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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73화 (7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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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양내복(一陽來復)

그러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내가 어떻게 요시치카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일까? 나는 일어를 모른다. 답은 하나였다. 그가 고려어로 말한 것이다.

“놀랄 것 없다. 쓰시마의 영주라면 기본적인 고려어 정도는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시기까지만 해도 쓰시마의 교역량은 일본보다 가까운 우리나라와 더 많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 해도 의외기는 했다.

소동을 감지했는지 옆방에 있던 역관이 헐레벌떡 나왔다. 나는 그를 내 뒤에 두었다.

“내가 미나모토노 요시치카다. 고려에서 왔다고 스케미치에게 들었다. 나와 겨루기 위해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다른 목적이 있었나?”

기본적인 고려어만 할 수 있다고 하더니만 생각보다 능숙한 대화가 가능했다.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사극이나 역사 소설 등을 통해 격동기의 치열함을 간접 경험하지만, 지금처럼 나라 안팎으로 큰일이 없는 시기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드물었다. 윤관과 별무반이란 이름 정도는 나와야 그제야 조금 관심을 둘까? 이자겸, 김부식, 묘청, 서경 천도 정도를 이 시대의 핵심어로 배웠다.

시끄럽던 북부에 비해 남부는 비교적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부를 위협할만한 유일한 적인 왜구가 고려 수군에 눌려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화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이렇듯 역사가 증명한다.

원나라는 고려가 신속(臣屬)을 청했을 때 고려 수군의 육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물에 약한 것을 알기에 반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수군의 활동이 제약받자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그런 왜구들을 토벌하며 명성을 날렸고, 결국 조선을 건국했다. 만약 이성계에게 북벌이 아니라 왜구를 상대로 남벌을 계획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크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목적이 있다.”

내 말에 요시치카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당신을 꺾어 내 동료로 만드는 일이지.”

“나를 동료로?”

다른 목적이란 것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무척 재미있는 일이 벌어져서 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내가 생각해도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요시치카는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

“나를 동료로 삼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이라? 지금 자네 뒤에 숨어 있는 어린 요보에 관한 일이겠지. 그 요보는 헤이안쿄에서 아악(雅樂)으로 이름 높은 우다겐지(宇多源氏)에서 보내준 선물이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품을 시간도 없었지.”

‘우다겐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 시대 잘 나가던 겐지를 꼽자면 요시치카의 아버지, 요시이에가 당주로 있는 세이와겐지 외에 무라카미겐지, 우다겐지,가잔겐지가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를 연 무사 가문이 세이와겐지라면 무라카미겐지는 공경(公卿), 가잔겐지는 신관(神官), 우다겐지는 아악(雅樂)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요시치카가 몰락하고 우다겐지에서 분가한 일족이 이즈모 동부 철광 지대를 조정을 대신해 다스리게 된다. 전국시대까지도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다이묘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 우다겐지가 영지로 삼고 있는 곳은 쿄토와 이곳의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는 오미국(近江?)이다.’

그곳은 현대 일본의 시가현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일본의 구니(?) 제도는 등급이 있다. 대국, 상국, 중국, 하국으로 나뉘는데 중국과 하국은 그 대우가 별반 차이가 없어 하나로 보기도 한다. 등급의 기준은 경제력으로 납세의 근거가 되었다.

같은 파견 관리라 하더라도 봉건제와 비슷한 현재 체계상 높은 등급의 구니로 부임하는 것이 세력을 키우기에 더 좋은 것은 상식이다. 우다겐지가 장악하고 있는 오미국은 대국에 속하고 이즈모국은 상국에 속한다. 게다가 서로 인접한 영지들이다.

“내가 먼저 호의를 베풀지.”

나는 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녀를 끌어 요시치카와 마주 보도록 내 앞에 세웠다. 소녀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약간의 힘을 주자 소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우다겐지가 아악 가문이라고 했지? 공경, 신관, 무사와 비교하면 그 힘이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귀족들의 풍류에 맞춰 음악이 우대를 받고 있지만, 시대가 바뀌면 어찌 될지 모르니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우다겐지가 요보를 내게 보낸 것이 계획적이라는 것인가?”

“계획적이지. 그건 단언할 수 있다.”

요시치카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믿음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시라카와 상왕도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겐지라는 이름이 강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갖게 되는 공포는 언제든 왕이 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그러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바로 이 요보.”

말투가 빨라지면서 소녀의 어깨에 나도 모르게 힘이 가해졌다. 소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 반응은 과연 아픔만일까?

“이 요보의 성을 알고 있나?”

요시치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시립하고 있던 스케미치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원정을 다닌 통에 꽤 오랫동안 요보를 방치해서 이름마저 까먹었던 모양이다. 이름을 묻고서야 기억이 났는지 손뼉을 쳤다.

“이름이 히카리(光)라는 것만 알고 있네. 이 자리에서 성이 있다면 물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군.”

“히카리라.”

그녀와 나의 시선은 요시치카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웃고 있었다. 히카리라는 이름까지 들으니 내 추론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만 묻자. 히카리란 이름이 본명이 맞나. 예명은 아닌가?”

