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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70화 (70/257)

00070  (9) 일룡일사(一龍一蛇)  =========================================================================

-고려사절요 제7권 숙종 명효대왕(肅宗明孝大王) 제위 갑신 9년(1104), 송 숭녕 3년ㆍ요 건통 4년

*3월 동북면행영병마도통 윤관은 여진과 싸워 100여 급을  베었는데 우리 군사의 사상, 함몰자가 반을 넘었다. 윤관은 중광전에서 부월(?鉞)을 반납하고 엎드려 죄를 청했다. ‘신임 중랑장 준경은 일천의 좌우군으로 여진을 상대하여 불과 30명의 사상자에 홀로 적의 수급을 70여 급이나 베는 빼어난 성과를 보였나이다. 신은 사천의 보졸로 고작 30여 급을 베었을 따름이니 이 어찌 신의 무능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임 중랑장과 같은 이를 중용하여 나라의 방패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길 ‘동북면병마사 김한충이 환갑을 넘어 노쇠하고 그 역시 사람을 보내 후임을 정해주기를 청하니 신임 중랑장 준경을 김한충에게 배속시키도록 한다. 또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추밀원사 윤관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게 하고 무도한 여진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할 방안을 연구하도록 명한다. 흡족한 방안을 제시할 때까지 조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한다.’ 윤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명령을 받았다. 왕이 다시 말했다. ‘신임 중랑장 준경의 공이 적지 않다. 그를 장무장군(將務將軍)으로 임명한다.’ 이에 신하들이 놀라 반대하는 이가 작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만에 향리, 서리의 자식들이나 받았던 별가 직에서, 정4품 중에서 비록 하(下)직이라 하나 고려에서 49명밖에 없는 장군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신하들이 자초한 경우도 있었다. 여진을 두려워해 동북면병마사의 자리를 내쳤으니 결국 김한충이 나에게 후임을 맡기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병마사는 3품 직으로 주로 6부 상서 중에서 임명되어야 했지만, 조정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고위 관료들에게는 매력이 떨어졌다.

그리고 병마사도 차별이 존재해 북계보다 동계의 지위가 떨어졌다. 그것은 요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임무가 북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계 쪽의 주적인 여진은 뚜렷한 외교 대상이 없던 실정이라 그들과 잘 지내다가도 한번 공격당하면 욕만 먹는 자리였다.

그래서 북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관직들이 동계는 통합되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양계에 각기 1명을 임명할 수 있는 병마지사(兵馬知事:3품), 2명을 임명할 수 있는 병마부사(兵馬副使:4품), 3명을 임명할 수 있는 병마판관(兵馬判官:5~6품), 4명을 임명할 수 있는 병마녹사(兵馬錄事)에 이르기까지 지원자 부족 및 대체 인력이 없어 병마사나 휘하 한두 명의 장군이 전담했던 것이다. 분명히 법에 어긋나는 행위였지만 쉬쉬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만큼 동계는 손만 가고 공은 얻기 어려운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것만큼 좋은 상황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척박한 곳에서 혜성처럼 뛰어난 무장이 나타났으니 내심 북벌을 노리고 있는 숙종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숙종 초기부터 그를 지지한 인재였다.

요나라가 건재한 이상 고려가 노릴 수 있는 비옥한 땅은 동해안 일대뿐이었다. 여진을 걷어낼 수만 있다면 새로운 땅을 얻어 현재 문란해지고 있는 토지 제도를 상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국가적 과제이기도 했다. 대지주나 사찰을 건드리지 못한다면 소작농을 구제하려는 방법은 새로운 땅을 무상으로 주어 경작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도 이제 장군의 반열에 올랐군. 이제야 한 시름을 놓았네.”

이자겸보다도 나의 승진을 바란 이는 김한충이었다. 고려의 장군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유학자에 가까운 그였다. 그럼에도,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무관직을 수행하며 버거워했었다. 그는 연회를 베풀어 나와 강증을 불러 노고를 위로했다. 이번에 강증 역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정6품)로 승진했는데 그동안 여진 해적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서였다.

