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9) 일룡일사(一龍一蛇) =========================================================================
문제는 내가 선택을 이루기 위해 아직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용이 되는 길은 무엇이며 뱀이 되는 길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용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패도의 길인가? 몽골의 칭기즈칸 흉내라도 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민국의 부활을 시도하여 중국을 차지했다고 생각해보자 고려와 중국이 합쳐 거대한 제국이 되고 천 년이 지났을 때,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규정될까? 고려인일까? 중국인일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금, 원, 청나라가 중화라는 단어에 흡수되었듯이 우리 역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말이다. 로마에 포함되기를 바랐던 속주들이 그랬고, 미국의 한 주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카리브 연안의 소국들이 그렇다.
물론 그 시대쯤 이르면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할 것이다. 대국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으로 굳어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중국과 한반도가 조각조각 갈라져 여러 개의 나라가 되어 현대보다 더 약체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민 제국이 일개 왕조로 끝나 거의 잊힌 것처럼 말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벽쯤 되었겠지만, 여전히 세상은 칠흑에 잠겨 있었다. 봄이 오기 전인 2월이니 동이 늦게 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내 앞날을 예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목표가 있어야 사람은 추진력이 생긴다.
나는 먼저 그 선택을 위한 기반을 만들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마치 삼국지 상에서 처음 노숙을 만났을 때 목표가 내 생존을 위해 원술 세력을 살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작은 것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다 보면 시냇물이 강물에 편승해 바다로 향하듯 걸맞은 대의도 따라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을 하니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이제 곧 패전에 대한 문책 인사가 떨어지겠지. 임간을 비롯해 수뇌부 전체가 파면될 것이고 한 달 뒤 윤관이 이곳으로 와서 지휘를 맡게 되지만 역시 패하게 된다. 그러나 나만은 공을 세운다.”
윤관까지 패전하자 숙종은 윤관에게 전투에서 패한 원인을 묻게 된다. 윤관은 그 자리에서 보졸로 기병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여 이름만 유명한 별무반의 결성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렇게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았지만 힘들게 쌓아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온 여진군을 당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패퇴하고 화친을 논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동북 9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별무반보다는 척준경 개인 기량에 의존했던 것이 컸다.
“숙종이 내년이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별무반을 준비 중에 숙종은 죽는다. 그는 아들 예종에게 유언을 남겨 여진 정벌을 계속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는 데 숙종 때부터 예종 때까지 3년의 준비기간, 17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는 총력전을 전개했지만, 승리의 기쁨은 겨우 1년에 불과했고, 국고는 국고대로 탕진했으니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었다. 남경을 새로운 수도로 삼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까지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고려가 차츰 기울기 시작하는 시점은 이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달에 임간을 대신해 이곳으로 올 윤관이 패하기를 방관하면 별무반이 결성되기까지 3년의 세월이 있다. 일단은 그 세월을 벌어야 한다. 역사에서 척준경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별무반 원정 당시를 생각하면 아마도 3년간 천리장성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이자겸이 도움을 주고 있을 때, 행동이 용이할 정도까지는 벼슬을 끌어올려야겠다. 3월이 되어 윤관이 병력을 이끌고 재차 출진할 때, 우야소의 도움을 받는다면 역사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중앙 관직은 관심도 없다. 동북면병마사 정도를 목표로 삼아보자.”
양계를 담당하는 것은 국경을 지키는 중요한 요직인데도 문신들은 서로 나서기를 꺼렸다. 현재 동북면병마사는 나와 안면이 있는 인물로 동남아시아를 같이 종횡했던 추억이 있었다. 바로 김한충이었다. 휘하에는 당시부터 함께 했던 강증이 있었다. 육로를 김한충이 방비하고 있다면 동계의 수군은 강증이 이끌고 있었다.
김한충은 유능하긴 하지만 전형적인 문신이었다. 그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를 중앙 요직으로 밀어주는 것이 차라리 나에게 나았다. 오히려 김한충의 손발 노릇을 오랫동안 해온 강증이 나에게는 제일 필요한 인물이었다.
“윤관이 패하고 돌아가면 틈을 봐서 무승 십 인도 불러 들어야겠다.”
십 년 만에 고려로 귀환한 그들을 알아챌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나 몰라 개경 인근 조그만 암자에 머물도록 조치했었다. 이자겸에게 부탁하면 간단했지만, 기억을 되찾기 전에 나는 그들을 이자겸이 모르는 숨은 방수로 쓸 생각을 했었다. 원정군을 쫓아온 고의화에게 그들을 부탁했는데 아마도 윤관이 이곳으로 부임해올 정도가 되면 그들에 대한 소식이 오지 않을까 예상했다.
10년 사이 노쇠하고 부상당한 자들도 있어 전투가 어려운 자들도 있었지만 그런 자들은 그런 자들대로 써먹을 수 있는 자리를 주면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믿을 만한 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문제인데.”
동북면병마사까지 따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윤관이 패해서 물러나는 전투에서 나는 우야소와 짜고 큰 전공을 올릴 것이고, 그 후 일 개월 정도는 인근 정찰을 도맡은 후 우야소가 모아준 시체들을 끌고 가기만 하면 이자겸이 알아서 직책을 올려줄 것이다.
동북면병마사가 되면 동계의 모든 병권이 내 손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야소와 계속 밀접한 관계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동생이 바로 금 태조인 아구다이기 때문이다. 아구다를 떠올리니 문득 동경에서 그를 만났던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십 년을 누구보다 많은 위험과 전장을 헤쳐왔다. 손바닥을 펴자 손가락들은 당장에라도 칼을 쥐여주면 실력을 입증하겠다고 혈맥을 펄떡이고 있었다.
