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9) 일룡일사(一龍一蛇) =========================================================================
피가 튀어 내 얼굴에서 점점이 흘러내렸다. 북방의 2월은 차가운 한풍으로 가득했지만 뜨거운 피가 사방에서 솟구치며 오히려 온천 한가운데라도 서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더웠다.
“이…… 인간이 아니다!”
30명이 더 죽고 난 다음에야 나를 감쌌던 여진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만의 병력이 있다고 해도 한 자리에서 나를 볼 수 있는 숫자는 실상 얼마 되지 않는다. 일 할 정도나 될까? 그리고 그 숫자 중 대략 5%의 사상자가 생기는 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목격하면 그 부대는 사기를 잃게 된다. 특히나 숫자로 전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 기량에 따라 전투를 치르는 기마 민족일수록 병력을 잃으면 잃을수록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정주 민족보다 숫자가 적은지라 계속해서 병력을 충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혼자서 근 150에 달하는 수급을 취했다. 어제까지의 전공을 합치면 벤 수급이 200을 훌쩍 넘었다. 2월과 3월에 연달아 출진하는 고려군의 총 전공을 합쳐도 오히려 내가 앞서는 셈이었다.
“그런 전공인데도 첫 승진은 천우위 녹사참군사였지. 내가 향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려 중앙군 6위 중 천우위는 국왕의 의장대(儀仗隊) 또는 친위대 성격이 강했다. 수군 역시 천우위 휘하에서 관리되고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다른 5위에 비해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녹사참군사는 정7품의 벼슬로 현재 18품계 중 13번째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현재 내가 맡은 별가는 벼슬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언뜻 괜찮은 자리일 수도 있다. 벼슬 이름이 길기는 하지만 공적을 칭찬하기 위한 명예적인 이름이고, 실제 천우위에서 주는 직급 이름은 별장이 된다. 별가가 별장이 되는 셈이다.
별장 위에 낭장이 있고, 낭장 위에 중랑장이, 중랑장 위가 장군, 장군 위가 대장군, 대장군 위가 상장군으로 여기까지가 군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급이었다.
별장은 쉽게 말해 작은 동네의 수령, 현감 정도 되는 직책이고 동계를 좌지우지하려면 적어도 정4품인 장군이 되어야 했다. 승진해도 정7품이니 아직도 한참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실제 척준경의 행적을 보아도 3년 뒤 별무반이 출전하면 충분히 이룰 수 있게 된다. 최소한 내가 무언가를 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려면 그런 척준경의 업적 정도는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혼자 무협 소설을 썼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학자들이 많겠군.”
사실로 믿게 하려면 기록이 중요하다. 중국과 아랍, 고려, 왜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내 이름 석 자만큼은 이번에 제대로 남겨볼 작정이었다.
“아니 아직은 성이 없으니 성을 먼저 받는 것이 먼전가?”
척준경이 성을 받는 시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아마도 윤관의 양아들이 된 이후, 또는 그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기 전에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자겸이 전횡하면서 조금씩 반상의 법도가 허물어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족보가 제대로 있는 자가 아니면 고위직 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신 정권 시대부터 신분 차이 없이 정권을 잡다 보니 그때부터 족보의 권위가 무너진 것으로 봐야 했다.
“이씨를 다시 받는다면 이자겸이 좋아하려나?”
이준경이란 이름이 익숙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자겸과 완전한 한통속으로 여겨지게 할 가능성이 컸다. 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이용해야 하겠지만, 훗날 역사에서 그와 계속 엮였다는 말은 사양하고 싶었다.
