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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80화 (80/257)

00080  (10) 일양내복(一陽來復)  =========================================================================

그러자 숙종은 마음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야율가모를 향해 말했다.

“대요의 사신께서 양해해 주신다면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국왕이 직접 나서자 신하들이 질겁했다.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율가모는 국왕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 일단 말이나 들어보자며 경청을 취했다.

“대요에 비하면 고려는 소국에 불과하나 산천은 수려하고 지세의 맥이 좋아 예부터 재주 많은 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각희에 능한 자가 한둘 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요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를 모두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숙종의 말은 묘했다. 요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 같았지만, 대국이 받아들이지 못할 까닭은 무엇이냐고 반대로 묻는 것과 같았다. 야율가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엇을 보더라도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한 내기였다. 그러나 내가 앞서 보인 실력을 떠올려보면 만에 하나 참패할 예도 고려해야 했다.

그때 태주 관찰사 야율사부가 야율가모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야율사부의 귓속말이 끝나자 야율가모의 얼굴이 한껏 펴져 있었다.

“판돈이 제법 크니 판을 더욱 키워보지요.”

숙종과 태자에게 응당 전해줘야 할 물건들을 볼모로 잡고 위세를 떠는 형국이라 좌복야정당문학(左僕射政堂文學) 유신(柳伸)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대국의 사신이면 대국의 사신답게 행동하시오! 국왕을 욕보이기 위한 내기인 것을 천하가 다 알거늘 이제는 비교할 것이 없어 판돈에 비유한단 말이오? 내 지금껏 대국의 사신을 여럿 영접했으나 그대와 같은 시정잡배를 보지 못했소!”

문하시중 소태보가 유신을 말리려고 했지만, 조정의 오랜 노신(老臣)이 뿜어내는 기세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신은 체구는 작았으나 담력이 있고, 청렴과 근신으로 이름이 높아 임금 앞에서도 직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종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5대를 섬기면서 항상 충의를 내세웠기에 임금들의 신임이 두터운 자였다.

야율가모의 얼굴이 단번에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많은 이목이 주시하는 자리에서 망신을 당해도 제대로 당했으니 칼이라도 차고 있었다면 단번에 유신을 베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그런 야율가모를 이주 관내 관찰사(利州管內觀察使) 하자목(夏資睦)이 말리는 사이 야율사부와 홍로경(鴻?卿) 장직(張織)이 앞으로 나섰다.

“고려의 법도도 예전 같지 않구려. 어전임에도 신하가 천자의 명을 받든 사신을 대놓고 모욕하다니 말이오. 이에 대해 명백한 사과가 필요할 것이오.”

“군왕이 모욕받는 것은 고려의 만민 모두가 모욕받는 것이다. 지적하는 행위가 다소 무례하다고 하여 그 뜻을 다 덮을 수는 없다.”

뭐라고 대꾸하려던 유신을 대신해 숙종이 나서자 단상의 중신들은 혼비백산이었다. 더구나 명백한 반말투로 시비를 자처하고 있었다. 자칫 큰 문제로 비화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빛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켜보던 백성은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일제히 퍼진 환호성이 그것을 대신했다.

홍로경 장직은 노회한 관리답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숙종에게 말했다.

“신하의 불의를 왕께서 직접 책임지시겠다는 의미로 알아듣겠습니다. 천자께도 오늘의 일은 상세히 상주(上奏)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안원군절도사께서 제의하시려고 했던 내용을 마저 말씀드리지요. 북방에서는 매년 큰 축제를 벌이면서 세 가지 대회를 개최합니다. 각희가 첫째요, 마술(馬術)이 둘째요, 궁술(弓術)이 셋째지요. 고려의 장군이 담대하게도 안원군절도사의 활을 원했으니 이 정도의 여흥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뱀의 혀가 날름거리듯 매끄럽기 그지없는 언변이었다. 숙종의 발언을 수정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확정시켜 추후 정사에 개입할 빌미를 만들었고, 흥분한 야율가모를 대신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기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숙종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태자 왕우(王?, 예종)가 숙종을 대신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며 반박하려 했으나 장직은 그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발언을 이어갔다.

