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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79화 (79/257)

00079  (10) 일양내복(一陽來復)  =========================================================================

그 호령에 맞춰 선수 중 유난히 덩치가 큰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런 겁쟁이들! 나이만(Naiman, 乃蠻)의 바야르가 마힐셀렘을 꺾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아라!”

나이만은 알타이 산맥과 이르티슈강 유역의 초원에 거주하는 대부족으로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들은 차근차근 힘을 길러 지금에 이르러서는 타타르, 케레이트의 세력에 은근히 도전하고 있는 처지였다.

타타르와 케레이트의 선수들이 뒷걸음칠 치자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라고 여겨 앞으로 나선 것이 틀림없었다.

케레이트가 질겁하자 당황했던 타타르의 선수들도 나이만의 선수가 가슴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서자 이번 경기를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차츰 동요를 가라앉히며 나와 바야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심판이 단상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 진영 모두 출전 순서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내 출현으로 그 순서가 어긋난 것이다. 나이만 전사의 당당한 출현으로 구겨진 얼굴이 조금 살아난 야율가모는 옆자리의 사신들과 잠깐 의논을 나누더니 이내 수락을 나타냈다. 아마도 내 앞에 나선 나이만 전사가 얼마나 강한지 물었던 모양이다. 수락했다는 것은 나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겠지.

심판은 숙종과 태자를 바라보았는데 숙종은 무표정했고, 태자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태자는 나를 보고 물러나는 요나라 선수를 보며 통쾌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는 나를 보며 몰래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잠시 보였다.

순서가 어긋났지만 고의화는 탓하지 않았다.

“이왕 먼저 나간 이상 확실하게 해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격려에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바야르에게는 자신을 향한 비웃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더구나 바야르 뒤에서 들려오는 케레이트 전사들의 수군거림이 격노를 더했는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군거림은 청년이라기에는 아직 어린 건장한 선수가 케레이트 출신들에게 나에 대해 물으면서 생긴 일이었다. 나는 그가 바로 야율대석임을 알 수 있었다.

“마힐셀렘은 일대일로 겨룬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열 명 이상의 다수였습니다!”

내가 케레이트 전사들의 안면이 낯에 익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항상 때로 몰려왔으니 특별한 인연이 아니고서는 얼굴을 외울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각희는 우리나라 전통 씨름과도 비슷하다. 일본 스모와도 비슷한데 동아시아 씨름의 원류가 같다는 뜻일 것이다. 각희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어깨다. 어깨가 땅에 먼저 닿는 자가 지는 것이다. 승자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환호의 춤을 추고, 패자는 승자가 팔을 벌리면 그 팔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한 바퀴를 돌며 승복의 의사를 나타낸다.

각희의 최종 승자에게는 아루스탄(사자)이라는 영웅 호칭이 주어진다. 2등은 잔(코끼리), 3등은 나친(매)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들이 강하다고 여기는 동물들의 순위를 알 수 있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런 대회를 4번 이상 우승하면 ‘무적’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무적 거인, 무적 사자라는 호칭은 각희의 최고수라는 뜻과 동시에 유목민 최고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본시 나담에서 겨루는 각희가 정식이지만 요나라는 화합을 위해 조정이 공인하는 시합의 우승도 합계에 넣었다. 지금 열리는 시합 역시 요나라 조정과 고려 조정이 공동 주관하는 형태니 나담의 최종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그 질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날 것이다. 지역 예선을 걸쳐 올림픽 본선에 오른 선수들이라고 할까?

나도 키가 제법 큰 편이었지만 바야르와 마주 서자 그는 나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이런 자는 선천적으로 각희에 최적화된 전사였다.

심판의 손이 올라가자 바야르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내 상의를 잡아 단숨에 허공으로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나 역시 그의 상의를 잡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바야르는 힘겨루기라면 자신이 있는지 한쪽 손은 내 상의를 붙잡고, 한쪽 손은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투실투실한 살이 경련으로 출렁였고, 잠시 지났을 따름인데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씨름을 보면 대체로 살 겹이 단단하다는 느낌보다 물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야 하는 특성의 반영인데 지금 바야르의 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다.

바야르의 입가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력을 넘어 악을 쓰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상을 구기기 시작한 그를 보며 나는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누르메메트는 잘 있나?”

“칸(Khan, 汗)을 어찌!”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놀라는 사이 잠시 손목에 힘이 빠진 틈을 타서 그의 발을 후리며 허리의 반동으로 던질 채비를 하자 그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황급히 허리를 빼며 무게 중심을 뒤로 가져갔다.

