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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85화 (85/257)

00085  (11) 운로(雲路)  =========================================================================

“그 흥왕사의 승려분 외에도 아국에는 바둑의 고수가 많지 않습니까? 더구나 국가 간에 자존심을 겨루는 것도 아니니 국치라는 단어를 가볍게 올릴 만큼의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기우가 아닐는지요.”

“예성강곡(禮成江曲)을 아는가?”

유신이 예성강곡을 말하는 것이 이채로웠다. 예성강곡은 고려가사(高麗歌詞) 중 유명한 편에 속하지만,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유래와 내용만 전해진다. 예성강곡이 기록된 시기는 조선 세종 때인데 그전부터 속요(俗謠)로 구전되는 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사의 내용이 실로 범상치 않다.

고려 초, 벽란도와 예성강 일대를 무대로 교역하던 당나라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여 수소문하니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만세를 부르게 되는데 그 역시 바둑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우연을 가장한 내기 바둑을 여러 판 져주면서 적잖은 재물을 남편에게 선사하자 재물이 욕심이 난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하두강의 막대한 부를 놓고 바둑을 두자고 했고, 하두강은 본색을 드러내 그 판을 단숨에 승리한다. 남편은 속은 것을 알고 땅을 쳤으나 하두강은 이미 아내를 데리고 당나라로 출항한 뒤였다.

‘만약 여기까지가 내용의 끝이었다면 아무리 남편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내용이라 해도 백성의 정서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취할 생각에 부풀어 있던 하두강이었지만 배가 일정 바다 안에서 맴돌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 기이한 현상에 애가 탄다. 선원들이 말하길 ‘부정한 방법으로 절세미인을 취했으니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큰 화가 있을 징조입니다.’라고 간하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남편에게 돌려보냈다.

어떤 이들은 배가 맴돈 기이한 현상이 당시 고려 수군의 압도적 강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남편이 사실은 벽란도의 조세를 담당하는 관리였고, 고려 전선이 출진하여 당나라 선박을 압수 수색하여 부인을 구출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었나 믿고 싶어질 정도로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본 고려 수군은 비잔틴이나 셀주크 제국의 해군을 모두 모아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건했다.

“두 편으로 이루어진 예성강곡은 후편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무사히 돌아감으로써 기쁨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삼국 시대부터 고유하게 이어져 온 우리의 바둑이 전투에 강하고 포석에 익숙하지 못한 약점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 그래서 당식으로 그들을 꺾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였고, 삼 년 전 도강, 주송이 내조하였을 때도 당식으로 그를 꺾고자 나섰다가 여러 기재(棋才)들이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승리를 따냈던 흥왕사의 친우는 그로부터 일 년 뒤에 천수를 다한지라 죽은 그를 다시 불러올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유망한 인재들과 틈틈이 바둑을 두며 그들의 기력(棋力)을 끌어올리려 애썼지.”

확실히 우리나라의 순장바둑과 당식은 포석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미리 두는 돌의 개수가 근 열 개 이상 차이가 나니 바둑의 판세를 근본적으로 진단하는 시야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포석 싸움이란 말인데.’

전투에 강한 고려 바둑이니 귀 화점에 깔고 시작하는 넉 점 이후의 포석을 최소한 순장바둑을 시작할 정도인 십삼 수 이후까지 비등하게 끌고 가야 이긴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실력이 비슷할 때를 전제로 한 것이다. 내가 현대에서 유명하다는 포석은 제법 흉내 낼 수 있지만, 그 수를 끝까지 이끌고 갈 수 있는 역량이 없는 것과 같다.

내가 잠시 포석에 대한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 유신은 꽤 기꺼웠던 모양이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신의 표정이 흐뭇함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일면에는 불안감도 숨어 있었다.

“오늘은 물러가도 좋네. 장군을 찾는 사람이 있는 듯 하이.”

사립문 너머로 건장하게 생긴 하인이 흠칫흠칫 이곳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나를 찾을 만한 인물은 이자겸 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유신 역시 이자겸일 것이라고 확신한 모양이다.

“장군이 무엇 때문에 이자겸 같은 자와 계속 어울리는지 모르겠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 네 글자를 가슴에 묻어두고 깊이 고민하도록 하게. 출세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도를 알려줄 수 있네.”

마치 조손 간에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나는 유신에게 깊숙이 읍을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약속드리건대 결코 사욕을 바라고 가까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그의 표정은 흠칫 놀라고 있었다. 솔직하게 흉금을 털어놓은 것이 놀라웠던 것일까? 내가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개월 살지 못할 충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흠칫한 표정을 거두고는 따뜻하게 달아오른 대청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그 흉금이 참으로 궁금하지만 참도록 하지. 이자겸, 그자를 가까이하는 이유가 사욕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선물이구먼.”

나는 몸을 일으켜 사립문을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자가 다가왔다.

“대감께서 찾으십니다.”

예상대로였다. 아마도 어제의 일을 축하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인가? 나는 그를 따라 이자겸의 저택으로 향했다.

안내자는 내가 보통 이자겸을 면담했던 본채가 아니라 본채 뒤에 자리한 별채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별채 입구에 다가가자 시끄러운 말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 목소리는 익히 들어본 목소리였다.

“하하하! 이제야 왔구먼. 어서 오시게.”

실내에는 모두 아홉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 넷에 여자 다섯이었는데 여자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분을 바르고 치장한 것으로 보아 여염집 규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기생일 것이다.