“판돈이라는 말을 무의식중에 쓸 정도로 안원군절도사께서 고려에 내리실 혜택이 크나큰 것입니다. 만약 고려가 승리한다면 절도사의 활 외에 태주 관찰사의 활까지 함께 내놓겠습니다. 또한, 고려왕을 중서령에 더해 충근봉국공신(忠勤奉國功臣開)으로 추가 상신(上申)하고, 태자를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숙종을 대신해 나서려던 태자의 발걸음이 딱 멈춰 섰다. 중신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숙종을 요나라 공신으로 추증하는 것이야 별다를 바가 없었지만, 태자를 삼한국공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숙종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해준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활을 내려주는 것이 은근한 인정이었다면 삼한국공의 작위는 공식적이었고, 직접적이었다.

야율가모가 판돈이 커졌다며 판을 키워야겠다고 한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제안이.”

야율가모를 꾸짖었던 유신조차도 요나라의 제안이 워낙 파격적이었는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숙종 역시 심각한 장고에 들어갔다. 저들은 내놓을 것만 이야기하고 자신들이 받아야 할 것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애초에 제의했던 대로 숙종이 거로의 고삐를 잡고 요나라에 충성한다는 행위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이다.

숙종이 장고에 들어가자 야율가모는 애써 화를 삭이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마도 오히려 좋은 결과라며 하자목이 토닥이지 않았을까? 천자의 사신을 시정잡배라고 헐뜯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숙종이 직접 지겠다고 한 이상 앞으로 고려를 쥐고 흔들 약점 하나를 공짜 선물로 받은 셈이었다.

그때 중신 중 훤칠하게 생긴 중년인이 숙종 앞에 나섰다.

“제의를 받아들이십시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시원스럽게 말하는 자의 면면을 숙종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부시랑(吏部侍郞)에게 생각이 있는가?”

“전하께서 아국의 장군을 믿으시고 직접 대국의 사신을 응대하셨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아국은 대국에 비하면 작지만, 산천이 수려하고 지세의 맥이 좋아 재주 있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신하들이 사실을 입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술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장군을 믿는다면 무승부인 셈입니다. 남은 것은 궁술에서 판가름나겠지요.”

이부시랑의 말에 숙종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면 숙종은 내가 지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궁술이라면 고려 역시 빠지지 않는다. 다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출전할만한 인물이 있는지가 문제였다. 그래서 다른 중신들도 저마다 궁술에 뛰어난 자의 이름을 부르며 이 자리에 없다고 난감해했다.

“신에게 맡겨주십시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는 와중에 담담하게 자신을 추천하는 이부시랑이었다. 나이를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십에서 육십은 되어 보이는 노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기겁했지만, 숙종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체면도 잊고 한참을 껄껄 웃었다.

이부시랑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이름과 얼굴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름이라도 듣는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추할 수는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이 시기 이부시랑의 이름이 누구였는지까지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숙종은 결심했는지 홍로경 장직에게 외쳤다.

“대국의 사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 믿겠소.”

“물론입니다.”

볼만한 구경거리가 더 늘어난다고 하니 관중은 신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마술과 궁술을 준비하는 사이 나는 각희를 마저 끝내기 위해 경기장에 섰다. 18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고 싶었지만, 야율가모는 대국의 자존심을 내세워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앞선 자들이 최대한 내 힘을 소진하며 후반을 도모하려는 작전으로 나왔다.

이미 앞서 내 경기를 지켜본 전사들은 신중한 태도로 접근했다. 최대한 겨루기를 오래 지속하여 내 힘을 빼고 싶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차륜전은 이미 질리도록 겪어 보았었다. 강하다고 능사가 아니다.

한 명, 두 명을 꺾을 때마다 숫자를 세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중 몰래 모래를 내 눈에 던지려던 타타르 전사는 맨땅에 등을 내리쳐서 실려나가게 하자,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야율대석이 마지막으로 비장한 표정과 함께 내게 덤벼들었지만, 그저 경험이나 쌓으려고 심심풀이로 참가한 여정이니 의욕만 앞섰지 실력은 앞선 선수들보다 떨어졌다. 나는 만방에 힘을 과시하듯 그를 번쩍 들어 허공에 높이 치켜들었다. 아마도 그는 허공에 들려진 적이 처음이었는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기겁하는 표정이 일품이었다.

조금 지나면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기에 그를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요나라 사신단을 응시했다. 야율가모는 이렇게까지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진 것이 무척이나 분한지 손잡이를 여러 번 내리쳤다. 고르고 고른 전사들이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패하리라고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나는 그의 반응보다 오히려 궁술 시합에 나설 이부시랑의 반응이 궁금했다. 관복을 벗고 상의를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내가 그를 주시하자 웃음을 보였다.