“아니지. 왜 내가 그때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
예전 보즐이 나에게 찾아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렸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재단함으로써 소외당한 인재들이 가진 상대적 박탈감을 품지 못했다. 그들을 쓰지 않을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주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자겸은 야심이 있지만, 아직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내가 그를 진정한 내 편으로 만든다면 그에게 역사가 내리는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이자겸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는 시기는 숙종, 예종을 거쳐 인종 때부터다. 비록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아내로 맞기는 했지만, 예종이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여 그에게 요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종 사후 예종의 형제와 예종의 아들인 어린 인종을 놓고 후계 다툼이 벌어지자 이자겸은 모든 세력을 인종에게 쏟아부었고 끝내 성공하여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그는 둘째 딸을 예종에게 보냈고, 셋째, 넷째를 외손자인 인종에게 시집보내는 바람에 인종은 이모와 결혼하게 된 셈이 되었고, 그것은 지금의 숙종이 왕실에서 근친결혼을 금지한 것에 어긋났고, 통념상으로도 무리한 결과였다. 만약……. 정말 만약에…….”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북쪽을 향해 힘있게 달리고 있었다. 임간이 이끄는 고려군은 지금쯤 여진의 전위(前衛)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에게 영향을 받아 잠시 사기가 오른 짧은 시간뿐, 곧 도망칠 테지만 말이다.
뒤에서는 여진 기병에 가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달렸다. 그러나 아직 우야소의 본진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나는 이미 목적을 달성한 이상 우야소를 다시 한 번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소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 될 것 같지만, 내가……. 내가 이자겸의 친딸 중 한 명, 아니 아예 세 명 모두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어찌 될까?”
왕만이 일부다처가 허용되고 신하는 일부일처가 적용되는 고려였지만 은밀하게 첩을 거느리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그녀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게 된다면 이자겸은 왕가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 자체가 없어진다. 내가 공적을 세우면 세울수록 그는 나를 통해 반란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나는 문득 진지가 떠올랐다.
똑똑해서 자신의 일을 언제나 알아서 잘하는 진지였기에 왕기나 능통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대한 감이 있었다. 내가 강하게 붙잡았더라면 진지는 스스로 죽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왕경과 진수를 만나고 난 다음에 평생 유일하게 남은 후회였다. 이자겸 역시 나 하기에 따라 그 목표와 신념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무리도 많고 난관도 많은 생각이다. 이자겸이 자신의 최고 무기라 할 수 있는 딸들을 내어줄 생각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이소는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 이면에는 예종과 인종이 부러웠던 탓도 있다. 내가 항상 사서를 읽으며 이자겸이 실패한 원인은 너무나 현모양처인 어진 딸들을 두어서라고 생각해왔었기 때문이다. 이자겸의 은밀한 야욕을 번번이 무산시키고, 남편들에게는 지극정성이었던 까닭에 이자겸이 대놓고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남자기는 한 모양이군.”
예전 아내들이 떠올랐다. 현대에서는 결혼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노총각이 과분할 정도로 고마운 아내들을 여럿 얻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삼국지와 달리 지금은 내가 먼저 정략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온전히 이준경인지, 아니면 척준경과 혼재된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모세의 기적처럼 여진 기병이 일자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달렸다. 여진 기병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어제부터 나를 봐왔던 자들이었다. 그 끝에는 우야소가 있었다.
“하하하! 나는 최소한 정오는 지나야 이곳에 닿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 해는 중천에 닿지도 않았소. 과연 이 우야소를 꺾은 강자답소. 아우도 장군에게는 상대되지 않을 것이오.”
그가 눈짓하자 의자 하나가 내 앞에 대령했다. 나는 흑우에서 내려 의자에 털썩 앉았다. 힘이 모두 소진된 것은 아니었지만, 의자에 앉으니 노곤한 느낌이 밀려왔다. 적진에 있는데도 마치 집에 온 것처럼 긴장이 풀린 것이다.
“참 좋은 말이오.”
우야소는 흑우를 가리켰다. 여진 중에 말에 전문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눈짐작만으로도 말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여진이었다. 나는 우야소의 칭찬에 그저 미소를 지었다.
“추장의 아우를 이미 만난 적이 있소. 벌써 10년 전이군.”
“오, 그렇소? 아우에게서 그대 같은 인물에 대해 귀띔을 받은 적이 없는데.”