‘그래도 별반 다를 것 없다.’

한팔업어치기하듯 상대를 당긴 후 상대가 피하려고 뒤로 몸을 빼면 그 탄력을 이용해 상대의 겨드랑이 밑으로 내 어깨 한쪽을 들이밀며 상대의 양발 사이에 내 발을 밀어 넣어 다리를 감고 몸으로 그대로 밀면 메치기 기술이 완성된다.

쿵 소리와 함께 바야르의 거구가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승리의 환호를 지르지 않았다. 단지 엄지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는 이내 땅바닥으로 꺾었다.

환호와 우려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백성은 고려가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니 기쁜 것이 당연했고, 고관들은 내 행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우려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나는 단상을 바라보았다. 일순 무표정하던 숙종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감돈 것 같았다.

야율가모는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칼둔! 칼둔을 내보내라!”

칼둔의 이름이 나오자 요나라의 병사들이 칼둔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들 중 제일 실력자였던 모양이다. 그 사이 바야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그는 내게 진 것보다 내가 나이만의 칸을 어찌 알고 있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는지 먼저 그것을 물었다.

“내가 5년 전 그를 만났을 당시는 칸이 아니었다. 내가 배고픔에 지쳐 있을 때, 마침 보르지긴 씨족과 시비가 붙은 그를 도와주고 접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나이만의 전사라고 밝혔기에 혹시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을 따름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기이한 우연이었다. 보르지긴 씨족은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자란 부족이었다. 칭키즈칸의 어머니는 보르지긴 씨족이 메르키트 부족을 약탈하면서 얻은 전리품으로 부족 간에 전쟁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철저하게 지배했다.

바야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힐셀렘이 카라 아루스탄(검은 사자)이었단 말이오?”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흑우의 어미와 함께 초원을 가로지르며 만곡도를 휘두르는 내 모습이 검은 사자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호칭을 붙여준 사람이 누르메메트였다.

“보르지긴 씨족의 전사 스무 명을 홀로 상대한 자가 바로 당신이라니. 칸의 목숨을 구한 것이 당신이 맞는다면 칸께서 주신 마힐셀렘을 가지고 있소?”

나는 뒤로 돌아 말없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무기를 들고 출전할 수 없으니 병장기는 미리 마련된 목판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바야르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넙죽 엎드렸다.

“칸께서 말씀하셨소. 카라 아루스탄이야말로 전사 중의 전사, 무적 사자라고 말이오. 칼둔마저 꺾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오.”

칼둔이란 이름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 이름을 언급할 때 자신도 모르게 근육이 경련하고 있는 바야르였다.

“패자는 뒤로 물러나라.”

칼둔이란 자는 준비를 마쳤는지 선수들 틈에서 나와 경기장으로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야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하자 바야르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이내 말없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칼둔이란 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칼둔의 체구는 나와 비슷했다. 각희를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 흔히 보이는 비만형 체구도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무섭도록 단련한 잔 근육의 흔적이 전신을 채웠다.

원래 이런 자들이 더 무섭다는 것을 나는 오랜 초원 생활을 통해 체득했었다. 주로 고산 지대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심장은 강인한 체력을 오래도록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고, 하체는 누구보다 단단했다.

“마리족의 칼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한 그는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족이라.’

마리족이면 타타르, 투르크, 시베리아인의 혈통을 두루 갖춘 부족이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유럽인의 신체에 몽골인의 장점이 결합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유목민이 세운 제국들의 장점이기도 하다. 정주하지 않는 유목민들의 제국은 우리가 지도로 경계를 표시할 수 없을 만큼 사방에 점조직 형태를 띤 느슨한 연맹체제로 더욱 폭넓은 인종을 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 안주를 하면서 국경선을 정하게 되는데 그러면 또 다른 유목민족이 출현하여 안주한 제국을 침탈하곤 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밀려난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던가? 금나라가 원나라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도 유목민이 정주를 선택하면서부터였다. 중원을 얻는다는 것은 그래서 독이 든 성배를 가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시합 개시가 떨어지자 잡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거의 동시에 서로의 상의를 잡았고, 아까 바야르와 마찬가지로 힘 싸움에 들어갔다.

아까 바야르와는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야율가모가 믿고 맡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 한계를 몰랐다는 것이겠지.’

사막과 초원, 고원을 가로지르며 나는 숱한 부족을 만났고 실력을 겨뤘다. 알라무트에서 홀로 뛰어들었다가 어쌔신에게 기습을 당해 등에 칼침을 허용한 이후 나의 적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고 나는 거듭 헤쳐나오며 강해졌다.

