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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77화 (77/257)

00077  (10) 일양내복(一陽來復)  =========================================================================

나는 주변을 살핀 후 글자가 새겨진 돌의 틈을 찾아 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단단하게 박혀 있는지 돌은 좀체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간간이 글자에 호기심을 보이는 향화객이 있습니다.”

돌을 빼느라 열중하는 사이 나를 안내했던 중년승이 다가온 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다.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노자가 남긴 단어가 왜 사찰에 적혀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었지요. 10년 전에 작은 지진이 일어났는데 돌 틈이 벌어져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절로 가벼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없다니? 그럼 소동파나, 우마르의 예측은 틀린 것일까? 중년승은 나의 한탄이 단순한 아쉬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움직였는데 돌 밑에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의 문구를 탁본으로 떠놓았으니 따라오시면 보여드리지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두세 글자 정도밖에 적지 못할 벽돌 하나 정도의 면적에 무엇이라고 적었을까? 혹시 실록이 숨겨져 있는 위치를 알려줄 단서가 되지 않을까?

그러다 대웅전 뒤 작은 암자에서 탁본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한참을 우뚝 서 있었다.

-재생연(再生緣)

그 글자는 필시 아명 공주의 뜻이 담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지를 이어 절을 창건하면서 오랜 선조의 소원도 함께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한 것인지도 몰랐다.

‘실록은 애초에 이곳에 없었구나.’

허탈할법했지만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도 팔백 년의 세월을 넘어 아명 공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와의 인연을 계속하고 싶다니…….’

아명 공주와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와 고구려에게 압박을 당하고 있던 신라가 정략의 수로 택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화살을 맞고 오래도록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녀가 정성을 들여 나를 간호할 기회가 없었다면 내 성정으로는 그녀를 그대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그녀의 헌신을 알았기에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 헌신이 애정이 아니라 신라를 위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에게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녀로 말미암아 타국에서도 혼인 동맹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협상 도중에 죽어버린 조조의 딸, 청하 공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후 15년이 지나 나와 근 30년 나이 차가 나는 마지막 아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인과의 작용이었다.

“제가 알아보니 옛 신라의 사찰에는 앞서보신 것처럼 같은 자리에 석판이 있다고 합니다. 신라 초기 어려웠던 국제 정세를 타파하기 위해 정략혼을 결심한 아명 공주가 천수를 다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소원이었다고 하더군요. 정략혼이라고는 하나 두 분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알려져서 후손들은 다시 그 인연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사찰을 건립할 때마다 석판을 불탑 바닥에 박았다고 합니다. 불탑을 보며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시주들의 마음이 석판에 모이기를 원한 것이지요.”

고구려나 백제는 내가 아명 공주를 받아들이자 재빨리 신하들을 보내 자신들도 같은 기회를 줄 것을 종용했지만 내가 왕건도 아니고 더 거둘 자신이 없어 거절했다. 결국, 그들의 후예와 내 아들들이 연결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었다.

나는 문득 열한 명의 아내와 한자리에 모였던 날이 떠올랐다. 내 나이 오십이 넘은 어느 해였다.

같은 꿈은 비단 동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항시 튀어나오는 국정에서 벗어날 때면 나는 아내들과 소소한 대화를 즐겼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가정사를 부부가 함께 상의하는 것만으로 부부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진다는 말처럼 매번 함께 모여 지난 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감은사를 빠져나왔다. 실록은 찾을 수 없었지만 팔백 년을 뛰어넘어 아명 공주가 나에게 남긴 전언은 오랜만에 아련한 회상과 그 시절의 행복감을 추억하는 큰 선물이었다.

그렇게 수군 선박이 정박하여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제법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낯선 고려군이 수십 명은 되어 보였는데 그들은 한창 불을 밝히며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포구에 들어선 것을 보자마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오랜만일세. 나를 기억하겠는가?”

서른중반 정도의 그는 싱긋 웃고 있었다. 10년 전 숙종이 거사를 일으켜 성공한 직후 베풀어진 연회에서 만났던 안동부 부사 조경이었다.

