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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84화 (84/257)

00084  (11) 운로(雲路)  =========================================================================

대외적으로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요의 사신이 고려를 찾아온 것과 고려가 요로 답방을 간 것이 합해 네 차례에 이른다. 두 달 사이에 두 번씩 왔다갔다 한 것이다. 요의 사신이 방문하여 책봉에 대한 축하와 숙종의 얼마 남지 않은 생신을 축하했다. 그리고는 책봉 감사의 사절과 황제의 탄신절, 신년 축하, 정기 공물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날짜들이 모두 한 시기 몰려 있었다. 숙종은 할 수 없이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게 되는데 중신 다섯 명이 요가 요구한 각각의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지총연(智寵延)은 요 황제의 탄신절인 천흥절을 축하하는 사자였고, 문관(文冠)은 책봉을 감사하는 사자였으며, 최선(崔璿)은 숙종의 생신을 축하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김한공(金漢公)은 공물을 전달했고, 최덕개(崔德愷)는 신년의 시작을 요와 함께 축하하기 위한 사자였다.

하나로 처리하면 그만인 일을 번거롭게 예를 갖춘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대규모 사신단의 파견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밀진사(密進使) 김고(金沽)를 요로 파견했다는 것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밀진사는 말 그대로 국가 간에 은밀한 일을 협상하기 위한 사자인데 대부분의 역할은 후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만큼 책봉식 같은 행사를 통해 매년 후계가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신임을 받으며 점차 명분을 누적하는데 왕이 최후로 결심하고 통보 형식으로 은밀하게 보내는 사자가 밀진사이다.

숙종은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짐작했던 것일까?

밀진사가 고려로 돌아오고 난 후 요의 사신이 다시 한 차례 방문한다. 명분은 숙종의 생신에 맞춘 축하 사절이었지만 과연 그것뿐만이었을까?

그 직후부터 숙종의 움직임은 숨 가쁘게 변한다. 조정의 노신들이 상당수 물러나고 측근들이 대거 전면에 나선다. 사열을 통해 고려 국방의 현실을 점검했고, 윤관은 별무반 양성에 나섰다. 서경으로 외유해서 태조 왕건의 영정을 서경 궁전에 걸고,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요는 여진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고려를 이용해 여진을 견제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종 즉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과 어제 있었던 유신의 무례를 눈감아주겠다는 것 정도의 제안이라면 숙종도 이 기회를 활용해 고토를 회복하고 세력을 키워 요에 맞서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럴듯했지만 그래도 숙종이 적극적으로 나설 정황 증거로는 조금 부족한 듯싶었다.

‘요와 송에게 사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토를 회복하여 덩치를 키우는 것은 고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각 목적에 맞춰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면서 숙종은 고려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상황이 과거에도 비일비재했던 상황이다.’

어쩌면 내가 상황을 너무 복잡하게 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삼국지 시절의 모략에 익숙해져 있는 것일까? 사신단의 무례와 횡포만으로도 충분히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것이 어제 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볕이 참 따뜻하니 오늘은 대청에서 바둑두기 좋은 날씨로군. 장군은 바둑을 좀 두는가?”

국가에 대한 충정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바둑 이야기로 넘어가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유신의 언행으로 봤을 때 실없이 던진 제안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조금 둔다고 하자 그는 손수 세월의 향기가 고스란히 묻어난 때 묻은 바둑판과 돌을 챙겼다.

이 시대 바둑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즐기는 놀이였다. 강조가 요나라를 상대로 크게 패할 때, 바둑을 즐기다가 명령을 늦게 내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5대 국왕 경종은 사관이 실록에 적기를 바둑을 너무나 즐기는 바람에 신하를 멀리했다고 했다. 무신정권에서도 그 풍조는 이어져서 항쟁 중에도 장군들이 바둑을 즐겼고, 원나라에 굴복한 이후는 고려 바둑 고수를 대도(북경)로 파견해주기를 청하는 사신이 올 정도였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바둑 좋아하는 선임을 만나 소일거리로 바둑을 배웠는데 내가 선임돼서는 도통 바둑을 둘 줄 아는 후임이 없었고, 싫다는 사람 강제로 시키기도 뭐해서 묘수풀이 책을 보면서 홀로 돌을 놓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기억났다.

선을 가리기 전에 유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실력을 알아보려면 당식(唐式)이 좋겠지? 그리고 그냥 하면 허전하니 내기를 거세. 뭐라도 걸어야 재미있지 않겠는가?”

