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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67화 (67/257)

00067  (9) 일룡일사(一龍一蛇)  =========================================================================

이들을 모두 살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 그 공은 임간에게 온전히 돌아간다. 아니 임간을 추천하고 전쟁에 앞장선 대신 네 명도 은상(恩賞)을 받을 것이다. 내 직급이 오르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자겸의 등장도 늦어진다.

다 좋다. 그러나 문제는 고려가 가진 문제점을 대신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별무반은 생기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계속 지킬 것을 믿으며 어영부영 흘러가다가 내가 딴 맘이라도 먹는 날에는 몽골의 침입보다 금나라의 침입이 더 뼈아프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가정론이다. 그리고 나 역시 한 사람이라도 모두 살리고 싶은 심정이고, 천재가 아닌 바에야 알고 있는 정보를 초반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원술 밑에서 농사를 책임지던 때, 나는 이토록 고민하지 않았다. 전쟁은 무관들이 하는 것이었고, 내 임무는 그들을 지원하는 일뿐이었으니까. 그때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농민을 구제할 능력도 없었다. 내 능력이 안된다며 그저 염을 해주는 정도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과 다른 것은 그때는 이런 종류의 생각, 죄책감을 전혀 가지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리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큰 희생과 작은 희생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오랜 세월 동안 학자들은 여러 견해를 보였다. 역사는 언제든 크게 틀어지겠지만, 그전에 내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마포는 내 대답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여진족 관점에서 보자면 내 대답이 지극히 옳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지만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약자가 죽었다. 그것이 천 년간 전혀 변하지 않은 수렵 민족의 생존 방법이었다.

“부탁한다. 흑우.”

지금의 흑우는 예전 내가 타던 흑우가 아니었다. 보통 말은 4살 이후가 되면 번식을 할 수 있는데 중앙아시아를 거치는 도중 우연히 돕게 된 유목 민족을 통해 흑우의 새끼를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의 행로가 너무나 힘들었던 것인지 흑우는 새끼를 낳고 죽었고, 나는 새끼가 자라는 근 2년간 다른 말을 타고 다니며 새끼를 돌봐야 했는데 그 과정이 여간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홀로 다니는 여행객에게는 도적들이 유난히 들끓었기에 잠을 자다가도 칼을 휘두른 적이 셀 수 없었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어미 흑우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새끼를 살리려고 했던 것이 내 발을 붙잡았고,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음에도 늦어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흑우에 타고 몽골 게르를 지나며 얻은 날카로운 곡도와 양규 장군의 유품인 수패를 양손에 잡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성격마저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예전 삼국지 시대의 성격도 어쩌면 원래 준경의 성격이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어제 출진에서 각성하기 전까지는 품계가 낮은 별가직이라 말을 타지 못하고 보병 선두에 섰다가 전투에 지면서 후퇴하는 와중에 임간에게 청하여 말과 창, 칼, 방패를 얻어내서 부랴부랴 다시 달려나간 것이었다.

어제 전투를 지켜본 임간은 나에게 말을 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선봉에 세웠다. 일만 기병에게 돌진하라는 너무나 어리석은 명령이지만 지금 나에게만은 매우 기쁜 명령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공을 쓸어담을 차례였다.

한동안 내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먼저 성을 빠져나간 마포가 이미 나에 대해 알렸을 것이다. 어쩌면 우야소가 나를 시험할 수도 있었다. 어제의 일이 우연이었는지 진짜였는지 말이다.

여진에서도 곧 나를 발견했지만 적이 오직 한 명이라는 사실에 긴장감을 놓고 있었다. 말과 무기까지 바꾸고 출전했으니 어제 나와 겨루었던 자들이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고서는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여진 사이에서 말 한 필이 뛰어나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마포였다. 그는 창을 크게 돌리며 나를 향해 휘둘렀다.

“무슨 짓인가!”

워낙 허점이 커서 그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마포가 급하게 소리쳤다.

“선봉에 두 명의 족장을 처리해준다면 추장은 장군께서 무슨 일을 하든 믿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가장할 테니 이대로 달리십시오.”

우야소는 두 가지를 노리고 있었다. 나를 다시 시험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고 있는 두 명의 족장을 처리하여 역모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리라.

내가 칼로 마포의 창을 힘차게 내려치자 마포는 휘둥그레지더니 풀썩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생각보다 충격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봐 준거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마포를 뒤로하고 나를 영접할 전사들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 명이 여흥 삼아 나를 잡기 위해 출전하는 것으로 알았던 여진은 그 한 명이 삽시간에 낙마하자 이번에는 열 명 정도가 출진했다. 그중에는 부족장의 징표를 가진 자도 섞여 있었다. 마포가 말한 두 명 중 한 명일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두문(豆門)의 족장이다. 너 같은 애송이가 내 이름을 들어보았겠느냐마는 고려군을 치기 전에 네놈을 내 칼의 제물로 삼아주마.”

“두문소(豆門小)!"

사십 대로 보이는 시커먼 얼굴의 부족장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자신의 이름을 일개 젊은 별가가 알고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작년 고려에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고 완안부가 잡고 있는 주도권을 빼앗을 궁리를 했지.”

두문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위에는 자신의 부하밖에 없었지만, 혹시나 완안부의 전사들이 들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이 고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입조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비밀리에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일개 별가 따위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말투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을 떠올리며 고려가 완안부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내심 웃었다. 그러고 보면 고려와 조선의 사관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별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역사서로 남겼으니 말이다.

“일개 별가 주제에 많이도 알고 있구나. 그러나 그것으로 명년 너의 제삿날이 결정되었다!”

내가 더 떠들기 전에 일찌감치 제거할 생각을 굳히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속전속결은 나 역시 바라던 바였다. 나를 깔보며 열 명의 여진 기병만을 거느린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컥!”