“10년 전에 나는 애송이였소. 겁도 모르고 날뛰는 어린 사냥개였지. 그때 어린 사냥개의 눈에 비친 추장의 아우는 감히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였소. 그러니 나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오. 그러나 지금 붙는다면 나는 그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하하하, 참으로 솔직하구려. 마음에 드오. 전쟁 중에 마시는 마유주(馬乳酒)는 일품이오. 한잔 들어보시구려.”
우야소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마유주 자루를 나에게 던졌다. 이미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며 숱하게 마셔본 마유주였지만 그의 말대로 전쟁 중에 들이켜는 마유주는 독특했다. 어쩌면 한 편의 희극처럼 여겨졌다. 고려군이 학살당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여기에 앉아 적과 유유히 술을 나누고 있다니.
“그대라면 중원에서 자랑하는 삼절오은도 능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대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강자요. 보통 부족의 전사 열 명을 상대할 수만 있어도 으뜸으로 꼽는데 그대는 지금 무려 백 명이 넘는 전사를 단숨에 베었소.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오.”
“추장도 삼절오은을 알고 있소?”
한반도 북부와 동만주 일대에 세력을 두고 있는 완안부가 삼절오은을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다 알지는 못하오. 내가 제대로 아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지만 그의 명성과 실력으로 미루어보아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한 것이오. 일전에 송과 요가 국경에서 작은 다툼이 생긴 적이 있었소. 보통은 송이 버티면서 요가 물러나기를 바라는데 그때만은 요의 예상을 깨고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을 한 모양이오. 마치 지금의 장군처럼 단신으로 거란 기병 일백을 죽이는 바람에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오.”
“혹시 그자의 이름이 이탁이오?”
내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이탁이 삼절오은 중 가장 최강자에 가깝다고 섬전수 단정홍이 말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탁은 기병들에게는 상성에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무예는 단단함에 있었지 빠르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덤벼드는 적에게는 강하지만 도망치는 적을 상대하기에 적절한 무예는 아니었다. 물론 무인들끼리의 대결에서는 도망을 치려는 자가 거의 없기에 그의 강점이 더욱 부각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야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자의 이름은 옥기린(玉麒麟) 노준의라 하오. 하북삼절 중 검호 적설이 몇 해 전에 천수를 다해 그 빈자리를 계승한 자로 현재 중원에서는 가장 최강자라고 하더이다.”
“아!”
노준의의 이름이 왜 먼저 떠오르지 않았을까? 지금쯤이면 이미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였을 텐데 너무 오랫동안 그를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만이 그래도 삼절오은에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는데 장군의 신위를 눈으로 확인하니 천하는 지금 모두 허명에 속고 있는 것 같소. 장군의 이름은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오.”
명성의 힘으로 적이 스스로 물러나고, 때로는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피를 가장 적게 들이는 방법이다. 따지고 보면 삼국지 시절도 마찬가지다. 명성이 생기자 내 의견은 적에게도 존중받았다.
“가지고 오너라!”
마유주로 말미암아 취기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식어가던 등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야소의 명령을 받고 여진 무사들이 내 앞에 큰 자루를 놓았다. 자루의 틈 사이로 나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토하고 난리 났을 것 같은데.’
척준경이 십 년간 겪은 경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전장이었다. 먹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겪어보지 못한 기후가 없었고, 만나는 부족마다 고유한 전통을 겪었다.
“어제 그대가 죽인 여진 전사 외에 넉넉하게 코를 넣었소. 이 정도면 장군이 뜻을 펼 수 있겠소?”
수급으로 계산하는 방식은 부피가 커서 곤란하니 여유 있는 전쟁이 아니고서는 보통은 귀나 코를 잘라 증명했다. 우야소는 다른 이에게 건네받은 마유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입가를 닦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약속대로 고려편이 먼저입니다. 다만 불꽃처럼도 쓰면서 몰입하게 되니 둘다 똑같이 애정이 생겨서 어제 그런 고민을 적었습니다. 의견은 심사숙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