바둑은 한중일의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것도 그 나라의 국민성을 대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당식은 흑백 대각선 화점에 미리 네 개의 돌을 놓고 시작하는 방식이었고, 백이 선수를 쥔다. 우리나라의 고대 바둑은 흔히 순장바둑이라 하며 네 군데 귀와 변, 중앙 한복판에 돌까지 모두 17개의 돌을 미리 놓아 초장부터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도록 유도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순장바둑을 전해 받았지만 포석하는 돌의 숫자를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가더니 이내 하나의 돌도 미리 놓지 않고 시작하는 현대 바둑의 원형을 제시했다. 이 당시 일식 바둑은 국제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기였고, 당식이냐 고려식이냐의 구분을 통해 대국의 기풍이나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내기의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참 궁금했다. 그저 그런 내기라고 보기에는 유신이란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신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신은 일단 한 판을 두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승부는 비교적 쉽게 갈렸다. 바둑을 오랜만에 둔 것도 있었지만, 유신의 솜씨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을 잡고 구 점을 깔았는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의 구 점은 현대의 구 점과는 큰 차이가 난다. 네 귀의 화점을 양분한 상태에 시작하기 때문에 하수에게 더 유리했다.

나름대로 현대의 바둑이 고대와 비교하면 많이 발전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하긴 선임과 근 몇 개월 정도만을 대국하고 나머지는 묘수풀이로 혼자 놀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네. 장군의 역할을 다하기에도 바쁜데 바둑까지 잘 둔다면 그거야말로 근무 태만을 의심해야 할 테지. 그래도 중간마다 나도 생각지 못한 묘수가 있어 흥취가 있었네.”

바둑을 두어 판 둔 것이 전부인데 시간은 정오를 훌쩍 넘어갔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는 승부가 끝난 빈 반상에 흑백의 바둑돌을 하나씩 올려놓고는 방금 내가 진 바둑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바둑을 둘 때 상수(上手)가 쓰는 방법이 있네. 대형(隊形)을 피할 것.”

바둑 격언에서 많이 들어본 말이 유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지라 기분이 묘했다.

흔히 바둑에서 고수가 하수를 상대하는 방법으로 반상을 넓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대가 한 곳을 결정지으려 한다면 그것을 좁히기 위해 대형을 이루어봤자 그렇게 밀집한 특정한 지역이 하수의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하수의 판단능력을 높여주는 방법을 모두 배제하여 실수를 유도하면 이긴다는 것이다. 넓은 바둑을 두라는 말도 맥락을 함께한다.

어쩐지 나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충고로 들렸다.

그는 바둑돌로 하나의 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묘수풀이 문제로 보이는 진형이었다. 흑과 백이 합쳐 마흔 개 정도가 깔렸는데 백이 귀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흑이 막고 있는 형상이었다. 흑이 집요하게 백을 물고 늘어지자 백은 마치 두 마리의 뱀처럼 대형이 갈라지게 되는데 흑의 대응이 절묘하여 백은 어느 쪽에 두든 한쪽을 잃는 형상이었다.

‘진신두(鎭神頭)로구나.’

*2001년 9월 28일, 제6기 LG정유배 결승 2국(이창호 VS 최명훈) 참고

유신은 나에게 백돌 하나를 내밀었다. 백 돌 하나를 마음 내키는 곳에 놓아보라는 뜻이었다. 머리 하나를 살리면 머리 하나가 죽는 상황. 게다가 외통수에 가까워 하나의 머리를 살리더라도 대국을 이기기 어려운 형세였다. 그러나 초보 묘수풀이를 하면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이 바로 이런 외통수 형세에서 벗어나는 문제들이다. 실제 바둑보다 묘수풀이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안에 추리 요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슴없이 백 돌을 머리와 머리 사이를 갈라놓은 흑돌의 코앞에 내려놓았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두 개의 머리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느니 적의 공격 활로 하나를 자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나의 머리를 잃더라도 적의 공격 수단 역시 없어지는지라 결과적으로 내가 이득을 보게 되는 방법이었다.

내가 단숨에 돌을 놓자 유신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과연, 바둑을 함께 두면서 쉽다고 생각한 것은 오히려 피해 가고 남에게는 어려운 사활 진형을 쉽게 푸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홀로 바둑을 배운 덕인지 대국 경험이 적어서 그런 것 같군.”

근대 이전 기보들이 초보용으로 쓰이는 것이 현대 묘수풀이 집이었다. 유신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들에게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도 현대에는 잘 쓰지 않는 기초적인 문제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프로기사들에게 근대 이전의 기보를 묘수풀이 형태로 문제를 내보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맞췄다는 내용을 신문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문득 났다.

“이번에 장군이 세운 공이 크니 폐하께서 장군에게 일가(一家)를 허락하실 가능성이 크다. 장군의 본가가 곡주라고 했던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 속뜻을 알고 조금 놀랐다. 일가를 허락한다는 말은 성을 내리고 족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척준경이 곡산 척씨의 시조인데 그것은 그가 공을 세워 일가를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그 역사가 지금 나에게 되풀이되는 것과 같았다.

“곡주에서 장군의 혈육이 도성으로 오게 될 것이다. 장군이 동계로 가려면 대략 한 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사흘의 하루 정도는 나에게 시간을 할애해주게.”

곡주에 남아 있는 혈육은 아버지와 남동생 하나였다. 남동생은 나와 나이 차가 제법 나서 내가 곡주를 떠나올 당시 간신히 걷기 시작하던 아기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보다 내기의 대가로 사흘 중 하루를 내달라는 그의 뜻이 궁금했다.

