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6 (11) 운로(雲路) =========================================================================
술이 다시 몇 순배 돌고 내 얼굴에도 취기가 얼추 오를 때쯤 이자겸의 목소리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모임의 본론이 나올 모양이었다.
“빈궁(嬪宮)의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빈궁이면 태자빈이다. 숙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예종의 아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인주 이씨 출신이기도 하고 남편 예종과 친사촌이기도 했다. 그만큼 왕실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근친혼으로 말미암은 부작용이 상당했다. 자식을 낳아도 해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 빈번했고, 유산도 많았다. 그래서 숙종이 즉위하자 근친혼을 금지했던 것인데 예종이 다시 답습하게 된 것은 인주 이씨의 힘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이자겸이 내게 불치병에 걸린 큰딸을 주겠다고 한 약속이 생각났다. 그녀의 이른 죽음 역시 근친의 부작용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자겸이 운을 떼자 내의 최사전이 뒤를 받았다.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병이 깊어 서른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왕실에서 귀한 약재를 골라 꾸준히 장복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녀는 31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다. 그때가 예종 5년이니 앞으로 대략 6년 정도 남은 셈이다.
“더구나 주상께서도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라 빈궁의 후사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시급한 일입니다.”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는 것은 경화왕후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바로 결정되었다. 그만큼 임금의 배우자는 한시도 비워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하필 별무반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하나씩 잃기 시작하는 때로 화친파 중신들이 그것 보라며 대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무반에게 시간을 주고자 화친파에게 대가처럼 내건 것이 이자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예종과 화친파 모두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통해 성사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일이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오늘의 이 자리에서부터 말이다.
“빈궁의 일이야 이미 예전부터 약조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시급한 것은 주상께서 남경을 건도(建都)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중론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김인존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 모임이 마치 조선의 당파를 보는 것 같았다. 첨예한 정쟁을 논하며 중론을 모으고 있었다. 합의한 중론에 힘을 모아 국정 운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것은 좋거나 나쁘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나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쟁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
이때 이자겸이 나를 자신의 곁으로 잡아끌더니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토론에 나도 의견을 내보라는 뜻일 것이다. 한 편인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태도였다.
“종종 국정에 대해 뜻을 모으고자 모임을 한다. 오늘의 안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그중 내 딸을 차기 빈궁으로 삼는 것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두 번째가 개경을 대신해 남경을 도읍으로 삼는 일에 대한 것, 셋째는 주상께서 추진하는 북벌에 대한 찬반이다.”
확실히 현재 가장 주요한 쟁점이긴 했다.
이자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사전이 발언했다.
“아까도 지우 분들에게 잠깐 말씀드렸지만, 남경 천도에 대한 전라도의 생각은 반대입니다.”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전라도라는 말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전라도 대다수 문벌 귀족이 반대한다는 밀이다. 나는 이들이 찬성 측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인 반대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론을 모아 반대하려는 움직임이 아닌가?
“경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김경용이 술을 털어 넣으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명주(溟州)를 포함한 동남면(東南面) 역시 그 뜻은 같소이다.”
이자겸은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건배를 제의했다. 나는 돌아가는 사정을 잠자코 더 지켜보았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나는 이들이 남경 천도를 반대하는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예측이 전혀 어긋났음을 알게 되었다.
숙종 때부터 토지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대지주의 힘이 강화되기 시작했는데 예종 때는 더 심해져서 ‘자기 땅을 빼앗기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유리(流離)하여 도망치는 백성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열에 아홉 집은 비었다.’라고 당시의 실상을 기록했을 정도다. 횡포를 알리기 위한 과장된 기록으로 보지만 문종 이후 점차 고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쇠락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숙종이 남경으로 천도하는 까닭이 바로 이 점에 있었다. 풍수지리에 심취하여 도성을 옮길 결심을 했다고 비웃었는데 이들의 말을 계속 들어보니 숙종은 즉위 초 실시한 화폐 개혁을 전국적으로 뿌리내리고 남도에서 자행되는 대지주의 횡포를 적극적으로 저지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화폐 제도의 변천은 이렇다. 숙종의 아우인 의천 대사가 송에서 유학한 경험을 살려 1097년부터 은병과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도록 했는데 화폐 단위를 처음부터 너무 비싸게 만들어 놓은 탓에 일반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화폐를 귀금속으로 치부하여 큰 거래나 공비(公費), 또는 뇌물의 목적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특히 뇌물의 목적으로 쓰이게 되면서 화폐가 유통되지 않고 독점되는 현상을 만들어낸 탓에 그 주범으로 꼽히는 남도의 귀족들을 감시할 필요성을 숙종이 느꼈다는 것이다.
