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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81화 (8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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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운로(雲路)

스무 발이 넘어가자 야율사부와 김경용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스무 발이 다하도록 그들의 화살은 관중을 빗나가지 않은 것이다.

지켜보는 관중이 마른 침을 삼키며 이제는 실수하지 않을까 긴장할 정도였다.

“관중!”

서른 발째도 양쪽 모두 관중을 맞추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도 화살은 어김없이 관중에 꽂히고 있으니 다시 없을 명승부였다.

다시 열 발의 화살을 받자 김경용은 취기가 잔뜩 오른 채 야율사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과연 대국의 사신은 다르오이다. 탄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고려에도 그대와 같은 자가 있는 줄 몰랐구나.”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으니 방법을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술이 꼭지까지 차오르자 야율사부의 목소리 역시 많이 풀려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다정한 술친구로 보일 정도였다.

“대접 열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열 대를 연사하도록 하지요.”

“아예 끝장을 보자는 이야기구나. 좋다!”

대접 열 잔이 단숨에 마련되고 두 사람은 잠시 대접을 응시하더니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내가 다 떨릴 정도였다. 내가 정신없이 지켜보고 있는 사이 고의화가 내게 물었다.

“너의 마술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다.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느냐?”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왕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와 이부시랑이 이길 것이라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맡기셨으니 말입니다. 물론 제가 마술에 억지로 참가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세 판을 내리 이겨봐야 오늘 왕께서 사신들에게 책잡힌 것을 구실로 삼아 더 큰 사단을 일으킬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 네 말이 옳구나.”

김경용과 야율사부는 호각이었지만 나 역시도 어느 순간 그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활이라면 질 수 없다는 민족적 자긍심인 걸까?

내가 다시 사대를 쳐다보니 거의 동시에 대접 열 잔을 모두 들이켠 야율사부와 김경용이었다. 토가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지 김경용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관중은 동요하며 걱정했다.

야율사부 역시 연신 트림을 해대며 활시위를 당기더니 이내 첫 발을 쐈다.

“관중!”

관중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가자 요나라 사신단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이었다. 야율사부가 두 발을 명중시킬 때쯤에야 김경용은 헛구역질을 멈추고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리고는 껄껄 웃으며 시위를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명중하기도 전에 어느새 그의 손은 전통에 있는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고 있었다.

이윽고 나를 비롯해 모두가 놀라워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삼배통대도 일두합자연(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이라!”

-석 잔을 마시면 큰 도와 통하게 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태백의 독작(獨酌)이란 시 중 일부분이 호쾌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의 손은 쉬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속사(速射)였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 감히 속사를 당길 자신감을 가진 이가 얼마나 있을까?

야율사부는 어느새 여섯 발을 쏜 자신을 앞질러 단 두 발을 남겨놓자 마음이 급했는지 자신도 속사를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어쩌면 김경용의 노림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적으로 실력이 비슷하다면 평정심을 깨야 한다. 술을 잔뜩 마시고 가뜩이나 판단력이 흐려진 상황에서 상대가 속사를 시작한다면 야율사부 역시 그 행동을 따라 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야율사부가 속사를 시작하자 일부러 발사 속도를 늦춘 것을 보면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마지막 화살이 양쪽의 시위를 떠났고 오직 한 발의 화살만이 과녁에 들어갔다.

“관중이요!”

깃발이 올라갔고, 양측의 표정은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내가…… 내가 실수를 하다니.”

김경용이 속도를 약간 늦춘 것을 모르고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야율사부가 전통에서 마지막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트림이 흘러나왔다. 속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트림을 마치고 활을 걸어도 되었겠지만 다 따라잡았다고 안도한 순간 흘러나온 무의식의 트림은 시위를 당기던 손에 힘을 뺐다.

“이런 경우도 다 있군.”

고의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야율사부는 활을 쏴보지도 못하고 화살이 시위에서 튕겨져나간 것이다. 야율사부가 멍하니 떨어진 화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김경용은 두 손을 모아 야율사부에게 예를 올렸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끝까지 겨뤘더라면 제가 졌을 것입니다.”

승리를 확정 짓는 말이었다.

야율사부는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주어 과녁을 향해 그대로 쏘았다. 화살은 관중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어린아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야율사부는 화살이 관중에 꽂히자 기분이 좀 풀렸는가 싶었지만 그래도 허탈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단상의 야율가모 역시 팔걸이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활을 쏴서 빗나간 것도 아니고 실수가 아닌가? 다시 관중에 명중시킨 것을 보면 이 승부는 끝을 알 수 없었다!”

야율가모의 외침에 숙종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궁수가 활시위를 제대로 잡아당기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는 하나 명백한 실수다. 만약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어디 오늘의 일을 천자에게 낱낱이 고해보자. 과인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가!”

야율가모의 두터운 볼이 실룩거렸다. 끝까지 가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은 없지만, 만약 고려가 앙심을 품고 요나라를 이탈한다면 지금 자신들의 전력으로 고려를 응징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전쟁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그 빌미를 제공한 이유를 들어 반대파에게 숙청을 당할지도 몰랐다.

홍요경 장직이 다가와 야율가모에게 간했다.

“이겼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이번에는 운이 없었습니다. 태주 관찰사의 궁술이야 아국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는데 시위에서 화살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승리를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면 고려는 더욱 반발할 것이니 이쯤에서 용인하시지요.”

