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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64화 (6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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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룡일사(一龍一蛇)

한탄도 잠시 내게 주어진 조건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낮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상황파악 없이 우야소와 밀약을 맺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삼국지 때와 똑같이 나는 먼저 목표를 설정하기로 했다. 민국의 부활인가? 아니면 역사대로 살면서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척준경은 이자겸을 도와 역모에 가담했던 말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이자겸의 역모를 돕는 바람에 역신이 되었다가 바로 마음을 돌린 덕분에 동시대의 임금인 인종은 역신에서 풀어주고 자손들에게도 출사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열어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역적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일룡일사라는 말이 있다.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거나 뱀이 되어 못에 머문다는 뜻이다. 난세냐 태평한 시대냐에 따라 용이 되어 영웅이 될 수도 뱀이 되어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용인가? 뱀인가?

이 시대는 용이 뛰어놀 수 있는 시대인가? 아니면 뱀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시기인가?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곧 금나라가 태동할 시기로 요나라와 송나라가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일패도지할 것이다. 그 와중에 고려는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오히려 화친을 제의받았는데 그것이 모두 척준경의 공이었다. 거란과 송의 정예병을 무참히 박살 낼 정도의 실력을 갖춘 여진의 장수들이 한결같이 척준경에게 현격한 무위로 밀린 뼈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로서는 환란을 피한 격이 되었지만, 그것이 꼭 옳은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자신감은 무신을 더욱 괄시하는 배경이 되었고, 결국 무신 정권이 시작되는 초석이 된다. 만약 척준경이 존재하지 않았고, 고려가 형편없이 밀렸다면 무신은 우대받았을 것이고 무신 정권이 열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다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샘솟았다. 이건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기운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야생의 야수처럼 말이다.

나는 한쪽에 놓인 수패를 끌어당겨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오랜 세월 함께한 수패는 너덜너덜했지만, 그때마다 나무를 덧대고, 가죽을 덧대면서 마치 가족 같은 푸근함이 느껴졌다.

내가 임간을 따라 원정군의 일원으로 출진했을 때, 뒤늦게 내가 나타났다는 것을 전해 들은 고의화가 원정군에 합류한 적이 있었다. 순전히 나를 보기 위해 잠시 동행한 것이다. 그때 그는 수패의 출처가 귀한 것이긴 하지만 너무 오래 썼다며 유명한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가져다줄 수 있다고 했지만 거절했었다. 같은 수패를 가질 수 있겠지만 양규 장군이 친히 적은 대인불사란 문구는 오직 이 수패에만 간직된 것이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목숨을 살려준 십년지기 동료이기도 했다.

“하여튼 바보 같다니까?”

수패를 빼앗아 가죽을 기워주던 이소의 새침한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소는 못 보던 사이 여인이 되어 있었고, 자수를 놓는 것은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중원에서 이소를 대면하던 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기억들이 많았다. 특히 소동파가 예전 나의 영지라고 할 수 있는 남경(말릉)에서 사망한 것은 정말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소동파의 유진(遺塵)을 이은 것은 그의 동생, 소철이었는데, 그것을 확인하고 소철을 찾아 다다른 곳이 삼국지 때의 지명으로는 허창이었고, 지금은 영창(穎昌)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남경을 갔다가 다시 영창으로 가는 행로였으니 도중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장강 이남의 민심이 점차 요동치고 있어 당장에라도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과 그럼에도 송 조정은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시기의 송은 휘종이 다스리던 때로 유능한 재상이었던 증포가 실각하고 수호지 상에서 삼대 악인으로 나오는 채경, 고구, 동관 등이 실세로 떠오르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영창에서 이소를 만나던 날, 이소가 눈물을 흘리며 내 정강이를 발로 힘껏 후려쳤다. 숱한 난관을 이겨온 나에게 있어 모기가 모는 수준이었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아픈 발길질로 기억에 남았다. 몸보다 마음이 고통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저 이소를 껴안고 그녀가 울기를 멈출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형 못지않은 뛰어난 문인이자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이기도 한 소철은 이소와의 재회를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고는 슬며시 소동파가 남긴 서신을 건네주었었다.