북방이 소란스러웠을 때도 워낙 평화로웠던 남도라 귀족들에게 있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는 때이기도 했다. 남경 천도를 하게 되면 귀족들이 남경에 저택을 구매할 것은 불문가지다. 궁전에서 가까운 위치에 저택을 설립할 수 있도록 왕이 지정해줄 수 있는 권한을 휘두를 수 있게 되면 왕권도 살아나는 효과가 있고, 막대한 재정이 남경으로 몰리면서 경제 활성화의 효과도 기대하게 된다.
더구나 별무반의 구성을 보면 북벌의 기대감 외에도 남도 귀족들의 억제를 목적으로 하는 정책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말을 가진 자는 양민, 노비, 향리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신기군(神騎軍)으로 배속하고,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죄다 신보군(神步軍)으로 배속시켜버렸다. 사찰의 사병이라 할 수 있는 수원승도(隨院僧徒)는 항마군으로 만들어서 모두 합쳐 17만의 대병력이 되었고, 그것은 당시 고려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전력으로 그들을 졸지에 빼앗기게 된 대지주와 사찰의 불만이 어떨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17만의 병력을 손아귀에 쥔 왕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북벌과 남경 천도는 광종의 노비안검법 못지않은 왕권 강화책이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려는 방안이 바로 이 자리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역적모의에 끼어 있는 기분이 이럴까?
“수태보(守太保)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김인존이 김경용에게 물었다. 가파르게 승진 가도를 달리던 김인존은 숙종에게 직언했다가 미움을 사서 잠시 외직(外職)을 맡은 시기였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중신인 김경용이 내밀한 사정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수태보는 이자겸의 장인인 최사추인데 올해 들어 그는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시켜달라고 숙종에게 간청하는 형편이었다.
“근자에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표문을 올리셨으나 문하시랑 위계정(魏繼廷)이 전하께 소를 올려 사직을 막았소. 어른의 뜻이 확고하니 조정에 계실 날도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소. 각설하고 어제 수태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고려의 뿌리는 개경이니 남경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서경과 같은 지위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신 것을 보면 어르신도 남경 천도는 그리 탐탁지 않은 눈치였소.”
“그러나 전하의 뜻이 정해지면 그대로 따르실 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이 최사추가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전하께서 전주목사 오연총을 일 년 만에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으로 임명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소? 추밀원사 윤관과 함께 귀족들을 옥죄겠다는 포고(布告)가 아니겠소?”
숙종의 시험이었든 아니었든 1년만으로 그 사람의 정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너그럽고 공정하게 처리하여 평판이 좋았다는 기록이 남은 것을 보면 의도적이라고 봐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남부에서도 부유한 편에 속하는 전주목사를 지내면서 실태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오늘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경 천도가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설명하고 있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요. 주상은 광종의 실패를 답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껏 북벌과 남경 천도를 따로 생각했던 만큼 막상 연루되고 보니 이렇게까지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이자겸은 내게 술을 직접 따라주며 말했다.
“어제 너의 신위는 참으로 대단했다. 주상께서 요나라를 대하는 자신감이 남달라 지셨다. 북벌을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확약만 있다면 우리도 북벌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요나라의 횡포가 심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자겸까지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말없이 잔을 받고 술을 마시자 김경용이 격앙되었던 분위기를 전환하려는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우리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자네의 얼굴까지 굳어 있을 필요는 없네. 일찍이 신라 시대부터 이 땅은 귀족이 나라의 주인이었네. 지금의 주상도 따지고 보면 화백을 통해 선출한 왕이나 다를 것이 없지. 그렇다고 우리가 충성심이 없음을 의심하지는 말게. 혼란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이지.”
한 마디로 지금의 상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원한다는 말이었다. 우스개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자라는 말이 있다. 부자 중에 보수적인 인물이 많은 것도 지금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계속 안정된 정체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개혁, 혁신이란 단어는 권력자 대부분과 부자들에게 있어 손해로 점철된 혼란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턱대고 비난할 수 있지만, 그 처지인 사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나는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oennies)가 주창한 이익사회(利益社會)의 단면을 미리 여기서 보고 느끼는 셈이다.