섬광이 열 번 빛나자 내가 한 행동은 눈을 깜박이는 것이었고 그다음이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기병이 도주하며 활을 쏘는 행위가 가장 잡기 까다롭다면 나를 우습게 보고 덤벼주는 것이 가장 쉬운 전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홀로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며 수없이 겪었던 일이었다. 하나같이 유목민족들에게서 말이다.

마지막은 두문소였다. 그의 배에 칼을 깊게 찔러 넣자 그를 구하기 위해 부족 전사들이 말 고삐를 급하게 낚아채며 달려왔다. 여진 기병 열 명이 고려 병사 한 명을 못 잡는다는 것은 여진에게 있어 길 가다 벼락 맞을 가능성보다 낮았다.

어제 여진 기병은 일만 중 우야소가 직접 이끄는 삼천만이 전투에 참전했고 나를 겪어보지 못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소문이 났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야소가 치욕스럽다며 함구시켰을 가능성이 있었다.

“네 이놈!”

두문 부족 외에도 옷차림이 다른 부족이 하나 더 섞여 있었다. 아마도 선봉에 선다는 두 부족장 중 남은 한 명을 따르는 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들은 회팔(恢八) 부족이다.

“감히 내 친우를 죽이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회팔의 부로(夫老)다!”

잔뜩 위엄있는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사실 감흥 자체가 오지를 않았다. 삼국지 시대였다면 이런 자들의 행적까지도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대의 사료는 정말 유명한 사람들을 빼놓고는 거의 자료가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검지를 까딱했다.

“잔소리 말고 덤벼.”

여포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삼국지의 나였다면 절대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장에 서면 마치 진짜 척준경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내 생각과 무관하게 몸이 멋대로 칼을 피하고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정말 기이한 경험이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몸은 생각과 다르게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덤벼드는 두문과 회팔 부족을 상대로 나는 끊임없이 손발을 쉬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3월이 되어 윤관이 이곳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윤관이 부대를 지휘하며 이룬 공과를 보면 여진 기병 30명의 수급을 취한 것이 전부다. 그리고 고려군은 정확한 사상자를 적고 있지 않지만 출진한 군사의 절반이 사상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쯤 되면 금나라가 송나라를 상대할 때 17명의 기병이 삼천 명의 보군을 상대로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일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전혀 거짓말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여진의 수급은 자세히 적으면서 고려군의 피해는 제대로 적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려는 것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패배라는 방증이나 다름없으니 척준경이 여진을 상대로 보인 무훈 또한 그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놈 인간인가!”

부로는 얼굴에 점점이 묻은 피를 닦을 사이도 없이 나에게 계속 밀리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이미 오십여 구 이상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고 부로를 살리기 위해 일천에 가까운 선봉군이 모두 투입되고 있었다. 부로를 살리기 위해 여진 기병이 가로막으면 그를 베었다. 베고 또 베고 계속 전진을 해나가자 어느덧 뒤에서 함성이 들렸다.

전투 시기를 재고 있던 고려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일천의 여진 기병이 방향을 돌리는 순간 일패도지할 전력임에도 임간은 얼굴에 한 가닥 미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하긴, 그런 전세 판단이 있었다면 임간이 계속 중용되었겠지.’

그것이 임간과 윤관의 차이였다. 시세를 파악하여 협상을 통해 평화라도 얻은 윤관과 달리 오직 임금이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체면이 깎였다는 고지식함에 함몰되어 파면의 운명을 맞이하는 임간이었다.

칠십 명을 벨쯤에는 회팔의 부로는 두려워 멀찍이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끝까지 쫓았다. 여진의 말도 하나같이 강건한 말이었지만 한혈마의 피가 흐르는 흑우는 우습다는 듯이 힘차게 땅을 박차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으아아!”

큰 소리로 두려움을 나타내며 도망치는 모습은 꼴불견 그 자체였다. 부족장을 돕기 위해 가로막는 자들이 나타났지만 가장 수가 많은 완안부의 전사들은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런 치욕을 보이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명예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지금쯤이면 죽일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추격전을 계속한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나 정말 나쁜 놈이 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전혀 양심의 가책은 들지 않았다. 아니 이것이 전쟁이 아니겠는가? 삼국지 시대에서는 지도를 펼쳐놓고 전략을 구상하되 전술은 항상 구경만 하는 신세였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전략이 전쟁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라면 전술은 그 과정을 매끄럽게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다. 삼국지 시절 나는 선한 의도로 최소한의 전쟁을 시작했다면 그 전쟁에서 전술 목표를 받은 장수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명령에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내가 내리는 명령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고민해야 했을까?’

전쟁에서 배려는 제약이 따른다. 내가 세운 계획 대부분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송겸 등의 희생은 그런 내 전략 때문에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그들은 내 뜻에 동참해주었다. 나는 그때 그들이 내 대의를 알아주는 것이라 이해했지만 지금 직접 뛰는 처지가 되어보니 꼭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추격전은 그만두고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흑우의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자 흑우는 힘차게 뛰기 시작했고, 곧 부로의 등이 가까워졌다. 나는 말의 엉덩이에 칼질했다. 말이 고통에 몸을 뒤틀자 부로는 잠시 중심을 잃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소리와 함께 부로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고 나는 떨어질 때를 노려 머리칼을 낚아챘다.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목 부분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찬 바람과 어울려 김이 서렸다.

“부족장의 원수를 갚아라!”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지켜보고만 있던 나머지 두문과 회팔의 전사들이 참지 못하고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현대의 누군가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전문 용어를 썼을 법도 했을 것이다. ‘썩소’라고 말이다.

============================ 작품 후기 ============================

고려와 불꽃처럼을 병행하는 것이 힘이 부치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에 집중해야 할 것 같은데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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