소동파는 자신이 죽기 전에 내가 나타나지를 않자 동생을 불러 이소를 비롯한 가족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내게 남긴 서신에서 내가 이렇게 오래 떠나있을지 몰랐다며 내가 떠난 지 오 년이 지나고 단정홍이 찾아와 민국실록의 행방을 말해달라고 하자 그 행방을 결국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가 예측한 장소는 문무대왕릉이었다. 우마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셈이 된 것이다. 단정홍은 단서를 듣고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리와 고려는 별반 교류도 없었고, 거리도 매우 멀었다. 대리의 왕이자 자신의 형이기도 한 단정순을 지키고 보좌하는 중요한 임무를 버려두고 홀로 오랫동안 떠나있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단정홍이 떠올렸던 사람은 나였다. 내 소식이 아직도 없다는 말에 그는 일단 대리로 떠났고, 언제고 내 이름이 들리면 그때 움직이겠다는 여운을 남겼다.

소동파는 자치통감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우연하게 얻은 사본으로 연구했는데 구한 사본이 파본이 적지 않아 완벽한 사료를 얻지 못했다며 자치통감을 미처 다 수정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완벽한 사본은 동관이 대만에서 얻은 것으로 후일 진본을 찾지 못하거든 그 사본이 진본이나 다름없으니 찾고자 한다면 염두에 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소는 참으로 현명하고 아름답게 자라났다. 내가 수양딸로 삼자 주변에서 매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준경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구나. 너희 둘의 결합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부디 이소가 행복해졌으면 좋겠구나.’라고 남겨 이소와 일순간 어색해지기도 했다.

이소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나와 자매뿐이었다. 그런 믿음으로 십 년을 버텨온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까웠을 것이다.

서신을 끝까지 다 읽고 어색해하는 이소에게 나는 손을 가져가 그녀의 머리에 얹었다. 십 년 전만 해도 꼬맹이에 불과했던 소녀가 이제는 절세가인으로 자라났다는 것이 세월을 실감케 했지만 내게는 여전히 꼬맹이 그때 그 시절의 이소였다.

“이제야 돌아왔어.”

“잘 왔어.”

이소는 간신히 멈춘 눈물이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소동파, 소철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지만, 그녀는 자매, 나와 함께했던 과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소철의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 고려로 향했다. 고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서주 일대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저 귀찮은 일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양산박의 호걸들과 차례로 마주쳤었기 때문이다. 인육을 파는 흑점인줄 몰랐다가 음식에 탄 마취제를 깨닫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었고, 이소의 미모를 탐내서 인근 절을 점거한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도 했었다. 양산박을 지날 때는 여러 소동으로 소문이 난 나를 처리하기 위해 세 두령이 삼백 명의 부하와 함께 협공한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시기는 수호지 인물들이 양산박에 합류한 때는 아니었다. 하나둘 억울한 일을 겪는 태동기인 셈이기에 나를 공격한 자들은 말 그대로 진짜 도적들이었다. 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자 그들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양산박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어서 빨리 고려로 갔으면 하는 내가 그곳에 머무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언제고 양산박에 오게 되면 형님의 자리를 비워두겠다고 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며 코웃음만 쳤다.

만약 그때 내 기억이 돌아왔더라면 양산박을 배경으로 삼국지를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삼국지 때보다 조건도 좋았다. 휘종이 삼대 간신을 중용하면서 송을 지지하는 민중은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다.

양산박의 도적들을 크게 혼쭐냈다는 소식에 서주 포구에 다다를 때까지 많은 인물이 경탄하며 술을 사기 위해 또는 친분을 쌓기 위해 다가왔다. 송강을 만났고, 송강을 통해 조개, 오용을 소개받았다.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 형제는 우리가 떠날 적에 등에 메기도 어려울 정도로 민물 생선을 가득 담아 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수호지 상에서 호걸 사귀기를 좋아하는 부호, 시진이었다.

그는 영천에서 일부러 나를 만나기 위해 서주까지 달려왔다. 나에게 모실 기회를 달라며 빈객이 되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는데 만약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고구와 엮이게 될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에 내 소식을 듣고 쫓아온 호연작과 오랜만에 재회하며 옛일을 추억한 것이 송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날이었다. 노준의나 동평은 속한 군부가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벽란도에 도착했다.

개성에 오니 옛 거처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고의화를 찾았지만 고의화는 집안일로 전주로 내려간 상태였다. 그래서 찾은 것이 이자겸이었다. 이자겸은 나와 이소를 보고 처음에는 매우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난 다음에는 혀를 차며 내게 아쉬움을 전달했다.