그녀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너의 정체와 목적을 밝힐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내가 한 번의 대답으로 너의 정체를 맞춘다면 너는 나의 부탁을 하나 들어다오. 만약 내가 너의 정체를 맞추지 못한다면 네가 원하는 부탁을 들어주마. 어떠냐?”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의 파급력을 생각하는 것일까?

“한 가지 더,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요시치카님이 저를 죽이지 않으셨으면 해요.”

요시치카는 흠칫했다. 그녀의 제안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할 말이 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뺄 만큼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요시치카는 팔짱을 끼며 냉소를 지었다.

“당돌한 년이로구나.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우다겐지가 너를 계속 보호해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아무리 몰락했다고 하나 제대로 된 무사집단 하나 없는 우다겐지는 두렵지 않다. 이곳에서 오미국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요시치카는 어린 요보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대답해야 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다타라(多多良) 히카리(光).”

소녀는 어깨에 놓인 내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온통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당신이 어찌!”

요시치카도 소녀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는 내가 소녀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그것이 정말인지 나를 쏘아보았다. 한창 우다겐지에 대해 언급하다가 전혀 엉뚱한 이름이 나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 부여의조)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하고 그 직후 전투에서 전사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전해진다. 그가 바로 다타라 가문의 시조이고, 16세기경 다타라 가문은 오우치(大內), 토요타(豊田) 가문으로 갈라져 현대까지 이어진다.

현재는 다타라 가문이 갈라지기 전으로 임성태자가 정착했던 스오국(周防?)에서 재청관인(在廳官人)인 스오노곤노스케(周防?介)를 세습하고 있을 시기다. 재청관인은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거두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지역 영주나 다름없는 셈이다.

임성태자는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발풀무 제철 기술과 초기 불교보다 발전된 불교 교리를 전했다. 특히 발풀무 제철은 기존 제철 방식보다 혁신적이었다. 발풀무 제철을 다타라 제철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다타라 가문은 백제 왕실의 후손임을 내세워 고려, 조선과 교류하면서 왕실의 후손이 받을 수 있는 세제 혜택을 받았다. 농업에 매진하던 다른 영지들에 비해 일찍부터 무역과 광산에 눈을 뜬 것이다.

히카리란 이름은 다타라란 성을 확신하게 된 계기였다. 다타라 가문은 공교롭게도 현대 일본의 히카리 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는데 히카리 시에는 스오성의 대표적인 백제식 석성, 코우고이시(神籠石)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올라 일출을 맞으면 ‘천지가 빛으로 가득 찬다.’라는 말이 전해지는데 그 광경이 유래가 된 셈이다.

“철기는 전쟁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조정은 철광을 직접 관리하고 싶었다. 유명한 철광산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래지에 걸쳐 있었고 그들과 교류했던 토착 호족이 존재했다. 그중 헤이안쿄에서 가장 가까운 에치젠국의 쓰루가(후쿠이현)를 손에 넣었다. 다음 차례는 어디였을까? 멀리 동쪽에 있는 스오국보다 이즈모국이 손쉬웠겠지.”

나는 잠시 하던 말을 끊고 주변을 살폈다. 요시치카는 몹시 심각한 표정이었고, 수하인 스케미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소녀, 다타라 히카리는 놀람이 지나쳤는지 무표정에 가까웠다.

“철 수출로만 보자면 경쟁자라 할 수 있었던 두 곳이 조정의 관리를 받게 되면 스오국은 수출에 관한 한 독점을 할 수 있게 된다. 조정은 친선을 위한 공무역을 제외하고는 교역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헤이안쿄 조정의 입장은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시라카와 상왕을 보좌하는 공경, 아악, 신관, 무사 가문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기득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종연횡이 이루어졌겠지. 시라카와 상왕은 이즈모국의 철광 관리를 조정으로 가져오기 위해 공경과 무사 가문을 패로 삼았고, 막대한 이득을 얻을 기회를 뒷짐을 쥐고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아악과 신관은 다타라 가문에게 철 무역 독점권을 약속하고 요시치카를 응원하지 않았을까? 백제 왕실의 후손이라는 이름값은 본토(혼슈, 本州) 서부해안과 규슈 일대에서 매우 잘 먹히기 때문이지. 공경과 무사 가문이 실패하면 그때를 노려 자신들이 출진해서 성공하면 되니 그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힘을 몰아주라고 말이야.”

요시치카의 눈이 번쩍였다. 내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것일까?

“나는 계획에도 없던 덤이겠지. 지금 스오국은 요시치카를 전력을 다해 도울 수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지. 좋은 기회다 싶어 나에게 왔지.”

“당신은 천리안이라도 달렸나요? 아니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왔으면서 나를 처음부터 농락한 건가요!”

소녀는 버럭 화를 냈다. 나라고 모든 것을 알고 왔을까? 그저 하나하나 주어진 단서를 스무고개처럼 생각하다 보니 답이 떠올랐을 뿐이다.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의 후손이라며, 나가토국에서 재지무사(在地武士)로 성세를 높이고 있는 인물이 있지. 세력이 점차 커지자 스오국을 위협할 만큼 말이야.”

소녀의 눈동자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일본편이 워낙 인명도 동명이인이 많고 이 시대 자료도 찾기 힘들어서 글 한 편쓰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불꽃처럼도 자료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편이라서 설연휴 and 일본편이 끝나면 틈틈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설 연휴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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