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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76화 (76/257)

00076  (10) 일양내복(一陽來復)  =========================================================================

“오오에노 마사후사와의 교섭은 일임하도록 하지. 아, 이곳에 모인 병사들과 지지자들은 얼마나 되는가?”

“대략 일천을 헤아립니다.”

이들을 내가 타고 온 고려 전선에 태울 수는 없었다. 그 많은 사람을 이동시키는 일이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오오에노 마사후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때 다타라 히카리가 끼어들었다.

“대업을 꿈꾸면서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닌가요? 쓰시마에서 병력을 키울 생각이신가 본데 그곳은 사람이 숨어 살기에는 적합해도 농사를 짓기에는 어렵습니다. 많은 이가 한꺼번에 몰리면 식량을 필히 수입해야 하는 곳이라 배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면 조정의 의심을 살 수 있지요.”

제법 타당한 논리였다. 나는 이 당돌한 소녀의 말을 더 경청하기로 했다.

“마사후사 님이 요시치카 님의 수급을 취한다는 것은 대단한 전공입니다. 쓰시마 같은 하국이야 얼마든지 교환할 가치가 있지요. 제 생각은 쓰시마보다 차라리 견도(見島)를 달라고 하십시오.”

“견도?”

내가 그 위치를 잘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이미 내 수하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역관이 재빨리 곁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나가토국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섬입니다. 800정보 되는 작은 섬입니다.”

800정보면 쓰시마 전체 면적의 10%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나는 팔짱을 끼며 히카리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대륙에서 혼슈 북부와 교역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미 300년 전부터 포구가 형성되었고, 현재는 나가토국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나가토국에게 제법 요긴한 땅이니 그 땅을 얻는다면 그들이 곤란해질 것이란 말이냐?”

“물론 그런 뜻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려의 관심이 덜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위치가 참으로 절묘했다. 본토에서 북쪽으로 대략 45km 떨어져 동해 상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지만 그곳을 잡고 있으면 동서 무역로를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조정의 주목을 받기 쉽다는 뜻도 되었다.

“그곳은 포구를 제외하고 인근이 암초로 되어 있어 함부로 상륙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제대로 된 궁수가 오백만 있으면 본토 전 지역의 수군을 끌어모아도 공격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정은 잔당이 그곳으로 숨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육지로 진출할 의도 없이 약간의 해적질이 뒷받침된다면 조정에서는 곧 관심을 끊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가토국의 모노노베 일족이 해결해야 할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땅은 작지만 본토에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무엇보다 쓰시마보다는 고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제가 가문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허락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녀가 돌아가기를 희망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럴 뜻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아버님께 대강의 사정을 말씀드리면 가문이 소유한 배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 배로 이주를 시작하면 됩니다. 모노노베 일족은 잔당들이 아버님의 비호를 받으며 견도로 들어갔다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실제로도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은 교란이면서도 교란이 아니기도 했다. 나가토국을 상대로 해적질하되 다타라 가문의 스오국은 무사통과 시켜주는 정책을 펼친다면 누구라도 잔당이 다타라 가문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다겐지로서는 반란의 수괴가 죽고 잔당만 남은 상황에서 그것도 천혜의 섬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이 다타라 가문과 한통속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결과였다.

이즈모국 동부를 차지한 자신들의 경쟁자가 될 것이 분명한 이즈모국 서부와 나가토국, 이와미국의 해상 교통을 모두 견제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도 고려의 영향을 받았는지 반란자의 가문을 멸족시키거나 씨몰살을 시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최소한 가문의 명맥을 잇게 해주거나 주모자를 처단하면 일부는 놓아주는 성향을 보였기에 요시치카의 수급이 베어졌다고 소문이 퍼지는 순간 반란 사건은 그 자리에서 종결될 가능성이 컸다.

더구나 후쿠오카 일대를 관할하고 있는 마사후사도 요시치카의 잔당이 해적 세력으로 변모하여 동해 교역로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이 생기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였다.

나는 역관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쓰시마를 주려고 했는데 그곳보다 열 배나 작은 섬의 대리인이 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뜻밖에 역관은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저도 쓰시마의 변화가 왜상이나 고려 상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습니다. 견도가 비록 작기는 하나 평지와 구릉 지대가 대부분이라 산지가 월등히 많은 쓰시마에 비하면 사람 사는 환경은 더 좋습니다.”