“처음에는 네놈이 흥왕사에서 벌인 거사가 성공했다는 말에 기뻐했다. 그러나 이내 종적도 없이 도망쳤다는 말에 화가 났다. 비록 시한부이긴 하지만 명문의 여식을 잠시나마 아내로 맞아 양반 호적에 올릴 기회를 매몰차게 박찼기 때문이다. 차마 그 아이에게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죽었다.”

시한부라고 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자겸의 장녀였다. 딸이 처녀로 죽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일방적으로 이자겸이 결정했던 것이었으니 화는 날지언정 나를 깊이 타박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자겸 자신이 이씨 문중의 실권을 잡게 된 결정적 사건의 주역이었으니 서운한 감정보다 나중에는 오히려 잘 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아하니 벼가 익어 쌀이 되었으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소를 내 수양딸로 삼고 자네가 나의 사위가 되면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함께할 수 있을걸세.”

숙종은 이자겸의 야심을 눈치채고 그를 적절히 견제했다. 이자겸은 물밑으로 세력을 모으며 언제고 비상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숙종이 승하한 날이 될 것이다. 십 대 시절부터 나의 무위가 이미 범상치 않음을 목격했던 이자겸으로서는 나의 재등장은 부족했던 무력을 채워주는 마지막 열쇠였다.

이소는 이씨 문중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내가 허락했다. 이소를 데리고 매번 전쟁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걸 고의화에게 매번 맡기기도 미안한 것이었고, 고의화 본인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숙종의 기세에 밀려 이자겸이 세도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입을 통해 들은 물밑 작업들은 고려를 전복하고도 남을 만한 세력의 구축이었다. 숙종이 살아 있는 이상 이자겸이 함부로 기를 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면 이소를 보호하기에는 적절한 대상자였다. 물론 그때는 그리 깊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보호해줄 대상자를 찾았고 이자겸이 비록 야심은 크나, 수족에 대한 믿음은 제법 있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제의하기도 전에 이자겸은 이소를 수양딸로 삼은 것과 내가 사위가 되었다는 것을 몇몇만 아는 비밀로 삼자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순간까지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였기에 모든 것을 감추고 싶어했다. 그 제안은 나 역시도 찬성이었다. 고의화가 알게 되면 실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역사에는 척준경과 이자겸은 사돈으로 나온다. 척준경의 딸이 이자겸의 아들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자겸의 세도가 한창때의 일로 그 이전부터 밀착관계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이자겸이 젊은 척준경에게 내민 보상은 무엇이었을까? 그 의문의 답이 바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자네는 이제부터 내 사위가 되었으니 적극적으로 밀어주도록 하지. 자네라면 혼자서라도 공을 세울 것이 분명하니 여진족의 목을 자를 때마다 전공을 제대로 포상받을 수 있도록 힘을 쓸 것이네.”

흉포한 왜구들조차 무서워서 감히 침범할 생각을 못하는 평화로운 고려에서 오직 적은 북쪽밖에 없었다. 공을 세우려면 북쪽으로 가야 했지만, 지휘를 문신이 맡는 고려의 직제상 문신들은 전쟁을 일으키길 꺼렸다. 자신들의 목숨이 달렸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여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면서 부랴부랴 대응군이 꾸려졌다. 천리장성을 지키는 병사들로는 부족하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여진의 무서움을 알기에 먼저 나서고 싶어하는 문관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로서는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자연스럽게 원정군에 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자겸이 적극적으로 손을 쓰면서 십 년간의 행적은 지방직을 전전한 것으로 바뀌어 있어 나를 의심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의심을 품을 만한 자는 윤관이나 고의화 정도인데 당시에는 둘 다 도성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고의화가 일을 마치고 도성에 돌아와 내 소식을 알게 된 다음에 부랴부랴 원정군 행렬을 쫓아와서야 십 년 만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이자겸이 제대로 손을 썼다면 나는 곧 천우위 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겠군.”

역사대로라면 이제부터 5년간이 여진을 상대로 싸우는 시간이었고 눈부신 전공을 모두 이때 다 세운다. 고려를 계속 공격할 엄두가 안 난 여진이 방향을 바꿔 중원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척준경에게 당한 화풀이를 거란과 송에게 하는 셈이었다.

“용이 되어야 할까? 뱀이 되어야 할까?”

이제는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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