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11) 운로(雲路) =========================================================================
안다.
나는 문득 칭기즈칸과 자무카가 떠올랐다. 안다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기에 그럴 것이다. 안다는 삼국지의 도원결의에 흔히 비유되는데 의형제라는 개념도 있지만 수렵 민족의 특성상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전우(戰友)의 역할이 더 컸다.
직계 황족은 아니지만 내게 안다를 청한다는 것은 생사를 같이할 전우를 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으로 담보한다. 내게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지만, 악수(惡手)일 수도 있었다. 아직 태동하기 전인 금나라는 그렇다 쳐도 요나라는 적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하나 더 있었고, 그것이 거절할 생각을 굳힌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야율대석보다 바야르와 칼둔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안다를 맺자는 것은 최상의 예의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일개 고려 장군이 거부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야율대석은 피식 웃었다. 김이 잔뜩 빠진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내 자존심을 철저하게 뭉개는군. 내가 실력이 없어서인가?”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거절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겠는가?”
야율대석의 인내는 무척 흔하게 평가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인재라고 생각하면 예의를 다하는 것이 그의 장점인지도 모르겠다.
“저는 남이 베푸는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 손으로도 충분히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가 안다를 제의한 것이다.”
“그럼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인가 봅니다. 지금 대인의 행동은 ‘안다’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너커르’를 얻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만약 문장부호로 야율대석의 표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느낌표가 어울렸을 것이다. 안다도 너커르도 동지, 전우 등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안다가 사적인 부분까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친구로서의 개념이 강하다면 너커르는 공적 목표를 함께 달성하기 위해 움직이는 동지, 부하에 가까웠다. 칭기즈칸의 부하 중 제베가 대표적인 너커르가 아니던가? 본명인 지르고가타이를 버리고 화살촉이라는 뜻을 가진 제베란 이름으로 바꿔 맹활약했다. 제베는 뛰어났지만, 누구도 그를 칭기즈칸과 동격으로 보지 않았다.
“나를 안다로 삼고자 하는 것이 나의 실력 때문이라면 그거야말로 대인의 오산입니다. 안다는 마음이 통하는 자이지 실력이 뛰어난 자를 밑에 두고자 남발하는 흔한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신형을 돌렸다.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고의화의 어깨를 툭 치며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고의화와 거하게 한 잔 걸칠 생각이었다. 김경용이 워낙 맛깔스럽게 술을 먹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야율대석은 나를 잡지 않았다. 그는 내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악의일까? 아니면 깨달음을 얻어 다시 내 앞에 설 것인가?
연회장에 도착하자 마침 나를 찾고 있었는지 여기저기서 나에게 잘했다는 덕담을 남겼다. 고의화와 술을 한 잔 들기도 전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이름만 알고 있던 관리들의 면면을 대부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숙종의 부름을 받고 고의화와 함께 달려갔다. 연회장 맨 안쪽이었는데 삼엄한 경비의 벽을 지나자 숙종과 태자를 비롯하여 십여 명의 중신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김경용도 끼어 있었다.
“하하하, 오늘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였도다. 이리 가까이 와서 과인의 잔을 받아라.”
고의화에 이어 숙종이 따라주는 어주를 직접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삼국지 시절에도 헌제나 원술 등이 따라주는 술을 마셔보았지만, 고려의 왕이 따라주는 술은 더 감명 깊게 느껴졌다. 단숨에 술을 들이켜자 숙종은 두 잔을 더 따라주어 석 잔을 연거푸 마신 셈이 되었다. 술맛보다도 나는 이 술이 가진 의미가 더 짜릿했다.
‘양온주(良?酒)를 마시는 날이 올 줄이야.’
고려 문종은 양온서(良?署)라는 관청을 정식으로 만들었었다. 양온서는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맡은 임무는 국가 제사에 쓰일 술과 음용 할 수 있는 어주를 만드는 일이었다. 청주(淸酒)니 법주(法酒)니 하는 것의 만드는 방법, 다루는 예법 등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비전의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술은 질항아리에 넣고 견직물(絹織物)로 봉하여 보관했다. 지금 이곳에도 구석 한쪽에는 양온서의 관리들이 견직물로 입구를 봉한 질항아리를 뜯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올해로 스물 중반인 태자가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요의 사신 앞에서 그대와 같이 당당하게 나선 자는 처음 본다. 그런데 추밀원사에게 듣자하니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일을 벌였다고 하여 감탄을 금하지 못하던 참이다. 참으로 장하도다.”
