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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83화 (83/257)

00083  (11) 운로(雲路)  =========================================================================

다음 날이 되자 나는 서둘러 유신의 저택으로 나섰다. 고의화는 어제 술에 잔뜩 골았는지 혼자 다녀오라 하고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나는 유신의 저택으로 가면서 내가 말실수를 한 것이 있었는지를 찬찬히 살폈다. 책부원구의 경구를 하나 적어 달라고 한 것뿐이니 특별하게 책잡힐 일은 없었다. 어쩌면 이자겸과의 관계를 눈치채고 당부라도 하려는 것인가?

청렴과 근신의 상징답게 유신의 저택은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낯부끄러울 정도로 방 세 개의 초가가 전부였다. 담장마저 싸리로 되어 있어서 나는 흡사 시골에 내려온 것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조식을 방금 마쳤는지 유신은 양지바른 대청마루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내가 문밖에서 서성거리자 이내 손짓을 하며 불렀다.

내가 그의 이끌림에 대청마루에 앉자 금세 차 두 잔이 놓였다.

“아침은 자셨는가?”

“아직 전입니다만 배고프지는 않습니다.”

어제 워낙 술을 과하게 마신지라 아직도 속이 지끈거려서 배에 뭐가 들어갈 사정이 아니었다. 유신은 그런 내 속을 짐작했는지 차를 들며 조용히 웃었다.

“볕이 따뜻하구먼.”

대청마루를 반쯤 차지한 4월의 햇볕은 뜨겁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를 기분 좋게 선사해주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말없이 차를 반 잔쯤 마셨을까? 돌연 유신이 나에게 물었다.

“책부원구에는 외신부(外信部)가 있네.”

“중원의 역대 왕조가 조공 받은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이 아닙니까?”

이때 나는 차를 마저 마시고 있었던지라 유신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긴 그때 알았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별반 없었을 것이다. 내 잘못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맞네. 그중 책(冊) 964권에 보면 발해의 태조를 말갈의 군왕으로 적었다네. 고구려의 인물이 명명백백한데 어찌 말갈의 대조영이라 적을 수 있단 말인가? 책부원구를 선물로 받은 후 그 내용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었네. 그래서 우리는 책부원구의 내용 중 일부의 수정을 요구하기로 했지.”

책부원구 역시 중원의 시각에서 기록된 글이다 보니 주변국은 책봉을 받아야 하는 제후국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발해나 신라 모두 중원의 관직과 군왕을 겸직하는 형태로 책봉되었고, 지금 고려가 요에게 사대하는 것도 같은 방식의 연장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외교였으니 색다를 것도 없지만 용납할 수 없는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유신이 언급한 것처럼 대조영을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말갈의 우두머리로 묘사하는 것, 산동에서 제나라를 세운 고구려의 이정기 장군에게 당이 삼공의 벼슬을 임의로 내린 점을 유리하게 해석하여 그가 제나라를 세운 적이 없고 단지 반란군 토벌을 중앙에서 명받아 머물게 된 인물로 묘사했다. 오늘날 중국이 벌이는 동북공정과 별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바뀌지는 못했지.’

유신이 수명을 다해 졸한 것도 있었지만 여러 대외 상황들의 급변으로 책부원구의 교정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도 있었다. 고려사에 적혀 있기를 1151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교정하라는 왕명이 떨어지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저러나 그가 나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계속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식견을 시험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일까? 단순히 어제의 내가 책부원구를 언급한 것 때문에 일부러 집까지 불러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빙그레 웃더니 잠시 방으로 들어가 얼핏 보기에 두 글자가 쓰인 한지(韓紙)를 한 장 내 앞에 내려놓았다. 아, 한지가 아니라 고려지라고 해야 하려나? 신라 시대는 계림지라 불렸고, 고려시대는 고려지, 조선시대는 조선지라고 불렸으니 말이다.

“어제 약속한 선물일세.”

글자는 내용을 떠나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느껴질 만큼 생도감 있었다. 행서와 초서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종이를 뚫고 승천하려는 한 마리의 용이 꽈리를 틀고 있는 형상이라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충신(忠愼).”

감탄도 잠시 무심코 읽은 두 글자였다. 신(愼)이 진심, 성(成)의 뜻이 있으니 나라에 진심으로 충성하겠다는 뜻이 된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무난한 단어를 써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왠지 식은땀이 흘렀다. 유신이 졸하면서 시호(諡號)로 받은 것이 바로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잘 읽히지 않는가?

그는 내가 글자를 보며 멈칫하는 사이 질문을 던졌다.

“책부원구가 무슨 뜻인지 아는가?”

한문 그대로의 뜻이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책부(冊府)란 궁중의 장서각을 말함이고 원구(元龜)란 옛 중원에서 점치는 데 쓰인 거북을 말함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 지난 일을 비추어 귀감(龜鑑)이 될만한 글을 모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내 대답이 끝났음에도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상하게 내게는 그 미소가 불안하게 여겨졌다.

“자네는 내가 준 글귀대로 살 수 있겠는가?”

