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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75화 (75/257)

00075  (10) 일양내복(一陽來復)  =========================================================================

한 자루의 장도와 한 자루의 월도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제 곧 석양이 저물 시간, 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치고는 맑고 경쾌한 소리의 연속에 간간이 불꽃까지 튀는지라 어느새 우리 주변으로는 많은 사람이 조심조심 모여들었다.

싸우면서 느꼈다. 요시치카가 강하긴 했지만, 그는 자라온 환경상 기마에 능숙하지 못했다. 기마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따로 하체 단련을 받지 않는 이상 허벅지의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더구나 이곳은 백사장이었다.

공방이 거듭될수록 요시치카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과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간간이 빈틈도 보였지만 나는 그의 입에서 항복이란 소리를 들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진정한 힘의 차이를 느끼도록 해주고 싶은 것도 있었고, 지켜보고 있는 주변인들에게도 실망감보다는 아쉽고 아까운 마음이 더 크다면 이번 비무의 결과로는 괜찮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상대한 것은 이곳 이즈모 지역이었고, 그가 8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을 상대한 방법은 술을 먹여 잠재운 후 일거에 베는 방법이었다. 전신을 난자하다가 괴물의 꼬리에 칼이 닿게 되었는데 무척 단단한 것에 부딪힌 듯 칼날이 부러지자 그곳을 헤쳐보니 한 자루의 칼이 나왔다. 그 칼이 바로 일본 왕실의 삼신기 중 하나로 알려진 구사나기(草?)의 검이다.

요시치카가 칼을 제대로 쥐기에도 어려울 정도가 되자 나는 그를 향해 일갈했다.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처치하고 구사나기의 검을 얻었으니, 이제 나 역시 그대라는 신검을 얻겠다!”

허공을 가르며 수직으로 월도가 그어졌고, 요시치카는 장도를 교차시키며 막으려 했지만 자세는 유지한 그대로 검만이 튕겨 백사장을 굴렀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어쩌면 요시치카를 데리고 가려는 내 시도는 무의미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평야 전투보다는 산악 전투에 능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진이나 거란을 상대하기 위해 만주 벌판을 숱하게 달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필요성은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본연의 실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나 하기에 따라 그의 진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얻지 못했던 일본인 수하를 두고 싶은 얄팍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피식 웃으며 월도를 허리춤에 맸다.

“승복하기 어렵다면 다시 겨뤄볼까?”

천천히 요시치카에게 다가갔다. 요시치카는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하여 그대 같은 자의 대명(大名)을 알지 못했지? 아니면 고려의 장군은 그대처럼 강한 것인가?”

“고려의 장군 모두가 나처럼 강한 것은 아니다. 내가 특별한 것이지.”

“스스로 광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는 더하구나.”

요시치카는 자세를 풀며 피식 웃고 있는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요시치카의 질문은 기억을 되찾은 후 계속해서 고민했던 문제였다. 내가 품었던 고결한 이상은 결국 중국의 일반적인 왕조의 개국과 별다를 바 없는 끝을 보여주었다. 영향이 없지야 않았지만, 세상은 대다수는 여전히 욕망의 바다다.

군자가 되고자 하여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군자를 원하는 자는 많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고결한 대의는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희생해야 가능한 것이고, 대다수는 자신의 것을 내놓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꿈꿔야 하는가? 그것은 용이 되느냐, 뱀이 되느냐의 질문과도 같은 격이었다.

‘나는 많은 이들과 같은 꿈을 꾸고자 했다. 그 꿈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이라고 한다. 이미 이뤄진 것은 현실이지 꿈이 아니다. 내가 세운 꿈은 이뤄졌지만, 일장춘몽처럼 흩어져버렸다. 그렇다고 그 꿈을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동경(憧憬)이다.

‘뭣?’

나는 어느덧 심상(心想)에 빠져 있었다. 그 심상에는 삼국지의 이준경과 고려의 척준경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젊은 척준경은 오만한 태도로 나를 굽어보았다.

-누군가 나를 닮고 싶어하는 것, 따라 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동경이다. 군자란 무엇인가? 오욕칠정을 억제하면서도 만인을 위한 삶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으니 우리는 그들을 군자이자 성인이라 부른다. 인민이 그들을 보는 시각은 동경이 아닌 경외(敬畏)라고 한다.

‘동경과 경외?’

-그렇다. 경외는 자신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이상적인 삶에 대한 찬사다. 반면에 동경은 가능성이다. 나도 노력하면 저 사람만큼 할 수 있겠다는 현실적인 목표치다. 그대는 만인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 왕이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떠한가? 그것은 왕이 아니라 신이다.

갑자기 하마단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마단이 순례지가 된 것은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진왕(眞王)이 되어라.

‘진짜 왕? 만인에게 동경, 또는 현실적인 모범을 심어줄 수 있는 왕이 되라는 것인가?’

-꿈이란 깨면 사라지는 것이다.

젊은 척준경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나는 망연한 시선과 함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꿈을 꿨다는 사실은 남아 있지 않은가?’

이성과 감정의 충돌이라도 될까?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내 앞에는 요시치카가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었다. 내 침묵이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다.

“세상의 모든 위기를 겪어 보고 싶지 않은가?”

“위기? 그대 같은 자에게도 위기란 것이 있나?”

“위기란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 모든 힘을 다해 돌파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결코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 人は一代名は末代.(인생은 한 세대지만, 명성은 영원하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일어 문장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왕, 또는 천자는 신의 화신을 뜻하는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힘이 왕과 함께한다고 믿어 비가 오지 않으면 천자가 기우제를 지냈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천자에게 하늘의 힘이 전해지지 않았다며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국가적인 재난이 모두 천자의 책임이었다.

