를 주겠다고 하더구나. 어려울 것이 있겠느냐? 시원스럽게 답을 주었지.”

“병부상서 자리가 탐이 나신겝니까?”

“그런 것으로 보이느냐?”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의화가 자리에 연연했다면 진작에 병부상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자리도 결코 낮은 자리는 아니었다. 고려의 중앙군 2군 6위 중 용호군(龍虎軍)의 상장군이니 말이다. 2군은 모두 왕 직속의 친위군 성격이 강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 역할이 조금 달라진다. 응양군이 호위군으로 방패의 역할이라면 용호군은 반란 진압 같은 직접적인 무력 투사를 맡았다. 그러니 그가 이끄는 용호군은 고려에서 가장 정예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연 회유도 많고 유혹도 많은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십 년 가까이 수장으로 머물고 있었다.

“내 나이도 어느덧 오십을 훌쩍 넘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슬슬 후사를 생각해야 할 때지.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한 바가 없다.”

“그것이 병부상서에 오르고자 하는 이유입니까?”

고의화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 뒷배를 봐주려면 병부상서의 자리가 필요하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신뢰인가? 그는 숙종이 자신에게 주문했던 역할을 이제는 나에게 맡기려는 것 같았다.

“한안인을 너무 믿지 마라. 그는 과거를 통해 입시(入侍)한 실력파이고 안하무인 한 권문세족을 개혁할 꿈을 꾸고 있지만, 그 자신 역시 행보는 권문세족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아비는 전 형부시랑(刑部侍郞) 한규로 개경부 일대에서는 그래도 손꼽히는 부호이고, 명문가와의 결합을 통해 권문세족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었지. 영광(靈光) 김가, 안성(安城) 이가, 경주(慶州) 이가, 청주(淸州) 김가, 정안(定安) 임가 등과 연대하여 기존의 권문세족을 누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적극적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음서가 대부분인 권문세족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에게 이끌린 자들이 대부분 빈한한 하급 관리들이 많은 것도 권문세족 타파라는 명분에 이끌렸기 때문인데 내가 생각할 때는 이용 만 당하고 버려질 운명이다.”

한안인에 대한 인식이 나와 같았다. ‘고의화가 이런 통찰력이 있을 줄이야.’ 나는 오늘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이들이 조정에 아직 산재해 있다. 단지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윤관이 그렇고 오연총이 그렇고 유신 대감이 그렇다. 나는 네가 앞으로 더 큰 곳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파당에 연연하여 권력을 쟁취하려는 노력보다 고려의 번영에 힘써 달라고 당부하는 것일까?

“그런 뜻에서 지금의 주상은 참으로 아까운 분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문종만큼만 제위에 계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의화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늘의 휘영청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숙종의 개혁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좌초되는 현실이 못내 안타까운 듯했다.

“이번에 열리는 장군방(將軍房) 회합에 너도 참가하거라.”

고려는 중방과 장군방이라는 무관들의 협의체가 있었다. 중방이 2군 6위의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정3품), 대장군(종3품) 16명이 안건을 의논하는 상위 기구라면, 장군방은 장군(정4품) 49명의 협의체로 중방의 하위 기구라고 할 수 있다.

협의체긴 하지만 주도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려의 실질적인 무력을 쥐고 있는 만큼 권문세족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쟁만큼이나 치열한 물밑 접촉을 벌였다.

“내가 중방을 쥐고 있으나 장군방은 음서로 출사한 권문세족의 입김이 거세다. 무과시(武科試)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안인이 무과시를 도입하고자 애를 쓰고 있지. 네가 한안인을 이용할 마음이 있다면 그 역시 네가 장군방의 중추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과 일색이었던 과거 시험에 무과가 등장한 것은 앞으로 5년 뒤인 1109년이다. 권문세족들이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그 사병을 이끌고 중앙군에 소속되는 일이 정례화되면서 폐해가 심해지자 그 세력을 억누르고자 무과시를 열게 되는 것이다. 이후 20년 정도 이어지던 무과시는 폐지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숭문언무(崇文堰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막는다.)였으니 취지가 무색한 결과였다.

“장군방의 일원 중 상당수는 중방에서 다시 보게 된다. 그러니 네가 그들을 주도할 수 있다면 고려 내부는 상당시간 평안할 것이다. 문신들의 정쟁이 어떻든 군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 않는다. 더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내가 죽기 전에 요의 동경(요양)으로 기보를 이끌고 입성하는 것이지.”

요나라에 대한 묵은 원한이 물씬 풍겼다.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 상상인지 뒷말에서는 웃음보가 터졌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정말……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진심으로.”

별무반 17만의 병력이 최대 3만으로 추정되는 여진의 공세를 불과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패주를 결심하게 한 것을 보면 그 병력의 질을 의심케 한다. 과연 권문세족이나 호족들이 자신들의 사병, 노비를 순순히 내놓았을까? 최대한 노약자를 보내고 건장한 자들은 숨길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민관이 일치되어 전력을 다했다면 이미 쇠락해가던 요나라를 대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름 5월(음력)에 왕은 천우위록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 준경이 그동안 세운 공을 칭찬하며 성을 내렸다. 교지(敎旨)에 이르길, ‘장군 준경은 여진을 상대로 믿지 못할 전공을 세웠고, 대국(요)을 상대로 왕의 위신을 지켰다. 이에 척(拓)을 사성하여 신민의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장군 준경과 부(父), 위공(謂恭), 아우, 준신(俊臣)이 감읍하였다. 위공은 검교장군(檢校將軍, 명예직)을, 준신은 낭장(?將)을 제수받았다.

한림원의 대표로 김부식이 나와 제신들에게 척이란 성을 왕이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 김부식과 잠시 눈이 마주쳤었다. 그의 눈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기도 전에 김부식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척은 제방 변에 돌 석 자의 합자로 제방 변은 손 수가 변으로 쓰일 때의 자형이므로 손으로 돌을 잡고 던진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거친 땅을 일구는 행위를 우리는 개척(開拓)이라 하는데 왕께서 장군에게 바라는 바가 그와 같습니다.”

척은 줍다와 던지다의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는 한자 단어다. 손에 잡으면 놓거나 던지는 것이 이치이므로 왕좌를 얻더라도 결국은 놓게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즉, 보위에 욕심내지 말고 왕에게 충성하라는 뜻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뜻도 있지.’

척은 확장의 의미로도 쓰인다. 개척이란 단어가 바로 그런 뜻을 대표적으로 가지고 있다. 문제는 개척이란 단어의 양면성이다. 개척은 미개척지를 일군다는 뜻도 있지만, 정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예를 들어보면 그들이 서부 개척 시대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영국이 인도에 차 농장을 개척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에 고무농장을 개척했다는 치적은 승리자의 역사이지 현지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 식민지의 주민에게도 척은 통용된다. 돌을 주워 던진다는 의미로 ‘투척’이란 단어를 쓰게 된다면 항거의 뜻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척이란 성을 받으면서 참으로 복잡미묘했다. 숙종으로서는 왕의 검이 되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또 다른 의미의 정복자가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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