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10) 일양내복(一陽來復) =========================================================================
상황이 매우 급해졌지만 그래도 정리할 것은 해야 했다. 일행의 인선이었는데 히카리나 요시치카를 데리고 가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김한충에게 요시치카를 인사시키고 당분간 조정에 배속 사실을 알리지 말자는 뜻을 전달하자 그는 이해했다. 내가 좋은 결과를 낸다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은 것이다.
요시치카는 나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히카리와 함께 고려어를 더 배우도록 일렀다.
“돌아왔다 싶더니…….”
단단히 역마살이 꼈다며 눈을 흘기는 이소였지만 그것이 이소만의 표현 방식인 것을 알기에 가만히 품에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처음에는 히카리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지만 설명을 듣고는 자신이 자매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것처럼 히카리와 잘 지내보겠다고 반응하여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김한충이 낭관을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홀로 가는 것이 편하다며 흑우에 올라탔다. 정주성에서 개경까지 단숨에 달려 삼 일이 지날 때쯤 입성할 수 있었다.
“드디어 왔군.”
가장 먼저 고의화를 찾아가니 그는 근력 배양에 한창이었다. 오십 중반의 나이임에도 한창때 젊은이 못지않은 그의 근육은 나도 모르게 웃통을 벗어젖히게 하였다. 고의화는 내 근육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10년간의 여정을 듣고 나도 그 여정에 끼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오늘 너의 상처를 보니 같이 있었으면 모르되 나 혼자 있었다면 필시 고려까지 다다르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상체는 온통 자잘한 상처 자국이었다. 거의 다 아물었지만, 이 시기 흉터를 지워주는 연고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치료받은 곳은 고스란히 자국이 남았다. 남자 중에는 그것을 훈장처럼 여겨 일부러 과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내 상처를 본 여자들은 대부분 기겁하며 멀리했다. 그리고 이런 흔적을 달고 다니는 남자는 오래 살지 못하기에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말이 항상 따라왔다. 그래서 상처를 보였을 때 이소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소는 나와 있을 때 별다른 감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저 하얀 손가락을 놀려 내 상처를 어루만졌을 따름이다. 나는 그것이 이소 나름의 표현은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각희에는 몇 명이나 참가한답니까?”
“양편 스무 명씩이다. 요에게 복속을 청한 거대 부족의 실력자들과 어전 시합에서 승리한 자들이 주축이다. 나로서는 그런 것을 다 떠나 기마로 겨루지 않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궁술은 고려도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기마술만큼은 그들을 당해낼 자가 부족했다. 내가 10년간 경험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세밀한 운용에서는 태어나서부터 말을 타는 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제시할 수도 없고, 너무 불리한 것을 제시하는 것도 반발을 일으킬 수 있으니 저들이 각희를 선택한 것은 적당한 선택이라고 여겨집니다. 시합은 언제입니까?”
내 질문에 고의화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역시 너답구나. 우리 쪽에서 누가 뽑혔느냐보다 그것이 중요했구나.”
“승자 연전이니 상장군과 저, 둘만 있어도 상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장군께서 양보해주신다면 제가 먼저 나가서 고려의 위엄을 보이겠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이 많은 상장군보다 나이도 직급도 아래인 내가 먼저 나가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낯 간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무래도 삼국지 시절 내가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한 사람은 상황을 잘 살펴 적당히 상대해주어라.”
고의화는 내가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중요한 인물인가 보군요. 적당히 라는 말을 붙이실 줄이야.”