이런 이익집단의 특징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남에게 희생하는 일이 없다. 무조건이라는 단어를 이들은 싫어한다. 반대급부가 있어야만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온전하게 이익만을 생각할 수 없기에 다른 사건에 따라 다른 행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대부분의 행동을 좌우하게 된다.
방법론을 두고 계속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옆에 자리하고 있던 기녀들은 이미 뒷전이었다. 나 역시 내 옆에 좌정하고 있는 기녀의 잔을 거의 받지 않고 묵묵히 혼자 따르거나 다른 사람의 잔을 받았을 정도니 말이다. 그럼에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기녀들이 대단할 정도였다.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자겸이 믿고 있다는 뜻일 것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경 천도는 무산시키고, 북벌은 동조합시다. 단, 북벌의 범위를 한정시켜 규모를 축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두 가지 모두를 가로막는다면 주상의 분노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규모를 축소해도 십만은 모이지 않겠소? 예전 사십만 대군을 상기하면 십만도 적다고 할 가능성이 크오. 만일 승리라도 거두게 된다면 민심이 주상에게 쏠릴 것이오. 주상은 이미 북벌을 통해 땅을 얻으면 남도의 소작농에게 줄 것을 약속했단 말이오.”
이들의 입에서 유리걸식하는 난민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표현이 무엇이건 소작농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에 이미 그들의 근심이 숨어 있었다. 병사 징발도 모자라 사찰과 대지주의 원천인 노동력이 일시에 빠지면 남은 백성을 놓고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소작농의 몸값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이자겸이 나를 이 자리에 참석시킨 이유를 알게 되었다.
“며칠 이내에 너에게 사람이 갈 것이다. 너에게 일가(一家)를 허락하는 사자이다. 성과 호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유신 같은 일반 신하뿐만 아니라 이자겸도 꽤 힘을 썼던 모양인지 목소리에는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시키는 것을 제대로 하라는 압박으로 여겨졌다.
지켜보던 이들은 내가 기뻐할 것이라 여겼는지 축하를 연발하며 건배 제의가 들어왔다. 그것은 내 옆에 가만히 앉아 미소만 짓던 기녀도 마찬가지였다. 기녀는 술을 따라주며 내 귓가에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일가를 세울 수 있도록 성과 호적을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별로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육감이란 것은 대단한 모양이다. 단번에 내 웃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귓가에 대고 말한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귓가에 나도 속삭였다. 그것을 보며 ‘장군도 역시 남자군.’이라며 김경용이 호탕하게 웃었다. 누가 보아도 여자를 품에 안는 모양새였으니 당연했다.
“꽃이 하나 생각나는구나.”
그녀에게는 자신의 말과 상관없는 뜬금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가 말한 이름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격론이 치열해지고 술이 상당량 들어가자 까먹은 상태였고 알고 싶은 생각도 사실 없었다.
“배꽃(梨花)이다.”
지금은 배꽃이 흐드러지게 필 시기다. 주어를 붙이지 않았건만 그녀는 자신을 지칭한다고 여겼는지 배꽃을 닮았다는 말에 무척 기뻐했다.
“풍류를 모르는 목석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여심을 잘 아시는 분이시군요. 배꽃이라니 참으로 듣기 기꺼운 칭찬입니다.”
일부러 주변에 들으라는 듯이 외쳤기에 내실은 때아닌 꽃 이름 지어주기 열풍에 휩싸였다. 기녀들이 저마다 상대방에게 자신 역시 닮은 꽃이 무엇이냐 물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사이 나는 한 마디를 더 던지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아는 배꽃은 환상(幻想)이다.”
그녀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이내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의 뜻을 기녀와 지내는 것이 부질없는 환상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이화라고 불리는 배꽃은 현대에서 온화한 사랑과 순결을 뜻하지만, 고대의 시인들은 배꽃의 수태(樹態)가 애련(哀憐)하다는 표정을 자주 쓰곤 했다. 그래서 하얗고 가녀린 여성에게 주는 애칭처럼 되어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게는 고려말 문신 이조년의 이화월백(梨花月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배꽃이 밤에 더 밝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환상적이라는 의미로 적은 시구지만 나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환상이나 다를 바 없다는 속내였다.
“시기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북벌은 언제든 실행될 것이다. 주상의 생각이 확고하고 동궁 역시 그러하다. 이제 너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를 알겠느냐?”
내가 남경 천도에 대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것은 이들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이고 결국 나와 관련된 것은 북벌밖에 없다.
“북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상(今上, 숙종) 하에서의 북벌은 결코 성공해서는 아니 된다.”
이자겸의 어투는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