“과연 무재(武才)라는 것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10년 전 혈기 넘치던 별가가 이제는 정4품의 장군이라니.”

정4품 장군직에도 상하가 있었다. 내가 받은 장무장군이란 직책은 하직으로 만약 다시 전공을 세우게 된다면 품계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상급의 장군직을 다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하급의 구분은 도성에서 조회할 때나 쓸모가 있었지 이런 변방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따지자면 중랑장에서 장군으로 승진한 것은 대령이 별을 단 것과 같았고, 장군에서 상하 직을 따지는 것은 준장이냐, 소장이냐를 판가름하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장군 반열에 올라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원래는 윤관이 참가한 이번 전투에서 30여 급을 베는 것이 전공의 끝이라면 그 수급의 태반은 척준경이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보다 전공이 너무 소소하여 원 역사에서는 승진 없이 마무리되었지만 내가 우야소와 손을 잡자 연계 효과가 역사보다 훨씬 커졌음을 실감했다. 특히나 윤관의 패배가 나의 전공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김한충은 기분이 좋은지 술을 연거푸 들이켜는 바람에 얼굴이 벌게 있었다.

“그래 신임 장군의 포부는 무엇인가? 동계가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내 마누라라도 기꺼이 내어주겠네.”

“하하하, 병마사 대감께서 재가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역시 거나하게 술에 취한 강증이 박장대소를 했다. 술에 취했을 때가 좋은 기회다 싶어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 포부는 병마사 대감을 도와 동계가 오래도록 평화로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자네의 포부가 나와 같으니 어찌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들어줄 것이니 어디 냉큼 말해보게.”

너무 궁금한지 김한충은 내게 귀를 바짝 댔다.

“10년 전 남만해를 함께 종횡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평생 자랑해도 모자를 만큼 기이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지.”

워낙 고려 수군의 전력이 세서 저항이라고 할 정도의 작은 압력조차 받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재미있는 여행 정도로 치부될 만도 했다.

“병마사 대감과 처음 만났던 해남도에서 중원의 여러 인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언제고 동계가 잠시 평안하다는 확신이 들 때쯤에 잠시 시간을 내어 송으로 가는 사은사 일행에 제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송으로 가는 사은사에? 자네가 인연이라 말한 인재들을 포섭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김한충은 잠시 숙고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나는 그가 받아들이리라고 예상했었다. 고려는 각국 인재들의 망명에 대해 너그러운 기조를 유지했다. 당, 송, 요, 여진, 왜, 심지어 아랍에 이르기까지 머물고자 하는 자들은 받아들였고, 그중 능력 있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주자학이란 폐쇄성에 스스로 가두었던 조선과 달리 고려의 유학은 매우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이 있었다. 지금 시대가 조선이었다면 외국 사람 하나 받아들이는 문제로 당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두 번째 부탁도 같은 것입니다. 왜국에 잠시 다녀왔으면 합니다.”

“왜국? 왜국과도 인연이 있었나?”

나는 가본 적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해야 했다. 김한충은 내가 해남도에서 그들을 만났을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대국인이야 우리 쪽으로 와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굳이 왜국인을 끌어들일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당시 교역하는 왜인을 묘사한 글을 보면 왜소하다는 말을 빼먹지 않는다. 그것이 고려인들에게는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다. 더구나 이 당시는 왜구들이 고려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반감이 많아 쫓기고 있는 형편이지요. 동계에 본래 있어야 할 관직 중 하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인물입니다.”

“조정에 누를 끼칠만한 인물은 아니겠지?”