“안동부에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10년이 넘었는데 어찌 안동부에만 머물러 있겠는가? 3년 전에 덜컥 병에 걸렸는데 의원들이 장기 요양을 해야 낫는 병이라 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는데 폐하의 은혜로 경주 판관(判官)이 되어 이곳에 머물러 있던 참이지. 이제 병이 좀 나아졌다 싶더니 황감하게도 이번에 공석이 된 전주목사(全州牧使)에 제수되지 않았는가? 그 소식을 들은 지가 아침인데 자네가 장군이 되어 턱 하고 10년 만에 나타났으니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싶었네.”

부사(府使)는 품계는 조금 낮아도 지방 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에서는 부사라는 같은 명칭의 다른 직책이 세 자리가 있는데 3품 이상의 중앙고위직, 5품 이상의 지방 장관, 6품 이상의 지방 수령으로 나뉜다. 그는 그중 5품 지방 장관에 해당하는 부사였고, 판관은 7품에 불과한 지방 한직이니 판관으로 한동안 지냈다는 것은 좌천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병을 요양할 동안의 명예직으로 준 것이니 명문가가 아니면 받기 어려운 혜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경주는 경주라는 이름이 이미 생겨난 뒤다. 그래서 계림과 경주를 혼용해 부르는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때에 따라서 행정 구역의 명칭을 계림, 경주로 번갈아 쓰게 된다.

“전주목사라면 해주 오가의……?”

“10년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몰라도 잘 알고 있군.”

윤관이 여진과의 전투에서 패하는 사이 숙종은 측근인 전주목사 오연총을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전주목사라는 외직을 준 것도 반대파가 능력과 경력을 가지고 늘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숙종은 오연총이 재상의 재능이 있다고 보았고, 그 기대대로 전주목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잘 알려진 윤관보다 능력 면에서는 오연총이 앞선다는 인상을 준다.

“이번에 요나라에서 사신들이 대거 몰려와 책봉식을 할 모양이네. 아무래도 국내 사정이 어려운 것을 반영하는지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속셈이 틀림없겠지. 오연총을 불러들인 것도 그에 대한 대비인 셈이고.”

그러고 보니 책봉식이 이쯤이었다.

요나라는 제위에 오른 지 10년이나 된 숙종과 태자에게 책봉식을 수여하고 자국의 위상이 살아 있음을 만방에 과시했다. 현대적인 시각이라면 굴욕적일 수도 있지만, 이 시기 외교의 한 단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대국의 작위와 식읍을 올려준다는 핑계로 책봉식을 해버리면 꼼짝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요나라에서 고려왕에게 자국의 식읍 오천호를 내리겠다고 하며 책봉식을 거행한 후, 이듬해 칠천호로 증액하겠다고 하며 책봉식을 다시 거행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주목사로 가게 된 것이 너무 아쉽네. 자네를 도성에서 볼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말일세. 지금 도성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아직 모르고 있었나?”

내가 모종의 임무로 바다에 있었다고 하자 그는 이해한 눈빛으로 설명해주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는지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렀다.

요나라에서는 숙종과 태자의 책봉을 따로 하기 위해 두 명의 사신단이 파견되는데 안원군절도사(安遠郡節度使) 야율가모(耶律嘉謨)가 숙종의 책봉식 사신이었고, 태주(泰州) 관찰사 야율사부(耶律師傅)가 태자의 책봉식 사신이었다.

이들은 무례한 성품이기도 하고 평소 내기를 좋아해서 요나라 황제가 고려국왕에게 내려준 거로(車輅, 천자가 타는 수레)와 의대(衣?, 임금의 옷과 띠)를 놓고 숙종에게 여흥을 제의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거느린 무사들과 각희(角戱, 씨름)를 벌여 이긴다면 거로와 의대를 온전히 내어주고 사죄의 표현으로 상반신을 탈의하고 춤을 거하게 춘 후 임금에게 죄를 청하겠다고 했다. 만약 자신들이 이긴다면 임금이 대(臺)에서 내려와 거로를 끄는 말의 고삐를 끌고 세 걸음을 걸은 후 ‘천자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를 외치는 조건이었다.