윤관 역시 이 자리에 있었다. 윤관이 꺼낸 과거는 함께 요양으로 갔던 때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일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참으로 광음여류(光陰如流)였다.
태자는 내가 자신을 위해 대사례(大射禮)를 언급한 것이 매우 고마웠든지 원하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진급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기에 나는 내심 노리고 있던 것을 고했다.
“태자께서는 언제고 보위에 오르실 날이 올 것입니다. 일전 폐하의 은혜로 요에 사은사로 다녀와 많은 견문을 쌓았고, 그것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송으로 가는 사은사에 합류하여 일익을 담당했으면 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 대사례 건과 합쳐져 태자에게 줄을 댄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올해도 정례 사은사가 출발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동계로 돌아가 미래를 위한 정지(整地)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태자는 내 요구가 무척 기꺼웠는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태자로 공인받았지만, 권력의 향방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나의 이 발언은 태자를 차기 보위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으니 태자는 든든한 아군을 얻는 것 같았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중신 중 숙종이 내년이면 죽는다는 사실을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그러니 중신들이 아직 태자보다 숙종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하였다.
태자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뜻밖에도 난관 하나가 쉽게 해결된 것인지라 나도 모르게 안도가 흘러나왔다.
숙종이 죽자 고려는 요에 부음(訃音)을 알리지만 송에게는 정식으로 부음을 알리지 않았었다. 송에게 고주사(告奏使)를 예종 즉위 이후 처음으로 보내는 것은 동북 9성을 쌓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와중으로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를 척준경이 구한 직후가 바로 그때다. 그때가 1108년 음력 2월쯤이니 예종 즉위 후 근 3년간 송에 공식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것이다. 요의 눈치를 보면서 늦게 사신을 파견한 숙종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이유를 더 붙이자면 숙종이 유언으로 명한 동북 고토 회복을 우선으로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송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고려의 위신을 알리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요와 송에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다시 되돌려 주었다는 사신을 예종이 파견함으로써 이후 이성계가 나타날 때까지 동북 지역과의 인연은 영영 끝나게 된다. 승전을 알리는 사신도 아니고 패전을 알려야 하는 사신이었으니 예종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무튼, 예종이 송으로 첫 사은사를 보내는 시점에서 나는 북방에서 치열하게 전공을 올리고 있을 것이니 사은사에 참가할 수 없다. 아마도 송의 사은사로 갈 수 있는 때는 원정이 실패로 끝나서 그것을 알리기 위한 사신으로 가는 일행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지금의 가정이다.
동북 9성의 토대를 쌓은 후 여진의 대공세에 맞서 역사대로 물러나면서 나만 공을 세울지 아니면 고려의 승리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진왕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진왕의 뜻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처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내가 삼국지 시절 쉽게 가는 것을 애써 멀리하려고 했던 것은 내가 멀리하고자 했던 행동의 끝은 그저 일세를 풍미한 영웅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가치가 오래도록 지속하기를 원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그것이 사대성인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시대의 한 사조(思潮)로 언급될 뿐이다. 유가가 꾸준히 동아시아의 대표 가치로서 명맥을 이어가는 것에 비해 중원의 강남 일부 지역에서만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율가는 무엇이 부족했던 것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었다.
‘통치체제로서 인식하느냐 순수 학문으로서 인식하느냐의 차이일까?’
내 생각은 이상적인 정치를 닮아가고자 하는 몽상가적 기질이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놨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중은 율가를 어용학(御用學)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가는 초기부터 관료를 만들어내는 장으로 활용되었으니 말이다. 서간 등이 나서면서 순수 학문으로서의 율학도 존재했지만, 당시는 우리가 원하는 신념을 공유하기 위해 관료를 속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쓰인 것이 사실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지내고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양산형 관리들이 계속해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원의 광대함이었다.