고려에 끝까지 충성하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속내를 들여다본 사람 같았다.

“왜 대답을 못하는가?”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근만근처럼 나를 짓눌렀다. 어느새 내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관직을 여러 해 전전하다 보니 보아야 할 것 못 보아야 할 것을 많이 겪었다네. 내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를 지내던 몇 년 전부터 남경건도(南京建都)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나는 혹시 이자겸과의 관계를 추궁할 줄 알았더니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나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당시 동지추밀원사면 현재의 추밀원사 윤관과 비견되는 숙종의 비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행적을 거쳤는지 대강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숙종과 윤관이 내 행적을 그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10년간 행적불명의 상태가 된다. 그는 그것을 의심하는 것일까?

남경건도는 서경천도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즉위내내 천재지변에 시달렸는데 때아닌 서리와 우박, 한해(旱害, 가뭄), 장마가 수시로 일어나면서 숙종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업보가 아니냐는 은밀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숙종에게 풍수가인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가 접근하여 기운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남경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자는 도참(圖讖)을 설파하게 되는데 숙종이 솔깃하게 말려든다. 그때 그가 내세운 도참서와 명분이 훗날 서경천도의 묘청이 내세운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신하 중에는 천도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자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담담하게 웃고 있는 유신이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는가?”

설명은 이제 시작이었지만 그는 내 대답을 듣기 전에는 침묵을 지킬 셈인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그것으로 답이 되겠습니까?”

충신이란 단어에 주어는 없었다. 유신에게 있어 충신이란 당연히 고려왕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내가 진실로 충성을 받쳐야 할 대상은.

‘아(我)가 모여 민(民)이 된다.’

아는 외고집을 뜻하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면 주체성이기도 하다. 주체적인 사고가 모여 선진 사회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충신이란 말을 지키겠다는 내 다짐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을 다짐하자 유신의 굳게 다문 입술이 열렸다.

“원구(元龜)인가? 원귀(元龜)인가?”

“똑같은 말이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구(龜)는 거북이를 뜻한다. 발음이 두 가지인데 귀 자로 발음되기도 한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쓰이는 발음이 있다. 예컨대 거북껍질을 귀갑(龜甲)이라고 하지 구갑이라고 하지 않는다. 부산 지명인 구포(龜浦)를 귀포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균 자 발음으로도 쓰이는데 균열(龜裂)이 대표적이다. 일단 지금의 질문은 균 자를 배제했으므로 구와 귀의 차이점만 생각하면 되는 셈이다.

“남경건도로 조정의 중신들은 둘로 나뉘어 있네. 그 둘을 가르는 문구가 바로 원구와 원귀일세. 원구는 남경으로 천도하길 바라는 신세력을 뜻함이고 원귀는 개경에 남기를 원하는 구세력을 지칭한다고 그러더군.”

이 말을 꺼내는 유신의 표정은 씁쓸함이 가득했다. 일개 도참설에 현혹되어 숙종이 고려의 뿌리인 개경을 버리고 남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섭섭한 듯했다. 내가 술자리에서 공교롭게도 책부원구를 발설한 것이 내가 신세력에 부화뇌동하는 무리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대놓고 면전에서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알고 그런 것인지 은연중에 영향을 받아 모르고 그런 것인지 알아보려고 한 의미가 강하다고 할 것이다.

김경용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남경천도파라는 말이 될까? 근거지인 경주와 가까워지는 것이 그에게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연결하다 보면 이자겸도 빠질 수가 없다. 인주 이씨의 기반은 인천이었으니 말이다.

“하늘에 맹세코 저는 모르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가 제법 강경하게 대답하자 이해했다는 듯이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네가 진실로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면 내가 부르지도 않았을걸세. 단지 상장군 고의화가 깊이 신뢰하는 자네가 어찌하여 원구를 말한 것인지 그 내력이 궁금했을 따름이지. 그리고 앞으로 상장군을 대신할 자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말일세.”

생각해보니 현대에서도 문헌마다 책부원구, 책부원귀 두 가지가 혼용되는 것을 떠올렸다. 보통은 책부원구라고 표기하는 비중이 더 크기에 나는 무의식에 이야기했지만 이런 사정이 지금 걸려 있는지 어찌 알았으랴.

잠시 머릿속을 정리해보니 숙종이 측근인 최사추와 윤관을 우두머리로 삼고 일관(日官) 문상(文象)과 춘관정(春官正) 음덕전(陰德全)을 실무자로 임명하여 현대의 서울 일대 중 도읍 후보지를 찾도록 하는데 경북궁 자리가 최적지로 꼽히게 된다.