사실 은혜를 말하는 것은 매양 있는 외교적 수사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천자가 타야 할 거로의 말 고삐를 끈다는 것은 요나라 황제의 말 취급 당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다. 사신들이야 숙종 자신이 탈 수레의 말 고삐를 한 번 끌어 보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며 밀어붙였겠지만, 어쩌면 이런 의도적 논란을 통해 고려가 보여줄 행동을 예의 주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미 고려가 여진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고려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요나라는 충분히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요나라는 매년 축제를 통해 각희의 최강자를 뽑는데 최근 몇 년간의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조정이 비상일세. 이기면 다행이지만 각희가 고려에서 흔한 유희도 아니지 않은가? 부랴부랴 양계와 각 도호부에 각희가 능한 자를 수소문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들었네. 그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이가 바로 자네와 상장군(上將軍) 고의화일세.”

대정에 불과했던 고의화가 어느덧 상장군이라니 참으로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그는 전쟁에 출진하기보다 주로 왕의 측근으로 활약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예종 때는 병부상서까지 오르고 관직에서 사직할 때쯤에는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이 시기 고려 왕실이 평안했던 것은 그의 활약이 한몫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살아서 이자겸의 난을 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재미난 생각도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고의화의 나이도 어느덧 오십 중반이었다. 아직 펄펄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예전만은 못할 것이다.

“추밀원사는 그들의 요구를 듣고 승자 연전(連戰) 방식으로 해줘야만 응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하더군. 그것이 받아들여진 직후 자네를 추천했다는 것을 보면 정말 자네를 높이 본 것 같네. 인원이 최소한 열 명에서 많게는 스무 명까지 온다고 들었는데 자네는 자신이 있는가?”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명성을 쌓고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내기였다. 고의화와 오랜만에 함께 나서게 된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정주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조경은 떠나려는 나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다.

“요나라의 무리한 부탁이야 어디 한두 해였던가? 송으로 가는 사은사 일행도 번번이 방해한 그들인데. 조정의 대신 중에는 그냥 시원하게 져준 후 은혜를 외치는 것이 천자의 신임을 받는 방법으로 더 좋다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하더군. 정신 나간 자들이지. 고려가 요를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껏 그들의 비위를 맞춰준 것은 어디까지나 애꿎게 희생될 백성과 영토, 전쟁으로 낭비될 재원 때문이었네. 계속 우리를 자극한다면 백 년 전으로 돌아가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겠지. 더구나 지금의 폐하는 매우 자존심이 강한 분이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말 고삐를 잡는 일은 없을 것이야. 만약 우리 고려가 내기에서 진다면 그날로 요나라와 전쟁이 일어날걸세.”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십니까?”

“폐하께서 자존심을 조금만 꺾으셨다면 애초에 내기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네. 이런 식으로 전쟁이 나서 나라가 엉망이 된다면 후세는 그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가? 요나라에게? 아닐세. 폐하께서 모든 멍에를 지실 것이네. 나는 그것이 안타깝네.”

“전쟁이 일어나면 요나라에게 지리라고 확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침입을 허용한 순간 우리는 무조건 손해일세. 백성이 다치고 영토가 유린당하고 난 후 나중에 그들을 쫓아냈다고 해봐야 처음으로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조경의 인식은 이 시기 보기 드문 신선한 감각이었다. 어쩌면 이 사람과 다시 일할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헤어지고 우리는 즉시 출항했다. 정주성 인근 포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기도 전에 김한충과 강증이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왕명이 떨어졌는데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노심초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여진이라는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요나라가 시비를 걸어와서 유능한 장수를 도성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김한충의 표정이 어두웠다.

하긴 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면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간신히 동계의 후계를 정했다고 생각한 그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나로서도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하여 동북 9성을 쌓는 순간까지는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기필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굳게 약속을 한 후에야 김한충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러나 숙종이 거부하면 그 약속이 깨질 가능성은 여전히 있었다. 그것까지는 김한충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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