“오늘 그대의 됨됨이를 보니 폐하와 추밀원사, 고 상장군이 그대를 주목한 까닭을 알 것 같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자겸 같은 자와 어울리는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유신은 내가 이자겸을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 앞으로 고려의 동량(棟梁)이 되어야 할 장군이 문하시랑(최사추)과 이부시랑(김경용) 중 어느 쪽인지 말이다.”

최사추는 이자겸의 장인이고, 김경용은 이자겸과 사돈이다. 그럼에도, 최사추는 이자겸의 잘못을 감싸지 않았고, 김경용은 이자겸과 공존했다.

그는 나를 감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왕에 대한 충심이라도 불어넣을 생각인가? 그런 데 이어진 그의 말에서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정지상과 윤언이(尹彦?)도 함께 할 것이네.”

정지상과 윤언이라니.

서경의 정지상이 지금 개경에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윤언이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니 더 놀라웠다. 남경천도를 반대하는 유신과 서경천도를 주장하던 정지상은 그 이상(理想)이 어울리는 편이라 동질감이 절로 느껴진다. 윤언이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의 아버지가 윤관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참 기이한 인연이기는 하다.

윤언이는 윤관의 막내아들로 지금쯤 열대여섯 정도가 되었을 시기다. 정지상과 친분이 두터웠고, 서경천도를 지지하는 견해를 취했지만, 고려를 뒤엎는 정변(政變)은 반대하는 견해가 확고하여 묘청이 정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도와 진압군으로 종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지상과 친하다는 이유로 김부식에게 좌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끝내는 개경으로 돌아와 고관의 자리를 꿰차게 되는데 파평 윤가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일 것이다.

유신은 무슨 속셈일까? 젊은 인재들에게 미래를 당부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바둑은 두면 둘수록 늘 것이고, 묘수풀이에 이해가 상당한 듯하니 서로 도움이 될 것이다.”

“저희에게 바둑을 가르치려 하십니까?”

설마 유신이 인재를 모아놓고 하려는 것이 바둑의 전수인가? 그런데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의 나를 향해 유신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남경천도를 막는 것도 시급한 문제지만 중신들이 알지 못하는 난제가 아직 하나 남아 있네. 난제라고 여기지 않는 자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칫 국치(國恥)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 급한 불부터 끄려는 터에 자네 같은 장사가 나타났으니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기억하기로 올해 긴장할 만한 사건은 요와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치가 될만한 일이라니?

“주송(周頌)이란 자를 아는가?”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럴걸세. 그는 송의 유명한 도강(都綱)일세.”

도강은 쉽게 말해 상인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벽란도를 통해 교역하는 송의 상인은 수백에 달했고, 그들은 지역과 이해(利害)에 따라 몇 개의 집단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 집단의 수장으로 국가 간 공무역의 직접적인 실행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스승이 이일민(李逸民)이지.

‘이일민!’

나는 내심 그 이름을 듣고 놀랐다. 망우청악집(忘憂淸樂集)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망우청악집은 가장 오래된 기보 모음집으로 생각해보니 바로 올해 완간되게 된다.

“이일민은 중원에서도 이름 높은 무예 고수이자 학자이기도 하다네. 하북에 삼절이 있다면 하남에 오은이 있는데 그 중 일인이라고 하더군. 무엇보다 그는 바둑을 무척 좋아해서 바둑의 고수라고 소문난 사람은 다 찾아다니면서 기보를 정리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고 하네. 그의 제자인 주송 역시 무예와 바둑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 삼 년 전에 벽란도에서 기행을 저지른 바가 있지. 인근에서 제법 바둑을 둔다는 사람들이 그에게 도전하여 번번이 패했는데 보다 못한 흥왕사의 한 승려가 나서서 그를 꺾었다. 그때 그가 화가 나서 숙소의 침상을 일장에 부순 것은 아직도 벽란도에 회자되고 있다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야사(野史)가 실록에 기록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8월경에 송의 도강(都綱) 주송(周頌) 등이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교역을 허락해주는 것에 대한 세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으면 어찌 알 수 있으랴.

“제자가 흥왕사 일개 승려에게 졌으니 스승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평생 기보를 모아 책으로 엮으려는 업적을 고려에서 방점(傍點) 찍기로 했다네. 그가 이기든 지든 그 기보는 고스란히 그가 엮을 책에 세세토록 남게 되겠지.”

“절대 져서는 아니 되겠군요.”

“사실 흥왕사의 승려는 내 지우로 나 역시 그에게 석 점을 깔고 바둑을 두어야 하는 처지였는데 나는 그 친구를 제외하고 지금껏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이일민과 주송의 내조(來朝)가 걱정스럽지 않겠느냐?”

졌다고 화가 나서 함부로 침상을 부술 정도라니 나 같은 사람을 옆에다 참관인으로 앉혀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삼절오은의 일인이라고 하나 요나라의 장사 이십 명을 홀로 눕힌 나 정도면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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