고려가 요나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속국이었다면 끝까지 밀어붙였겠지만, 요나라 주변국 중 가장 까다로운 나라가 고려였다. 그래서 우세한 내기로 위신을 깎아보자 한 것인데 오히려 고려의 위신만 높여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천자의 조서를 읽는 내내 야율가모의 표정이 흐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려왕을 충근 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겸 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칠천호 식실봉칠백호(忠勤奉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太尉兼中書令上柱國高麗國王食邑七千戶食實封七百戶)로 책봉한다. 거로와 의대, 피륙, 그에 더해 안원군절도사의 활을 함께 내린다.”

문하시중 소태보가 공손한 자세로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의 활을 받아들었다. 원래는 태자에게 내렸으면 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내기에 활 두 개를 거는 바람에 숙종과 태자가 각기 하나씩을 받는 형태가 되었다. 사실 숙종이 종1품인 중서령에 제수된 이상 안원군절도사의 활은 크게 필요없는 물품이었지만 혹시 졌을 때를 생각해 일부러 나눠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태자에게 안원군절도사의 활을 주는 것보다 태주 관찰사의 활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나마 나은 선택일 것이니 말이다.

“태자를 순의군 절도삭무 등주관찰처치등사 특진 검교태위 겸 시중사지절 삭주제군사 행 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삼천호 식실봉오백호(順義軍節度朔武等州觀察處置等使特進檢校太尉兼 侍中使持節朔州諸軍事行朔州刺史上柱國三韓國公食邑三千戶食實封五百戶)로 책봉한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태자에게도 거로가 주어졌다. 원래부터 두 개의 거로가 주어진 것을 하나만 주는 것처럼 얕은 꾀를 부렸던 것이다. 아마도 자신들이 내기에 이기고 숙종이 굴종의 의식을 마치면 선심 쓰는 척 태자에게도 내렸을 것이다. 그편이 고려의 충성을 재확인하면서도 무마시키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책봉이 끝나자 여러 신하가 표문을 올려 축하했고, 지켜보던 백성도 천세를 외치자 한껏 축제 분위기였다. 야율가모는 그 자리에 계속 있기 싫었는지 미리 준비된 연회도 거부하고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 중 몇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야율대석과 바야르, 칼둔이었다.

야율대석은 술병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마개가 열려 있어서 흘러나오는 주향을 통해 마유주임을 알 수 있었다.

“장사의 이름이 무엇인가?”

야율대석은 왕족이라 그런지 나이는 어려도 하대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눈가에는 아까 나에게 들려졌던 기억이 남아 있는지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준경이라 하오.”

하오체가 거슬리는지 살짝 눈초리를 치켜떴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고려에서 그대가 받는 녹은 얼마나 되는가?”

“나를 대국으로 데려가고 싶은 게요?”

“그대와 같은 장사를 본 적이 없다. 바야르에게 얼핏 설명을 들으니 그대의 과거는 정말 놀랍더구나. 그대가 원한다면 고려에서 받는 녹의 열 배를 줄 것이다.”

“나를 데려다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오?”

“내 곁에만 있으면 된다.”

호위무사로 두겠다는 것인가?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내용이라도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다시 이유를 물었다. 야율대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나는 아직 조정에 따로 맡은 관직이 없다. 출사하고자 하면 능히 관찰사 정도는 맡을 수 있겠으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관이 되기에는 걸림돌이 산적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

바야르나 칼둔을 대동한 것을 보면 어쩌면 이번 내기의 최대 수혜자는 야율대석이 아닌가 싶었다. 전사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회유할 시간이 충분했을 테니 말이다.

“천자 주위에 보위를 노리는 자들이 산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요나라의 현 황제 천조제는 무능한 황제였다. 더구나 주위에는 친인척이 자신들의 후손을 후계자로 올리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맥없이 무너진 것이 절로 이해가 될 정도였다.

내 질문이 꽤 직설적이었는지 야율대석의 표정이 굳었다. 천조제가 금나라에게 패하여 몽골 북부로 도망쳤을 당시 그는 남경 석진부(북경)에서 군대를 끌어모아 금과 송의 연합군을 물리친 전력이 있었다. 천조제와 만난 자리에서 신중하게 나라를 되찾을 방도를 건의했지만 천조제는 그가 이룩한 군대로 어서 빨리 요나라의 강역을 되찾기를 바랐다. 야율대석은 천조제에게 실망하여 그때부터 독자적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게 되니 그의 젊은 시절은 그래도 요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보위에 관심이 없다. 그저 대요가 성세를 더욱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일조하고 싶을 뿐이다.”

“충신이시군요. 그럼 저 역시 답을 드리겠습니다.”

제법 강인한 척하고 있었지만, 몸에서 이는 긴장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속으로는 제발 내가 와주기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절입니다.”

“녹이 적어서인가? 여자가 필요하다면 여자를 주고, 금은이 필요하다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주겠다.”

고개를 내젓는 단호한 거절 의사에 야율대석의 입은 빠르게 움직였다. 마음이 조급한 것을 보면 그만큼 여진과 발해 유민들의 독립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내가 움직일 기색이 없자 야율대석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승부수를 띄울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대로 돌아갈 것이다. 과연 야율대석은 어느 쪽을 택할지 궁금했다. 중앙아시아에 흑거란을 세운 그의 도량과 혜안은 어느 정도인가?

그는 돌연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마유주를 내밀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 마유주로 충성 맹세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마유주는 또 다른 뜻도 품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안목을 믿고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하는 셈이다.”

도대체 어떤 결정이기에 이리도 결연한지 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흘러나온 순간 나는 매우 놀라고 말았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 야율대석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

“나의 안다(Anda)가 되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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