히카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히카리를 수하로 맞이한다는 것과 같았다. 요시치카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히카리의 제안이 내 제안보다는 괜찮은 생각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즉시 지쿠젠과 다타라로 사람이 파견되었다. 나는 그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역관, 요시치카 등과 마을 신사가 자리하고 있는 작은 산성에서 앞으로의 행보를 두고 의논을 주고받았다. 수군은 육군과 비교하면 숙련도를 엄청나게 필요로 하는 병과이니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교역선을 공격해야 하는 일도 있겠지만, 최대한 인명 피해는 줄이도록 지시했고, 숙련된 선원은 잘 구슬려 한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했다.

역관의 가족을 견도로 데리고 오기 위해 사는 곳을 물었는데 다행히도 고향이 경주 인근이라고 했다. 문무대왕릉과도 가까워 나는 이번에 정주로 돌아가기 전에 꼭 들려보기로 했다. 실록을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문무대왕릉은 한 번쯤은 가봐야 했으니까 말이다.

역관과 스케미치는 섬의 정무와 군무를 나누어 처리하기로 했고, 요시치카는 죽은 것으로 알려질 것이니 당분간은 나를 따르기로 했다. 스케미치는 자신도 따라가야 한다며 떼를 썼지만, 역관이 군사를 다스릴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칠일 정도를 머무르자 보냈던 사람이 속속 도착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그 성과가 더 좋았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장한 일을 했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어요. 얄밉던 모노노베 일족 턱밑에 비수를 박아넣은 것과 같았으니까 말이지요. 오십 척의 배를 선뜻 선물로 내주신 것도 한시라도 빨리 나가토국을 노략하라는 격려라고 하셨으니 그 기쁨을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다시 만난 히카리의 이는 더는 검지 않았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스오국의 특산이 매실이라며 품에서 작은 자기를 흔들어 보였다.

“고려는 흰 이를 가진 것이 미의 기준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우리는 백제 왕실의 일원으로 처음부터 흑치의 풍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백제와 왜는 각기 환경이 달라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 다른 것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고려로 가고자 한다면 고려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기 위해 단단히 작심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은 그녀만의 속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강의 사정을 들은 다타라 가문의 가주는 고려의 장군과 인연을 맺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오십 척의 배를 선뜻 내놓을 수 있는 배포로도 가늠할 수 있다.

마사후사가 전선을 이끌고 오기 전에 나는 고려 수군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요시치카는 일단 남아서 마사후사를 만나기로 했는데 아버지에게 전언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역사대로라면 요시이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직접 밝힐 수는 없었으나 그가 고령이라는 점을 내세워 신중하게 뜻을 밝히라고 충고는 해주었다.

낭장은 역관이 올라타지 않자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내가 따로 임무를 주었다고 하자 딱히 별다른 의문을 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일도 없이 있는 것이 지루한지 고려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강증의 명으로 이곳에 온 만큼 내 독단으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마침내 견도에서 요시치카와 히카리를 태웠다. 역관은 직접 낭장에게 모습을 드러내 내가 내린 임무가 있다며 당분간 견도에 남아야 한다는 말로 약간의 의문도 불식시켰다.

그리고 문무대왕릉으로 향했다. 경주는 신라의 천년 고도였고, 지금 이 시대도 여전히 그 성세가 남아 있어 수군의 감시 역시 철저했다. 보급을 핑계로 문무대왕릉 바로 앞 포구에 배를 세웠다. 경주 도성에서 문무대왕릉까지는 대략 34km 정도 되기 때문에 나를 영접 나온 것은 대왕암 해변 인근에 자리한 지방 현령이었다. 보급 정도로는 계림부에 보고를 올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가볍게 넘겼지만, 나로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흔적이 남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요시치카와 히카루는 따라오고 싶어했지만 선실에 조용히 있도록 했다. 괜히 밖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쪽배를 타고 홀로 문무대왕릉 앞에서니 감회가 서렸다. 현대에서 여러 차례 경주를 방문했던 나였다. 문무대왕릉은 일부러 찾아오기보다 근처 맛집에 들렀다가 잠시 사진을 찍는 관광지로만 기억되고 있었는데 가공하지 않은 천연의 모습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대왕암에 오르자 동서남북 사방에서 바닷물이 들고 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바닷물이 만나는 안쪽은 잔잔하기만 했다. 파도를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전 초음파로 문무대왕릉을 조사하는 다큐물을 재미나게 본 적이 있었다. 능으로 짐작되는 중앙의 판석(板石)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밝혀져 유골이나 부장품을 담은 것이 아니라 화장한 것이 아닌가로 결론이 난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이 맞는다면 저 판석 아래는 약간의 가루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바닷물에 옷이 젖는 것을 감수하고 샅샅이 뒤졌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 보관한다면 그 많은 책자를 썩히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와 조선의 실록은 모두 수호사찰을 두고 승려들에게 사고(史庫)의 운영과 보호를 맡겼다. 그렇다면!”