왜 조정에 반감이 있다고 하니 혹시나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까 그것이 염려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일단은 안심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영입한다면 동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기병은 기병으로 상대해야 합니다만 고려의 사정상 당장은 어렵습니다. 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진의 준동을 막기 위해 시급한 것은 뛰어난 무위를 갖춘 장수가 여럿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상대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지만, 우리 역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누적되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주민족이 수렵민족보다 애를 많이 낳는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애를 키우고 자라는 환경이 더 좋기 때문이다. 즉, 같은 숫자로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수렵민족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들이 압도적인 승리, 그것이 아니라면 일시 후퇴라는 작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도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고서는 승리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유럽까지 다가갈 동안 중원을 채 정복하지 못한 것이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주변을 본보기로 몰살시키면 알아서 항복하던 유럽과 달리 중원은 몰살을 시켜도 내일이면 그만큼의 숫자가 충원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중원이 아니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방식을 쓰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왜국은 조정과 부딪칠 일 없이 당사자만 만나면 조용히 끝낼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는 이즈모국에 있으니 넉넉하게 한 달의 여유만 주시면 다녀올 수 있습니다.”

일만 잘 풀린다면 한 달이 아니라 보름 이내에도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시간이 된다면 문무대왕릉을 들려볼 생각을 했기에 일부러 길게 잡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진이 쳐들어온다면.”

김한충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제가 내일이라도 당장 우야소를 만나 협상을 하겠습니다. 그들도 전쟁을 통해 적지 않은 물자 손실을 보았으니 오래도록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처음에 원했던 명분은 타 부족과의 다툼에 고려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순순히 협상에 응할까 반신반의하는 김한충이었지만 내가 자신하자 협상의 결과를 보고 왜국행을 허락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는 지금 이즈모국으로 가는 전선에 타고 있었다. 강증이 따라나서고 싶어했지만, 육군과 수군의 실전 책임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김한충이 만류하는 바람에 휘하 낭장 한 명을 붙여 주었다. 열 척의 전선에 모두 이백 명 정도가 승선하고 있었는데 한 척에 오십 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운행인원만 최소로 탑승한 결과였다. 그것은 요시치카 일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에 선택한 것이었는데 강증은 혹시나 왜구를 만나 손해를 입게 되면 항행 못할 수도 있다며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뱃길은 순조로웠다. 선단은 대선 없이 중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돛과 노를 같이 쓰는 고려 중선의 특성 때문에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아 항시 일정한 거리를 나아갈 수 있었다.

“겐지(源氏) 이야기라도 겪게 되려나.”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겐지 이야기는 지금 시대보다 약간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00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같은 헤이안 시대라 문화나 풍습 같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것이 없다면 책에서 읽었던 것과 같은 신기한 풍습들이 만연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특히 성(性)문화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 당시는 미나모토(源)라는 성을 가진 자들을 모두 겐지라고 했는데 본래 왕족 출신이었다가 신하로 강등당하면 내리는 사성(賜姓,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성)의 하나였다. 보통 후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왕자나 공주 같은 이들이 일가를 이루면 받게 되는 것이다. 겐지 이야기의 주인공도 왕의 아들이지 않은가?

지금 내가 찾아가는 미나모토노 요시치카도 겐지였다. 각자 몇 대 왕에서 갈라졌는지에 따라 겐지 앞에 왕의 이름이 붙었는데 그는 내가 기억하기로 세이와겐지였다. 아버지 요시이에때만 해도 크게 흥성했던 세이와겐지였지만 너무 잘나가도 문제라는 말처럼 왕의 견제를 받았고, 그런 견제가 결국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게 하는 원동력이 되니 참으로 역사는 모를 일이다.

몰락의 주범이 된 요시치카 자체는 세이와겐지의 흑역사나 다름없기에 철저하게 배제되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본의 역사가 나도 모르게 바뀌는 것은 곤란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질 때까지 일본은 내전으로 시끄러워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역사는 내전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준경의 아랍행로에 대해 지도로 보여달라는 의견을 받아서 설정란에 간략하게 올렸습니다.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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