나는 그들의 본관을 따져보았다. 최사추는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로 해주 최가다. 해주 수양산(首陽山) 아래 세거(世居, 대대로 오래 삼.)했고, 최충이 개경 송악산에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는 사학을 설립함으로써 명망 있는 인사들이 앞다투어 개경에 사학을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으니 개경 일대가 그들의 세력권인 셈이다. 최사추가 이자겸의 장인이기는 하나 젊은 시절의 이자겸은 자질이 빼어났다고 하니 이자겸이 자신의 사후 그토록 권력을 탐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최사추의 일대기를 살펴보아도 해동공자 최충의 명성을 먹칠하지 않기 위해 근실하고 청렴하게 살아서 조정에 40년 재임하는 동안 조그만 잘못도 없었다고 하니 이자겸과의 관계는 없다고 해도 좋았다.

윤관은 어떤가? 본가가 파평이니 개성이나 서울의 중간쯤은 되는 셈이다. 또한, 숙종의 최측근이니 숙종이 천도를 원한다면 그것을 따르는 처지일 것이다. 앞서 유신의 발언을 생각하니 그는 내가 고의화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나를 추천한 것이 윤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관이라면 숙종이 원한다면 충분히 천도에 찬성하는 견해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의화는? 고의화는 전주가 기반이고 숙종의 충복이다. 반대할 이유가 없을 텐데.’

남경천도는 서경천도와는 다르게 역사 속에서 미미하게 사라져버린다. 큰 정쟁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개경과 남경의 거리가 가까웠기에 서경천도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같은 편 중에서도 약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뜻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 서경천도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북벌이 아니었던가? 문신인 윤관으로서는 이번에 여진과 맞서 싸우면서 도성을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무신인 고의화는 북벌을 위해서라도 개경 이남으로의 천도를 반대했을 수도 있었겠군.’

내 추리가 얼추 맞을 것 같았다. 윤관이 별무반을 주장하는 시기는 패전 직후가 아니라 남경천도가 무산된 올해 말쯤이니 말이다.

‘일관 문상은 직책상 풍수사나 다름없으니 위위승동정 김위제와 뜻을 같이할 것이 분명하고, 춘관정 음덕전도 직책과 출신을 생각하면 천도 쪽이겠군.’

음덕전의 시조는 음원보(陰元輔)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공신록에 기록된 인물이다. 그러나 점차 몰락하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천문(天文)과 상지(相地, 땅의 길흉을 판단)를 관측하는 종5품 춘관정이 가장 출세한 직책이 되었다. 고려가 안정되면서 가문의 성세가 그대로 굳어지자 뒤바꿀 마음을 품기 충분하다.

“좌전(左傳)에 이르길 소공(昭公) 25년에, 장회(臧會)가 누구(?句, 거북의 별칭)를 훔쳐 점을 치면서, ‘누구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라고 했다. 아국이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 상무(尙武)를 나라의 기틀로 삼은 것은 언제고 고구려의 옛땅을 모두 수복하는 것을 국시(國是)로 삼고 있기 때문이거늘 도읍을 남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덮어놓고 따르는 그릇된 충정과 돌아올 사익(私益)에 급급해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신하들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제 천수가 얼마 남지 않은 노신의 탄식이 애처로웠다. 장회는 노나라의 대부로 장소백(臧昭伯)의 거북이 신통하다고 하여 몰래 훔쳐서 거북점을 쳤는데 점괘가 흉하면 길할 때까지 계속 점을 쳐서 길이 나오면 기뻐했다. 이것은 김위제 등이 주장하는 도참설의 무익함을 꼬집는 말과 다름없었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면 숙종이 패배에 화가 나서 별무반을 급작스럽게 명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이 북벌을 결심한 것은 윤관의 패배 이후 근 일 년이 흐른 뒤였다.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남경천도가 무위로 돌아간다.

계속된 천재지변과 과거 보위에 오르기 위한 혈사(血事)에 대한 후회로 마음이 약해져 가던 그를 다독거리게 된 계기가 있다는 것이다. 윤관이야 숙종이 명하면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니 숙종이 마음을 고쳐먹으면 윤관도 돌아서게 될 것이고 북벌에 대한 대책으로 별무반에 대한 건의를 꺼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문제는 그 계기가 어떤 것인지 실록에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짐작해볼 수 있는 내용은 있다.’

-8월 신해일에 왕은 남경에 이르러 누대와 정자와 원유(園?)를 유람하였다. 모든 일은 다 일관(日官)이 아뢴 바에 따랐기 때문에 예법이 맞지 않았으나, 유사(有司)로 말하는 자가 없었다. 겨울 10월 신해일에 왕이 환궁했다.

숙종이 일관의 말을 따랐다는 것은 풍수지리에 빠져 있다는 뜻을 방증한다. 예법이 맞지 않았으나 따르는 신하들이 지적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확고한 반대를 표명하여 실록에까지 기록을 남긴 유신이 이미 7월에 죽기 때문이다.

‘10월에 왕이 환궁한 후 12월에 윤관이 별무반을 건의한다. 그렇다면 두 달 만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숙종이 이듬해에 죽음을 맞이하는 데 서경(평양)을 순행한 후 귀환 도중이다. 남경천도를 생각했던 사람이 몸도 성치 않으면서 서경을 다녀올 생각을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두 달 사이에 숙종이 마음을 돌릴만한 사건.’

생각해보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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