현대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 내가 미처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문무대왕릉 인근에도 아주 유명한 절터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문무왕이 왜구를 진압하고자 짓기 시작한 절이었고,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아들인 신문왕이 뒤를 이어 완공시킨 절이었다.

“사적 31호 감은사지(感恩寺址)!”

감은사지 삼층 석탑으로도 유명한 절터지만 지금은 절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때다.

“아들 신문왕은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이 되겠다고 천명한 문무왕이 쉽게 승천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고 하지.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삼층 석탑에는 사리함을 넣었다. 내가 알기로 두 탑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큰 탑이니 사리함 외에 실록을 넣어둘 공간이 될 것이다.”

이 시기 불탑을 해체한다는 것은 큰 중죄였다. 그러니 현대에 와서야 겨우 사리함이 발견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탑에 없더라도 감은사 내부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감은사로 향했다. 처음에는 불력으로 왜구를 막기 위한 수호사찰의 형태였지만 문무왕이 건설 도중 죽자 아들 신문왕은 문무왕이 용으로 승천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절로 목적을 바꾸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절까지 연결되어야 했다. 그래서 동해로 흐르는 용당천(龍堂川)을 중심으로 절이 건축 되었는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절의 형태가 바로 그러했다.

관광으로 절터를 보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치솟았다.

“장군께서는 어인 일로 본사에 방문하셨습니까? 향화(香火)를 하러 오셨는지요.”

보급을 위해 잠시 들른 것은 이미 포구에 널리 알려졌었다. 근처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 이곳이니 배들이 여러 척 들어온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승려 뒤로 보이는 전각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개성 인근의 절들에 비하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삼라만상이 부처님의 풍도로 가득하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품에서 왜은(倭銀)을 잡히는 데로 집어주었다. 요시치카와 히카리는 제법 많은 왜은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 일부를 내게 준 것이었다. 이 시기의 불교는 세속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승려는 생각보다 많은 시주에 놀라는 눈치였으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관음보살의 현신인 양 극진한 예로 안으로 들였다.

정문을 넘자 용혈이 있다는 금당과 두 개의 불탑이 바로 보였다. 금당이 절의 한가운데 있으니 그것을 기점으로 뒤로는 대웅전일 것이다. 현대의 발굴 조사 결과를 보면 동서 두 개의 탑 중 서탑은 진신사리(眞身舍利)임이 확실하다고 했고, 동탑은 문무왕의 사리인 것으로 추정했다.

대웅전에서 향화를 마치고 나는 산보를 이유로 절을 한 바퀴 돌았다. 아무리 보아도 뭔가 있을만한 장소는 두 탑밖에 없었다. 석양이 밀려들기 시작할 때라 인적은 드문드문하여 나는 두 탑을 유심히 살필 수 있었다. 그러다 동탑의 아랫부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건?”

서탑과 동탑이 유일하게 다른 부분이 남쪽에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발판의 유무였다. 그곳에는 한문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람(玄覽)

‘아명 공주.’

아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명 공주를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민둥산이었을 때도 사람들은 그곳을 산이라 불렀지, 언덕, 큰 바위, 구릉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소. 선왕 전하의 자존심은 고집불통이란 인상을 주었지만, 말년에 이르러 소신이 있다는 평을 들었소. 똑같은 성격임에도 달라진 것은 하나였소. 배려였소. 스스로 내면의 바다에서 끄집어 올린 배려란 씨앗 하나가 자존심이라는 민둥산에서 싹을 틔웠고 백성은 그 싹에 더해 나무를 심었소. 둘 중 어느 하나가 빠져 있었다면 우리는 민둥산이 푸른 산이 되는 과정을 이토록 일찍 보지 못했을 것이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오?

현람이란 그 당시 내가 한 말을 이후 저서에서 한마디로 응축한 것이었다. 감성 및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저절로 느껴지는 ‘직각(直覺)’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만든 말이 아니라 노자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는 단어인데 노자의 단어가 사찰, 그것도 사리를 보존하고 있는 석탑 발판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일본편 지도를 간략하게 표기하여 설정란에 올려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담으로 이북 13권 교정을 보느라고 연재가 늦었습니다. 교정 원고를 넘겼으니 곧 나오리라 봅니다. 또한 종이책 출간에 대비해 외전도 틈틈이 집필하고 있습니다. 11명 부인 중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인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고, 훈족 격퇴에 대한 내용, 몇몇 주요 인물들에 대한 뒷이야기등을 실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재분에 반영하는 것은 아마도 책이 나온다음에 올리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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