자연의 운행이 모두 천자의 담당 아래 있다고 생각하니 왕의 인격은 곧 우주와 다름없었다. 아니 그렇게 돼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여러 사람을 설득하며 요순의 치세를 들먹인 것은 그런 사고방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요순시대를 꿈꿀지언정 그 시대로 온전하게 돌아가고자 외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정치, 사회, 문화가 여러 혼란을 거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현 인민의 ‘생각’은 중요하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기득권층과의 충돌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기 전 유언으로 ‘가장 강한 사람’에게 제국을 넘기겠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강한 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어떤 자들은 알렉산더 사후 부하들에 의해 제국이 갈라진 것을 두고 사가들이 알렉산더를 면피하기 위해 가상으로 넣어준 일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가상이면 어떻고 진짜면 어떻겠는가? 강한 자라고 믿고 있는 자들의 충돌은 상당수 기득권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기득권층이 생겨나고 기존과 다른 새로운 사조(思潮)가 싹을 트게 된다.

“패왕(覇王)이 되려는 것인가?”

“패왕? 아니, 나는 진왕이 되려 한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내 등을 맡기고자 한다.”

젊은 척준경의 뜻을 꼭 따른 것은 아니었다. 진왕이란 의미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했다. 진짜 왕이란 대체 무엇일까? 과거와 미래를 모두 궁구(窮究)할 수 있어야 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서 이미 그 답을 내는 과정을 답습했다. 스스로 던진 질문의 답은 이후 내 행동이 말해준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놀란 것은 역관이었다. 그는 내가 왕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떠올리자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으니 그가 뒤로 물러나도 나는 태연했다.

“내 등을 맡겠는가?”

요시치카는 나를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소. 아무래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작은 한숨을 내쉴 정도로 김빠지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상은 웃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무릎을 굽혔다.

“어떤 신하도 왕의 등에 숨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반전했다. 나는 요시치카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때 나와 요시치카 사이에 끼어드는 작은 인영이 있었다. 다타라 히카리였다.

“저도요!”

“감히 요보가 낄 자리가 아니다!”

요시치카의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그러나 다타라 히카리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았다.

“그래요 저는 요보에요. 그러나 처음부터 요시치카 님께 바쳐질 목적으로 길러진 요보지요. 가문에서 저를 우다겐지에게 보낼 때부터 이미 저는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에게 열 명이 넘는 딸이 있지만 가문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며 조정의 공경,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선물처럼 뿌렸지요. 과정이야 어쨌든 우다겐지가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니 자식으로서는 할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제 인생이지요.”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가정이고 아직 역사대로 결말이 난 것은 아니었다. 결말을 알고 있기에 요시치카를 설득할 수는 있었지만 다른 자들은 과연 그럴까? 원래 차지했어야 할 자가 아닌 다른 자가 이곳을 차지하더라도 원래 일어나야 할 내전은 일어날 것 같았다. 내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내가 우다겐지의 분가, 아마고씨나 토벌군으로 올 마사모리 같은 자들을 배려할 이유는 없었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비밀을 들은 사람처럼 뒤로 주춤하던 역관을 큰 소리로 불렀다. 내가 손짓을 하자 그의 안색은 창백해졌는데 요시치카의 사병들이 버티고 서 있으니 더 갈 곳도 없었다.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고려의 장수다. 고려가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 나 역시 고려와 척을 질 일은 없다.”

“그 말씀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을 찾을 것이다.”

역관의 눈이 커졌다. 강성한 요나라와 거친 여진을 물리쳐야만 이뤄질 수 있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중인의 신분이지.”

“그렇습니다.”

“나를 따르겠다면 그대에게 쓰시마를 주겠다.”

“쓰…… 쓰시마를 말입니까?”

음성이 격하게 떨렸다. 역관이란 신분은 서자 출신이나 상인층에서 주로 나왔다. 영주란 자리는 언감생심이었으니 고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쓰시마는 제가 오키로 귀양을 떠난 후 오오에노 마사후사가 부하를 보내 직영하고 있는 곳입니다. 고려와의 중계교역이 쏠쏠하기는 하나 송이 지쿠젠(후쿠오카)과 직접 교역하기 때문에 고려 역시 쓰시마는 보급하는 정도로만 이용하고 지쿠젠으로 바로 가는 추세지요. 게다가 농사도 짓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라 하국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알고 있네. 그러나 자네가 영주로 있었기에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곳이 없지.”

탐라는 이미 고려에게 신속하여 대사(大使)에 준하는 관리가 상주하고 있으니 뭔가를 하기 어렵다. 그에 반해 쓰시마는 포구를 벗어난 내륙지역의 90% 이상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해안선 역시 배를 감출 수 있는 곳이 제법 많은 편이다. 세종이 쓰시마 정벌을 명할 때까지 왜구의 본거지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조정에서 정식으로 토벌군을 조직하기 전에 오오에노 마사후사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자네를 추토(追討) 하도록 하세.”

마사후사의 장계가 아니었다면 요시치카는 아직도 쓰시마의 영주로 재직 중이었을 것이다. 오키 제도로 귀양을 보낸 것도 마사후사였다. 그러니 마사후사가 요시치카를 잡기 위해 병사를 보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사후사는 요시치카와 비슷한 목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는 유유히 떠나면 그뿐이다. 요시이에의 무사단을 대신하여 새로운 개로 키우려고 했던 마사모리는 공을 세울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라카와 상왕이 요시이에를 당분간 더 필요로 한다는 뜻이었다.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그 사이 계산이 끝났는지 역관은 백사장에 무릎을 꿇으며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것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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