“중요하다. 야율대석(耶律大石)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야율대석?”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낼 뻔했다. 그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의 척준경은 그 이름을 모른다. 놀라고 싶은 마음을 참고 간신히 의문 부호를 입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야율대석은 내가 알기로 십 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일 것이다. 그는 요나라의 태조(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8대손으로 문무에 두루 능한 인재로 알려졌다. 당시 황손이라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관직을 마다하고 과거를 응시하여 당당하게 급제한 후 한림원에 드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가신들은 한인들이 주로 많았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그는 요나라가 망한 후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건너가 그 지역에 진출한 셀주크 제국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카라한 왕조와 호라즘 왕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위용을 과시하며 서요(西遼), 또는 카라 키타이(Kara Kitai)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래서 동양의 사가들은 당시 동아시아의 군사력이 세계 최강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료로 삼기도 한다. 금나라에게 밀려 도망친 인원이 일만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점차 세력을 키워 중앙아시아를 단숨에 석권해버렸으니 말이다. 중앙아시아를 석권한 뒤에도 야율대석은 금나라를 도모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재밌는 변수가 나타난 것에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를 어떤 식으로 상대했을 때, 어떤 파급 효과가 나타날 것인지를 고민한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고민은 사라지고 고의화와 함께 마당에 심어진 아름드리 고목에 발을 차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두 명의 장정이 번갈아가며 발을 내지르자 쿵쿵 소리를 내며 고목이 흔들렸다. 그에 비례해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다.
‘최적의 선택이란 사실은 없는지도 모른다. 잠시간은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틀렸다고 증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 그럼 순리란 무엇인가? 프랭클린 P. 존스는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할 때, 또는 변화시키고자 할 때, 너의 성공만큼 확실하게 바꿔주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삼국지 시절의 내가 그랬다. 내가 본을 보이면 다들 따라오리라고 여겼지.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결과는 대다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성취욕이 아니었다. 다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 생각이 변화해야 한다.’
공자는 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이라는 말을 남긴 바가 있다. 군자는 이유를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는 말이다. 나는 군자가 되고자 했으나 세상은 여전히 소인으로 가득 차 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속에는 정의감이 각자 담겨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정의감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당연스럽게도 우리는 그 이유를 외부 요인으로 돌리며 합리화한다.
분명히 바른 사회는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다수가 생각하는 욕구를 읽어 시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해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의 데이비드 M. 번즈는 ‘완벽이 아닌 성공을 목표로 하라. 틀릴 권리를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경구를 남긴 바가 있다. 성공에 대한 목표의식만 뚜렷하다면 모른다는 것, 틀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이제는 진보는 없다는 것이고 어쩌면 한계를 규정짓는 그릇된 선인지도 모른다. 나는 과거 내가 본을 보이는 것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 가능성은 백성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도덕의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실제 흐름은 인간의 욕망이 도도히 반영된 결과임을 인식했다.
‘욕망과 이성은 조화할 수 있는가?’
욕망은 누구에게나 내재하여 있다. 올바른 욕망은 권장하고 탐욕을 제어하는 것이 도덕의 역할일 것이나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이제이도 써볼 법 하지 않겠는가? 부처께서 그러지 않았는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느냐고.
그날 저녁 나는 고의화에게 미리 이야기하고 이자겸을 찾아갔다. 이자겸은 내가 올 것을 알았는지 느닷없이 찾아왔음에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숙종의 뒤를 이을 예종에게 자신의 딸을 바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이다. 2년 뒤에 차녀가 예종과 혼례를 올리게 되고, 그다음 해에 다시 셋째딸이 예종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신있느냐?”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었다. 그로서는 이번 일이 잘 성사되어 내가 신임을 얻게 되면 앞으로 자신의 행보에 매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음모에 밝다고 해도 이런 일은 승패를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에 판돈을 더 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너를 믿고 조정 대신 몇을 부추겨 추천하기는 했으나 너의 의견을 듣지 못해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오히려 추밀원사가 강하게 너를 원했다고 하니 이번 일이 잘 풀려도 큰 공은 추밀원사가 가져갈 것 같다.”
이자겸으로서도 영 손해는 아니었다. 최소한 의도치 않았던 은거 기간이 점점 짧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종과 혼례를 추진하는 처지에서 안목을 드러낼 수 있는 드문 사건이었다. 이자겸과 간단히 술 몇 순배를 나눈 후 나는 밖으로 나와 선죽교를 거닐었다. 선죽교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10년 전에 자매가 이곳에서 춤을 추었다면, 이제는 그 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사물은 그대로인데 사람만 없다는 옛 시인의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언제고 나에 대해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기필코 보답해줄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의 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숙종은 교외(郊外)에 책봉식을 위한 단을 새로 쌓아 놓고 있었고, 마침내 책봉식을 주재할 요나라 사신단이 도착했다. 제법 거창한 행렬이었다. 황족이라 할 수 있는 야율씨가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려에 대한 요나라의 관심이 각별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고려 역시 숙종과 태자를 비롯해 대소신료가 빠짐없이 참가하여 겉으로만 보기에는 팔관회를 능가하는 큰 연회였다. 백성은 진귀한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높은 나무마다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문하시중 소태보가 접례사(接禮辭)를 끝내고 요나라 사신단이 답례할 차례가 오자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는 오랜 나태한 생활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두꺼운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단하(壇下)를 훑었다. 그 모습이 하도 오만하여 단하를 지키고 있던 장수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을 정도였다.
