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9) 일룡일사(一龍一蛇) =========================================================================
“무사께서는 지금 그 발언이 여인에게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소보다도 오히려 어리게 보이는 소녀가 여인이라고 칭하니 나로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몹시 분한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들의 전통 풍습을 무시하고 내가 너무 놀리는 것 같아 나는 장난은 이만 하기로 하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내가 먼저 그대에게 실례한 것은 사실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대에게 용서를 받도록 하지.”
소녀는 우물 우물거렸다. 내가 그토록 태도를 빨리 바꿀 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고려에서는 자네들과 같이 화장하지 않네. 그대들같이 분을 하얗게 칠하지도 않고, 멀쩡한 눈썹을 밀고 이마에 눈썹을 새로 그리지도 않고, 사방에 진동할 정도로 향을 뿌리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그대들이 미와 건강을 함께 고려한 흑치의 풍습 또한 따르지 않네. 손님이 주인의 예절에 맞춰야 하건만 시답잖은 참견이라고 생각해주게.”
무엇보다 흑치의 전통은 건강을 고려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나다. 하구로메(??め)라고 하는데 철을 술에다 담가 산화시킨 물을 양치 대신 이에 헹구는 것이다. 일본의 성인식은 12~13세 사이였는데 유치(乳齒)가 모두 빠지고, 이가 새로 돋기 시작하면 그 물을 머금으며 충치를 예방하고자 했다. 대신 그 영향으로 이빨은 점점 누렇고 시커멓게 변하게 되는 것이다. 소녀의 나이를 짐작해보면 성인식을 갓 지난 것으로 보였는데 장기간 하구로메를 하지 않았다면 치아 착색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거지.’
오지랖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품에서 작은 자기를 꺼내 들어 소녀에게 주었다.
“이건 뭔가요?”
“목욕은 무리더라도 하구로메만은 지워주게. 이건 강요가 아니라 부탁일세. 자기에 들어 있는 것은 매실주이니 그것으로 입을 헹구면 시원한 느낌마저 들걸세.”
매실은 동북아 삼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한 유용한 작물이었다. 수분이 많고 비타민이 풍부하니 뱃사람들에게는 이만한 먹을거리가 있을까? 더구나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해독작용까지 뛰어났으니 말이다. 알칼리성 식품이니 산화된 철을 이에서 걷어내는데도 탁월할 것이다. 특히나 이 지역에서의 주 음식재료는 생선이 될 것이 뻔한데 알다시피 생선류는 산성식품이다. 이래저래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그녀는 자기를 들고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내게 말했다.
“그럼 무사님께서는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겠습니까? 오직 무사님께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구로메를 지운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까 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근 한 시간 정도를 소비한 후에야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다시 나타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까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분을 말끔하게 지우고 머리를 풀어헤친 소녀는 14세에서 15세 정도로 앳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방금 목욕하고 나온 지라 얼굴이 발그레했는데 어쩌면 민낯을 보이는 데 따른 부끄러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시기의 분은 납과 수은에 질 낮은 쌀가루를 섞어 만든 것으로 건강상으로 매우 권장하고 싶지 않은 화장 방법이었기에 분을 지운 모습은 훨씬 건강해 보이고 활기차 보였고 간간이 짓는 웃음 사이로 드러나는 이는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검은 기운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긴 생머리의 예쁘장한 소녀가 이에 교정기를 낀 느낌 정도일까?
그녀는 내게 매화주가 들어 있던 자기를 앞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입안이 상쾌한 것이 기분은 좋습니다만 아끼던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지금 매우 허전합니다. 그보다 지금 제 모습이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흑치가 희석된 것이 애석한지 그녀는 작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마치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내가 만족스럽게 여겼다고 생각했는지 다음으로 넘어갔다.
“미초(御帳)를 둘러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허름한 료칸은 지역 유지 정도가 묶었던 곳이었던 같다. 미초는 귀족 여인들이 잠을 자거나 성행위를 할 때, 그 주위를 가리고자 두르는 휘장 같은 것이었다. 과연 성행위가 목적인지 은밀한 대화가 목적인지는 두고 봐야만 할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이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2차 성징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성욕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물며 이소와도 이름만 부부라고 엮여 있을 뿐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각성하기 전의 준경은 오는 여자는 막지 않았지만, 이소는 여전히 어려웠던 듯싶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녀의 이야기가 가장 잘 통하는 때는 합사를 마친 후라 배웠습니다.”
배웠다? 소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어쩌면 경험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걸치고 있던 기모노를 풀기 시작했다.
“잠깐!”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옆방의 역관까지 달려나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며 물을 정도였다. 그 역시 미초의 용도를 알고 있기에 실실 웃으며 사라졌는데 무척 얄밉게 보였다.
“아직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합사를 가지고 난 후에 제 이름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다. 아내 외에는 합사를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 나는 그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습니까? 이래 봬도 저는 헤이안쿄에서 촉망받는…….”
“지금 그대가 요보라는 사실조차도 믿기 어려워하는 말이다. 그대는 지금껏 합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겠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그녀의 발언을 찔러 본 것뿐이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까 나와 겨루었던 무사, 이름이 스케미치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자가 너를 보낸 것은 단순히 대접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만약 정말로 대접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대보다 성숙하고 농염한 요보를 보냈겠지.”