고려 시대의 기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노비에서 파생된 기생이고, 다른 하나는 몰락한 양반가나 역적가문이 되어 기생이 되는 경우였다. 개경이나 서경 같은 대도시의 양반들은 당연히 노비 출신의 기생보다 교양있는 양반 출신의 기생을 선호했다. 게다가 이자겸이 직접 은밀하게 주관하는 자리니 신경 써서 고른 것을 방증하는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나는 남자들의 면면 역시 살폈다. 이자겸과 김경용이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두 명의 중년인은 연회 때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었다.

내가 좌석에 앉자 이자겸이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좌복야가 너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이자겸은 술이 올랐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바둑 건에 대해서만 대강의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흥미가 돋는지 귀를 기울였다.

“좌복야의 바둑 실력은 중신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인데 그런 좌복야도 긴장해야 할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고수인가 봅니다.”

잘 다듬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말했다. 내 변명을 수긍했는지 이자겸은 손뼉을 쳤고, 다른 이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이쪽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다. 장차 태의(太醫) 자리는 이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

최사전은 이자겸의 칭찬이 조금 민망스러운지 헛기침을 해댔다. 최사전과 이자겸의 관계는 은원이 뒤섞인 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종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예종은 등창을 앓고 있었는데 당시 어의였던 최사전은 사소한 종기로 판단하여 치료 시기를 놓쳤다가 예종 죽음의 빌미를 만들게 된다. 당연히 신하들이 들고일어나서 그를 탄핵하게 되는데 그는 살아남기 위해 이자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최소한의 징계로 끝나게 되는데 자신을 징계로 몰고 간 중신이 좋게 보일 턱이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중신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거짓 증인이 되어 이자겸의 권력을 공고히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만 보면 악인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자겸이 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왕의 편에 서서 이자겸과 대립하게 된다. 척준경이 마음을 고쳐먹도록 설득한 것도 바로 최사전이었다.

어찌 보면 그때그때 시류에 영합한 인물은 아닐까 하는 평가를 하게 된다. 아들들에게 선물로 금잔을 내릴 정도로 재력가였고, 첩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지니 말이다.

이자겸은 남은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 자리에서 가장 선비답게 생긴 인물이었다.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김인존(金仁存) 대감이시다. 사적으로는 내게 손위처남이 된다.”

김인존의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는 김경용과 마찬가지로 신라 종실의 피를 타고난 몸이었다. 선덕왕 사후(785년) 벌어진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근 200년 이상을 강릉에서 터 잡고 살아온 탓에 이제는 명주(강릉) 김씨로 불리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시점이었다.

그는 김경용에 비하면 천생 유학자였던지라 요와 송의 사신으로 자주 다녔고, 예종이 동궁이던 시절에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그는 이자겸의 탐욕스러움을 경계하여 이자겸이 권력을 쥐고 있던 시기는 자진해서 낙향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 이야기고 지금은 이자겸과 의기투합하고 있을 때다.

바로 동여진의 처리 문제 때문이다.

숙종과 예종이 별무반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었다. 최사추와 김인존, 이자겸 등이 반대 여론을 주도했는데 여진을 치면 거란에 허점을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요나라는 여진을 아우르기 위해 자국의 작위를 남발했고, 동여진 추장들 대부분이 그런 작위를 가지고 있으니 비록 허울뿐인 작위이기는 하나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요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같으니 요나라와 여진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경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진과 화친하고 차라리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낫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금나라가 발흥하여 요나라를 압록강 이북으로 모두 몰아내자 예종은 김인존의 뜻을 받아들여 그를 북계 군부의 수장으로 삼고 압록강 이남의 영토를 수습하도록 한다.

재미있는 것은 금나라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수방관했다는 것인데, 이자겸이 금나라에게 유화 정책을 쓴 것도 있었고, 척준경에게 호되게 당했던 기억도 한몫했을 것이다.

‘인주 이씨에 경주 김씨, 강릉 김씨, 강진 최씨라. 하나같이 지방의 거족들이군.’

이자겸을 반대했던 세력은 대부분 과거나 왕의 신임을 통해 중앙 관직에 진출한 신흥 중소 귀족들이었다. 예종 때까지는 그 대립이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인종이 즉위한 다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해서 결국 최사전의 무고로 몇몇 거대 귀족을 제외한 신흥 문벌 귀족들이 일소 당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곧 거대 귀족의 권력이 더 비대해졌음을 알리는 것이고 무신의 난이 일어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제 장군의 신위는 똑똑히 보았소. 연회에 참가하여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업무가 바빠 그리하지 못했소이다. 다행히 대감의 배려로 오늘 장군을 보게 되어 매우 기분이 좋소이다.”

최사전은 제법 길게 반가움을 표시했고, 김인존은 비교적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동안 바둑 이야기가 주를 이었다. 김인존이 이야기를 주도했는데 나와 인사를 짤막하게 나눈 것도 바둑 이야기를 빨리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네 사람 다 유신과 달리 송과의 바둑 대결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송과 고려의 바둑 방식이 다른데 어찌 고하를 가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바둑은 놀이일 뿐이지 속인(俗人)과 가볍게 둔 바둑의 승패가 국가의 치욕을 가늠한다면 백제의 개로왕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견해였다. 생각지도 못한 실리적인 견해라 어쩐지 이들이 다시 보였다.

“기록된 기보가 문제라면 매수(買收)하면 그뿐이다.”

“부유한 송상(宋商)일 뿐 아니라 무예까지 익힌 자들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으니 정당한 실력으로 이기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만약의 이야기지만 바둑을 지기라도 하면 준경 너를 시켜 기보를 빼앗으려는 속셈인지도 모르지. 아무리 중원에서 날고기는 무인이라도 준경 너만 하겠느냐?”

요나라가 고르고 고른 장사들을 패대기친 것이 정말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김경용은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술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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