요나라 사신단은 그런 그를 무모하다고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어전이다 보니 충성심으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유학의 예를 받아들여 활쏘기를 수양한 노신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내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니 말이다.

이곳에 모인 고려 문신들 대다수는 활을 어느 정도 쏠 수 있겠지만 이런 중차대한 일에 고수라고 자칭할 수 있는 간담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이부시랑은 노년으로 넘어가는 중년임에도 용모가 귀티나서 활을 잡아든 풍채는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사대가 마련되자 그가 요나라 사신들에게 외쳤다.

“이곳에서 대국의 마술을 따를 이는 단언컨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술은 대국이 이긴 것으로 하고 궁술에서 승부를 보도록 하지요.”

지나친 자신감이었지만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고, 요나라 사신단도 마술은 고려가 자신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정리가 되니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궁술뿐이었다.

환호성은 멈췄다. 숨소리마저 내지 않기 위해 군중은 죽은 듯 전방을 주시했다.

이부시랑은 이미 준비를 마치 채 자리를 잡았고 요나라의 선수만이 나오지를 않았는데 단상에서 태주 관찰사 야율사부가 몸을 일으키자 의외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그런 고위직이 직접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자가 있었을까?

각희의 충격적인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요나라 병사들이 야율사부가 단상에서 사대로 내려가자 환호하기 시작했다. 단상의 야율가모의 표정이 제법 편안한 것을 보니 야율사부의 솜씨를 단단히 믿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각자 열 발의 화살을 발사하여 관중에 많이 적중한 자가 승리하게 되는 방식이었는데 만약 관중에 맞힌 횟수가 동수가 되면 과녁을 열 보 뒤로 물리는 것을 반복해서 승자를 가리는 규칙이었다.

“고려에서 활 좀 쏜다 하는 장정은 이 정도 거리에서 관중은 우습습니다. 그것은 대국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부시랑의 도발적인 발언에 야율사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 정도는 열 살 먹은 어린아이도 쏠 수 있는 거리다.”

“그렇다면 시위를 당기나 마나가 아닙니까? 그러니 재미나게 활을 쏴보도록 하지요.”

“재미나게 쏜다? 무슨 제의를 하려는 것이지.”

그들의 대화가 점입가경이라 중신들은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고의화가 이부시랑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이부시랑이 젊어서는 방탕하여 시정잡배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지금 저 모습을 보니 그 과거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내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곁에 있던 고의화라면 이부시랑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인데 왜 그에게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부시랑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아? 그러고 보니 준경 너는 초면이겠구나. 신라 종실(宗室)로 경용(景庸)이란 함자(銜字)를 가지고 계시다.”

나는 그 이름을 듣고서야 그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신라 종실의 후손답게 귀티가 흐르는 외모와 풍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만하고 금품과 여색을 갈구하는 성품이었다. 세도가였던 인주 이씨와 제법 잘 맞았는지 자식 간 혼례를 통해 밀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정치력은 제법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숙종과 예종이 그를 신임하였는데 그가 재산을 축적하고 방탕한 모습을 보였지만 충심만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편하게 여생을 즐기려고 사직을 청해도 왕이 궤장까지 주면서 붙잡아 둔 것을 보면 어쩌면 눈에 보이는 곳에서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려의 남자라면 응당 술 한잔을 걸치고 활을 쏘아도 관중에 맞춥니다. 대접 한 잔에 한 발씩,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김경용의 호기에 야율사부도 단숨에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술이 가득 담긴 대접 하나를 비우고 활을 쏘아도 이목이 흐려질 것인데 마지막 열 발째까지 가면 무려 대접 열 잔을 마시게 된다.

야율사부는 김경용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외쳤다.

“우리 역시 술 한 잔을 걸치고 활을 쏘는 것은 다반사다. 받아들이겠다.”

술 한 잔에 화살 한 대의 내기가 성립되었다.

그때 나는 문득 김경용에 대한 일화가 떠올랐다.

-김경용이 대취(大醉)한 채로 활을 당겼는데 모두가 관중이었다. 숙종이 우연히 그 광경을 보고 탄복하여 은그릇과 어마(御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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