“고영창도 만나야지.”
고의화와 함께 나에게 무도라는 것을 알려준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수벽타는 이제 완벽하게 나에게 녹아들어 의식하지 않아도 수벽타의 모든 기술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들이 나의 수벽타를 본다면 이것은 수벽타가 아니라고 할지도 몰랐다. 숱한 실전 속에서 나에게 꼭 맞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고영창은 아구다가 금을 세우고 요나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면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하니 그 사이 고영창과 아구다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예전의 나는 고영창이 부른다면 기꺼이 그를 돕겠다고 말했다. 그를 도와 발해를 재건국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몽골이 떠오를 시기를 생각하면 발해가 과연 몽골을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고려가 수십 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요건이 한몫했는데, 발해는 기마민족이 날뛰기에는 너무나 편했다. 그래서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자 삽시간에 무너졌던 것이 아니겠는가?
“3년.”
별무반이 동원되면 내가 크게 활약할 무대가 마련된다. 그리고 그 판을 더욱 키울 수 있는 것은 3년간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강증을 통하면 일본으로 갈 수 있다.”
현재 일본은 헤이안 시대로 귀족 문화가 한참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이전까지는 귀족에게 무사 계급이 천대받았는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라는 걸출한 무사가 출현하면서 점차 무사 계급이 귀족 계급을 향해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고려와 일본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겪는 셈이었다. 고려 무신정권 초창기 시절 일본 역시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 가마쿠라 막부의 시초가 된 사람이 바로 미나모토모 요시이에였다. 교토의 공경들은 그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신분이 낮은 그가 자신들 곁에 가까이 다다르는 것은 싫어했다. 요시이에는 자신의 할 일을 하며 묵묵히 세월을 보냈다.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군을 토벌해도 정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군자금도 대지 않았다. 요시이에는 정부에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가산을 팔아 병사들을 포상했고, 병사들은 그런 요시이에의 행동에 감동 받아 사병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이 훗날 가마쿠라의 막부의 밑천이 되었으니 현대의 위정자들에게도 꼭 되새겨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요시이에는 고령이라 앞으로 2년 정도면 사망하게 된다. 장남은 예전에 죽었고 차남인 요시치카는 요시이에를 쏙 빼닮아 대장군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라고 하는데 정부로부터 아버지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역사에 기록되기를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1092년에 쓰시마의 수령으로 발령받은 요시치카가 무분별한 살인을 일삼아 처리해야겠다는 지방 관리의 장계가 중앙에 접수된다. 정부는 요시이에에게 아들을 토벌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종용하는 것이 얼마후면 일어날 일이다.
나는 이 시기의 사서를 읽을 때마다 항상 의문이 들곤 했는데 요시이에가 2년 뒤에 갑자기 사망하고 그 사망의 책임을 물어 차남인 요시치카가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만약 요시치카가 사서에 적힌 데로 쓰시마의 백성을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죽였다면 요시이에의 가신들이 한결같이 요시치카에게 붙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 유리한 쪽에 기술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떠올려본다.
확실한 것은 지금쯤 요시치카가 쓰시마를 벗어나 이즈모국(出雲?)에서 날뛰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즈모국은 현대 일본의 시네마현과 돗토리현을 포괄한 지역으로 동해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면 규슈보다도 오히려 빨리 닿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마치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즈모국에서 2년간을 날뛰면서도 인근 영주들이 감히 상대하지 못해 중앙에서 결국 토벌군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토벌을 당하지만, 토벌 과정은 한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것 같았지.”
아버지 요시이에만큼이나 강하다고 소문이 났던 요시치카는 정부군이 펼친 단 한 번의 공격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는 데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를 공격했던 마사모리가 요시치카에 비해 객관적으로 많이 부족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시라카와 상왕은 마사모리가 개선을 하기도 전에 미리 포상을 내린다. 기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선례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죽음이 짜고 치는 것은 아닌가, 절로 의심이 들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 후 20년이 흐르면서 요시치카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네 차례나 있었다는 것, 요시이에의 사남인 요시타다가 가문을 무사히 승계했다는 것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조정에서 그에게 가문의 존속을 제의했을 수도 있다는 예측을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토벌군 지휘관이었던 마사모리는 충성심에 비해 그동안 전공이 없어 중용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라카와 상왕은 토벌의 성공을 내세워 단숨에 태수 직과 중앙 요직을 수여했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강증과 함께 이즈모국으로 가야 했다.
“대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했던 요시치카를 정처없는 유랑자로 그냥 보내기에는 아깝다. 마사모리와 합의를 보리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그를 데리고 오겠다는 것은 장차 쓰시마를 염두에 둔 것도 있었다. 쓰시마에서 살육을 벌였다는 것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쓰시마의 전임 영주였다. 이 시대 쓰시마 영주는 좌천으로 여겨질 정도로 헤이안 조정에서는 관심 밖이었다. 더구나 가까운 규슈 지역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강력한 영주 없이 해적들이 난립했다. 헤이안 시대의 정부 영향력은 일본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마쿠라 막부 정도 되어야 고려, 몽골 연합군을 막기 위해 규슈에 성벽을 쌓으면서 중앙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기겠지?”
현재 일본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무장, 요시치카를 설득하려면 아무래도 그와 겨루어 힘의 우위를 가리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