“대요와 고려는 형과 아우로 백 년을 지내왔다. 오늘의 책봉식은 천자께서 형애제공(兄愛弟恭)의 아름다운 예를 본받아 은혜를 베푸는 것이니만큼 고려는 아우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요나라의 대외 정벌에 고려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조공이 도움이라면 도움이라고 칠 수 있겠지만,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것을 야율가모는 에둘러 불만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근래 발해 유민들과 여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자신들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각희는 책봉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여흥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야율가모가 답례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단하는 미리 마련된 원형의 띠가 둘렸다.
단상을 힐끔 보니 숙종은 무표정한 안색이었고, 사신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야율가모는 재밌는 구경을 빨리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흥분이 가득했다. 자신들이 압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숙종과 중신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수 입장이요!”
북과 징이 요란하게 울렸고, 나팔 소리도 들렸다. 요나라 병사들은 양팔을 올리며 환호를 질렀고, 그들에게 감염되었는지 일부 백성도 흥에 겨워 환호를 질렀다. 한 명, 한 명이 입장할 때마다 순수한 탄성이 흘러나왔는데 그들의 체구가 하나같이 일반인보다 머리 하나는 클 정도로 거구였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고르고 고른 선수 스무 명도 입장을 시작했는데 고의화가 맨 마지막이었고, 내가 바로 그 앞이었다.
“응?”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요나라의 선수 중 일부가 어디서 많이 보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힐셀렘! 마힐셀렘!”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내 이름을 외치며 뒷걸음질치는 이들은 여섯 명이었는데 나머지 선수들은 나를 보며 두려운 표정을 짓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마힐셀렘은 만곡도(彎曲刀)를 가리키는 말로 기마민족들이 흔히 쓰는 칼의 이름이다. 내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월도 역시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며 얻은 만곡도의 일종이었다. 내가 당시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때 입은 차림새가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군의 복장과 거의 흡사했었다. 가죽 투구에 가죽옷, 그 위로 가벼운 비단을 펄럭이도록 걸친다. 마치 서부 시대에서 앞뒤로 가죽을 걸친 것과 같은 형상이다. 가장 치명적인 화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인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화살의 특성상 투구를 쓰면 머리가 공격당할 일은 없었고 대부분 몸과 팔다리에 맞게 되는데 화살이 가죽 갑옷과 비단을 통과하며 몸에 박혀도 그 상처가 매우 미미하거나 비단을 잡아당기면 화살이 쉽게 몸에서 빠져나오는 효능이 있었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자 나를 따라 하는 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 병기인 마힐셀렘을 기가 막히게 다룬다며 나를 마힐셀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케레이트(Kereit, 克烈)인가?"
이 시기 유목민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중에서 제법 큰 무리가 존재했다. 큰 무리 중에서도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강성한 세력은 케레이트밖에 없었다. 칭기즈칸이 어려웠던 시절 동맹을 제의했을 정도였으니 지금 요나라에서도 제법 중요한 속국이었다.
대충 인종들을 보아하니 케레이트, 타타르, 돌궐, 거란 등 여기저기서 뽑혀 온 티가 역력했다. 내가 거쳐온 행로는 대부분이 케레이트의 영역이었기에 그들과 악연, 또는 일부 선연으로 엮여 있었다. 타타르도 워낙 부족 수가 많아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케레이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타타르도 마힐셀렘이란 이름은 들어보았던 모양이다. 케레이트의 전사들이 뒷걸음질치며 나를 손가락질하자 그들은 ‘정말이냐?’를 연발하더니 함께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추태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야율가모가 소리를 빽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고려 쪽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