‘일백 명의 마리족이 온다고 해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죽이는 것이라면 밥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겨루고 있던 손을 강제로 떨쳤다. 칼둔은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잠시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힘겨루기 위해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서로 상의 깃을 잡고 있는 형태였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한 손 엎어치기를 시도했다. 대놓고 하는 엎어치기에 칼둔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아까 전에 바야르가 역으로 쓰러진 사례가 있었기에 그는 무게중심을 뒤로 옮기기보다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는 것을 택했다. 내가 허리로 그를 들어 올리는 순간 무게 중심을 앞으로 쏟아 버리면 내가 쓰러지는 것을 노린 것이다.

‘일반적이라면 그렇겠지.’

어딘가에서 이자겸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내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니 말이다. 이자겸뿐만이 아니라 야망이 있는 다른 자들도 욕심을 품을 만큼 실컷 보라는 의미의 시연(試演)이기도 했다.

버티고 있는 상대를 한 손으로 넘기기 위해서는 괴력이 필요하다. 숨이 폐로 모이고 불끈 힘이 들어가자 혈관이 빠르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참았던 숨을 다시 쉬고 있을 무렵, 야율가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악했다. 그건 칼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바닥에 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력을 다해 버텼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하늘을 날고 있는 꿈을 꾼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백성은 연거푸 내가 승리하자 신이 났는지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요나라 측은 칼둔의 패배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이럴 수가만 연발하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대신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기에 바빴다. 대체 내가 어떤 인물인지 이제야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잠시 단상을 살피다 윤관, 오연총 등과 눈을 마주쳤는데 윤관은 자신의 추천이 맞아떨어진 것이 기쁜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기쁨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단상의 야율가모를 향해 소리쳤다.

“고려의 장군, 준경이 감히 대국의 사신께 청을 하나 드리겠나이다!”

야율가모는 돌연한 내 요청에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이기는 것이 분명한 내기라고 생각했는데 믿고 있는 칼둔이 졌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구겨진 체면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머릿속이 바쁘기 그지없을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물건을 두고 내기를 벌인 주체가 자신인 이상 형편없이 지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황족이라도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요나라의 남은 선수들을 가리켰다.

“저들 모두와 겨뤄보고자 합니다.”

“뭣이!”

놀란 사람들은 오히려 고려 측이었다. 형편없이 지면 체면이 구겨질 것을 걱정하던 대신들이었기에 내가 연거푸 두 차례 승리를 거두자 체면치레는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만하게도 모두와 겨루겠다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았을까? 이건 자신감이 지나쳐 상대를 능멸한다고 오인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제가 이긴다면 대국이 약속하신 대로 거로와 의대를 내려주시고 그에 더해 한 가지 물품을 왕께 허락해주소서.”

“일개 장군이 내게 흥정을 할 셈이냐.”

야율가모는 인상을 구겼지만, 음성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만용을 부려 욕심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내 요구 조건을 먼저 말했다.

“대사례(大射禮)를 위한 활을 태자께 내려주소서.”

“대사례를 위한 활?”

야율가모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그 뜻을 알아들은 대신들의 반응은 사진기가 있다면 찍어주고 싶을 정도로 볼만했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나 다름없었지만, 정치의 원리는 유학에 있었다. 유학에서 활쏘기란 단순한 무예가 아니라 수신(修身)의 방법으로 쓰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대사례는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올바른 정치를 해나가자는 하나의 약속인 셈이다. 요나라의 황족들은 부절(符節) 대신 활을 신물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야율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야율가모의 활을 태자에게 달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태자가 대사례를 올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미리 인준하는 동시에 안원군절도사와 동급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록에서는 삭주자사(朔州刺史)를 제수받았는데 그것보다 월등히 높아지는 셈이다. 숙종을 중서령으로 임명했었으니 최소한 태자는 절도사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것보다 나중에 낮은 직위를 빌미로 책봉식을 다시 하려는 횟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절도사 위로 줄 수 있는 직책은 아무리 상징적인 검교직이라 해도 현재 숙종이 받을 중서령은 되어야 했다. 그 정도까지 받으면 더 주고 싶어도 줄 직책이 없게 된다. 직계 황족들보다 높은 직위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신단 한 번을 맞이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국고가 쓰이고, 인력이 동원된다.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내년이면 보위에 오를 태자는 내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숙종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다짐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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