숙종과 태자를 벗어났다고 해서 술자리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문하시중을 비롯해 고려를 움직이는 재추(宰樞, 재상급)들이 한 자리에 있었으니 그들에게 축하의 잔을 모두 받으면 제대로 대취할 것 같았다. 다행히 윤관이 자제를 시켜서 문하시중 소태보가 내리는 석 잔으로 대신했다. 대부분은 그것으로 만족했으나 직접 내게 따라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장군이 오늘 고려의 위신을 세웠소. 문하시중의 잔으로 내 마음을 대신하려고 했으나 살면서 너무나 기쁜 날이라 주역에게 한 잔을 드리지 않을 수 없구려.”
술잔을 내미는 사람은 요나라 사신의 무례를 지적했던 좌복야정당문학 유신이었다. 그는 내가 보여준 기백과 대사례를 언급한 기지가 인상적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 천수를 다하는 노인이라고 보기에는 정광이 빼어났다. 나는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유신에게 잔을 돌려주며 말했다.
“평소 대감을 존경해왔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 부탁하나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유신은 내가 부탁이 있다고 말하자 흥미가 돋는지 일단 들어보자며 운을 뗐다.
“대감께서 왕자경(王子敬)의 행서와 초서에 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명필이 대감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하더군요.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본보기로 삼을만한 경구(警句)를 하나 적어서 내려주신다면 평생 가보로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천생 무장인 내가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의 글을 원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신라의 김생(金生), 고려의 탄연(坦然), 최우(崔瑀)와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꼽히는 서예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당송팔대가가 있다면 우리는 신품사현이 있다고 보면 옳은 말이다. 그런 그가 올해 가을쯤이면 천수를 다하게 되니 그의 유작(遺作)을 하나쯤은 소장하고 싶다고 한다면 욕심일까?
왕자경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별칭으로 왕자경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명필이라고 칭송받았고, 유신은 그런 왕자경의 필법을 계승 발전시켰다. 또한, 책부원구는 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어람(太平御覽), 문원영화(文苑英華)와 함께 송대(宋代) 4대 편찬서 중 하나로 정치의 요체(要諦)를 다루는 책이었다. 자치통감이 역사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책부원구는 왕과 신하의 정치적 업적, 행적을 열거한 위인전기 형식이었는데 목록 10권에 총 1,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내가 이것을 언급한 이유는 유신의 업적 중 하나가 송에 사은사로 가서 책부원구 전편을 선물로 받아온 일이기 때문이다.
유신은 조금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흔쾌히 응하리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하하하, 오늘 준경 장군이 큰 공을 세웠으니 좌복야께서 친히 붓을 드셔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이왕 붓을 드신 김에 제게도 하나 내려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는 다름 아닌 이부시랑 김경용이었다. 아무래도 유신의 서예가 유명하다 보니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함부로 붓을 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경용은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좌복야 대감은 불심이 깊어 사찰의 탑비는 흔쾌히 써주시면서 대신들에게는 그 흔한 시구(詩句)하나 선물로 줄 때가 없었지.”
김경용은 나에게 한 말이었지만 유신에게 오늘의 공을 인정한다면 그래도 한 장은 줄 법하지 않으냐는 은근한 요구이기도 했다.
“이부시랑께서 그토록 활에 조예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 신기(神技)에 참으로 탄복했습니다.”
“하하하!”
김경용은 기분이 좋은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신라 왕족의 혈통이니 젊은 날을 비유하면 방탕한 재벌 2세라고 표현해도 될까?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괄괄한 성품이었다.
“나 역시 요가 고르고 고른 장사들을 모두 내동댕이치는 신기를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추밀원사께서 강경하게 너를 추천할 때 그 이유를 몰랐는데 너 같은 인재가 동계를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든든하구나.”
그는 이자겸과 사돈관계이긴 해도 나와 이자겸의 관계는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사이 유신이 내 제안을 숙고했는지 말문을 열었다.
“내일쯤 자네는 집에 들르도록 하게. 이부시랑은 사람을 시켜 보내주도록 하겠네.”
글을 준다는 말에 나도 김경용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위에서 부럽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글을 주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김경용에게는 사람을 보내 전달하고 나는 왜 직접 오라는 것이지. 신분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뻐하는 김경용과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