“제가 성숙하지 못하다고 비웃는 것입니까? 차라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십시오. 다른 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요시치카가 목숨을 걸고 난동을 부리는 마당에 유녀는 몰라도 헤이안쿄의 요보가 이곳에 여럿 있다는 것을 나보고 믿으라는 말인가?”
소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직설적인 내 대답이 정곡을 찌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을 지운 덕분에 얼굴의 표정 변화를 잘 볼 수 있게 된 것은 수확이라고 해야 할까?
“혹여 나를 요시치카의 힘이 될 수 있도록 끌어 드릴 요량이라면 헛수고다. 나는 오히려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왔으니까 말이다.”
“분고노곤노카미(豊後權守)의 말씀대로군요.”
“분고노곤노카미?”
내가 그 명칭을 되뇌자 소녀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막았다. 분고국은 규슈의 오이타현 남부쯤에 자리한 곳이었다. 생각해보니 스케미치가 그곳의 태수였던 것 같다. 쓰시마섬에서도 제법 가까우니 요시이에가 설득의 사절로 보냈다면 말이 된다. 사서에 따르면 요시치카가 이즈모국의 태수를 죽이자 인근 중소영주들이 호응했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아버지의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단순한 불만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이면에 숨은 진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내 머릿속이 밝아졌다.
‘혹시 이즈모국이 둘로 분단되는 것이 이쯤이었던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던 시절, 각국은 교류하는 일본의 중심 도시가 달랐다. 백제는 후쿠오카현 일대, 신라는 시마네현 일대, 고구려는 후쿠이현 일대의 영주를 통했다. 삼국 중 최후의 승자는 신라였으니 시마네현은 교류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공교롭게도 이 세 곳의 공통점이 있으니 철의 산지라는 점이다. 다타라(多多良, 발풀무) 제철이 전해지면서 일본은 철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오죽하면 현대 일본에서 시마네현의 관광 명소 중에 다타라 제철 역사관이나, 작업장 등이 남아 있을까?
그런 철기를 일개 지방 영주가 마음대로 다룬다면 조정은 어떨까? 당장에라도 빼앗고 중앙 관리를 파견하여 국영화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이즈모 일대는 철광뿐만 아니라 은광도 산재하여 고려와의 교역 품목에 은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조정은 광산이 밀집한 이즈모 동부에 가미(守, 지방관)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하에 두려고 했고, 오랫동안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던 이즈모노 쿠니노미야츠코 가문은 이즈모 서부로 밀려났다. 요시치카를 지지하는 세력은 조정으로부터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키고 싶어하는 제철 가문들인가?”
“당신이 그것을 어찌 알지!”
소녀는 몹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분고국이란 이름과 이즈모국의 상관관계를 떠올려보다가 갑자기 던져본 추측이었지만 소녀의 반응으로 보아 확신할 수 있었다.
“요시치카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제철 가문들은 그를 도와 조정의 간섭을 차단한다. 아니 반대가 될 수도 있지. 요시치카가 계속해서 날뛰게 하고 시라카와 상왕의 측근인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가 큰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돕고 자치를 허락받는다.”
“검술을 겨루러 왔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군요.”
그녀는 마치 속은 게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지만 말이다. 일대의 가문들이 도왔음에도 단 한 번의 변변찮은 전투로 주모자 오인의 목이 잘렸다고 했다. 그 전투로 이득을 본 것은 토벌을 명한 시라카와 상왕과 토벌 대장 다이라노 마사모리였다.
‘아니지 또 한 명의 이득자가 있다.’
내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나는 급히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비명을 질렀는데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합사라도 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 틀림없다.
“네 이름이 뭐지?”
“이제 합사에 마음이 동하여 거칠게 다루신다 싶더니 제 이름이 그리도 궁금하신가요?”
“어설프다. 나에게 오해를 심어주려고 하지만 너의 반응에서 답이 다 나왔다. 내가 너의 정체를 맞춰볼까?”
“제가 누구인지 안다는 뜻인가요? 하긴 지금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만 보자면 이곳에 정보가 없고 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래도 제가 누구인지는 맞추지 못하실 거에요.”
내가 어깨를 잡아당기자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들어온 형국이 되었다. 그녀는 내 턱밑에서 눈을 빛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놀랐던 것은 거짓말처럼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내가 너의 정체와 목적을 맞춘다면 어쩔 테냐.”
“제 몸을 드리지요.”
“네 어린 몸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녀는 비밀이 알려지는 것보다 그것이 더 신경 쓰이는지 내 가슴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지만, 모기가 모는 수준이었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져서 나는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시에 미초가 스르륵 걷어졌다.
“나도 그것이 궁금하군.”
서른에서 마흔 정도로 보이는 무사였다. 그의 얼굴에는 긴 칼자국이 자리하고 있어서 까닭 모를 위엄을 드러냈다. 왜인답지 않게 키도 제법 컸고, 눈빛은 밝게 충천했다. 나는 그의 정체를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뒤로 나와 해변에서 겨루었던 스케미치가 시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치카.’
그를 제외하고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는 그가 두려운지 내 뒤로 숨었다. 그럼 나는 무섭지 않단 말인가? 나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