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8) 거세개탁(擧世皆濁) =========================================================================
국가 간 전쟁보다 오히려 종교, 부족 간 전투가 더욱 잔인하고 집요했다. 종교와 부족이 모두 걸린 일이 되자 12이맘의 군주들은 아낌없이 지원책을 내놓았고, 무사 앗사라드를 지지하는 남아랍의 베르베르, 베두인이 참가했다. 카라미타가 지난 과오를 참회하는 목적으로 참전했다는 소식에 북아랍에 은거하고 있던 드루즈가 거들기 위해 찾아왔다.
점차 규모가 늘어나니 알라무트로 향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카라미타의 이탈로 비어버린 바스라는 12이맘을 신봉하는 인근 아바단의 영주가 차지하기로 했다. 원체 지리적 조건이 좋은 곳인지라 각지의 상인들이 초기 자본을 선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제 서쪽의 십자군 침입은 마치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자군이 공격한 곳은 하나같이 수니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셀주크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능력보다 행운이 매우 따랐다고 보아야 한다. 무슬림이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티오크(1098년 6월)를 함락시키고 예루살렘(1099년 7월)을 얻은 후, 파티마 왕조와 사이가 틀어져 1차 십자군 최후의 전투라는 아스칼론 전투(1099년 8월)을 치르기까지 십자군은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특히 안티오크에서는 점령 직후, 성창, 롱기누스가 발견되면서 십자군 사이에 불화가 싹텄다. 그것은 차후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켰지만 무슬림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당장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A History of the Crusades 中
-아나톨리아, 아라비아,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무슬림 군주는 이교도는 언제든지 쫓아낼 수 있는 파리 정도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서로의 사정을 잘 아는 같은 무슬림 교도가 더 큰 위협이라고 보고 서로 전쟁에 열중했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이미 내전이 끝나 십자군과 연수를 제의할 정도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았지만 셀주크 제국은 말리크샤 사후 여러 명의 후계자와 맘루크 출신 성주들이 독자세력화하면서 점차 쇠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힘은 일개 세력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컸다. 그 정도로 대단한 수니파 종주라는 패권을 쥐려는 방편으로 수니파의 정신적 지주, 칼리프, 알 무스타지르와 그가 머무는 바그다드를 차지하는 자가 곧 셀주크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인식이 싹텄다. 마치 저 먼 중국, 고대 민나라가 전토를 통일하기 전, 천자를 끼고 있는 자가 제후를 호령하던 시절처럼 말이다. 수니파가 이렇게 자신들의 세력을 깎아 먹고 있을 때, 아랍과 페르시아의 시아파가 충돌하며 내전에 돌입했다. 시아파의 종주라 외치던 파티마 왕조는 그들을 중재하려 했지만, 주 시선은 십자군의 행보에 쏠려 있었다. 미지근한 중재로 오히려 반발만 커졌고, 동맹으로 삼고자 했던 십자군과의 불화로 전쟁에 돌입하자 아랍과 페르시아 간 시아파 분쟁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마치 유럽의 30년 전쟁을 보는 것처럼 아랍과 페르시아 간 시아파 분쟁은 인근 국가를 자극했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닌 종교와 부족이 얽힌 자존심 싸움이었기에 처음엔 관망하던 세 국가가 작은 오해로 엮이기 시작하면서 하마단에서 사마르칸트, 가즈니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는 이유로 역사가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잊혔던 역사가 다시 세인들의 관심에 떠오른 것은 최근 발굴된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가 해석되면서부터이다. 7세기 중엽, 페르시아의 한 왕자가 나라를 잃자 가신들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건너갔고, 당시 중국의 당은 신라로의 망명을 적극권유하여 그들이 신라에 정착하고, 왕자는 그곳의 공주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쿠쉬나메의 발견은 무엇보다 11세기 아랍과 페르시아 간 시아파 분쟁에서 아랍 측에 서서 맹활약했다고 알려진 ‘코레아’란 이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기도 하다. 앞서 터키 부르사에서 발견된 십자군 서간에서 악마 같은 코레아란 단어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흑해 인근 아르메니아, 투르크메니스탄 기마유목민이 용병으로 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새롭게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코레아는 실제로 고려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시기 고려는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 가능성은 충분하며 차후 계속된 발굴 조사에 따라 정설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The History of Iran 中
12이맘파가 가세하면서 알라무트는 단숨에 점령될 것으로 믿었다. 무사 앗사라드의 지하드 선언과 잔지에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베르베르, 베두인까지 몰려들면서 대략 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파죽지세로 진군을 시작했다. 하마단 인근에 이르렀을 때쯤 알라무트가 새로운 동맹을 끌어들였다는 정보를 접했다. 셀주크가 바그다드를 놓고 내분을 일으킨 사이 셀주크 못지않은 동쪽의 강국, 가즈나 왕조가 이만의 병사를 파병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왜 알라무트를 지원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곧 알게 되었다. 가즈나 왕조는 페르시아에서 인도 북동부까지를 지배하는 강자였으나 전성기가 지나면서 성장한 인접국의 도전을 받는 처지였다. 그들은 수니파였지만 술탄의 힘이 강해지면서 전제군주에 가까운 형태를 띤지라 종교와 정치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기에 술탄은 세속적인 권력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알라무트의 암살자들은 가즈나의 술탄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가즈나는 자신했다. 자신들의 군세에 놀라 남아랍의 무리가 페르시아를 떠나 아랍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이다. 마치 도시 국가 간의 전투에 거대한 제국이 참전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6개월이 흐르도록 하마단 북부를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 명의 영웅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준경이었다. 처음엔 사막 전투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익숙해지자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전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사신의 암습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숙련된 자객만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약 산장로, 하산 사바흐가 십자군을 돕기 위해 시리아 일대로 파견한 자객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면 준경은 초반의 위험을 넘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팽팽한 전투 속에서 양측 다 막대한 손해를 입었지만, 소수 정예 위주인 알라무트의 손실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끝내 알라무트에 다다르지 못했다. 지하드를 이끌어낸 율법자, 무사 앗사라드가 암살당하는 사고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준경과 타티키오스를 상대로 한 암습을 포기하고 한 번의 틈을 노려 전력을 다해 친 것이 주효했다.
1년 가깝게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감이 쌓인 12이맘파는 지도자의 죽음을 계기로 전쟁에서 물러났다. 남은 것은 12이맘파는 아니지만 무사 앗사라드와 같은 유랑 귀족으로서 북아랍의 카이시, 남아랍의 야마니가 이끄는 사병 일천 명, 이젠 생존자가 백 명도 채 남지 않은 카라미타 뿐이었다.
적은 일만이 넘었다. 그들은 준경과 타티키오스를 상대로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단숨에 전쟁을 끝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변수가 생겼다.
가즈나 왕조가 서쪽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서 고르(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영주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에 더해 북부의 카라한 왕조가 가즈나와 셀주크의 영토를 동시에 노리며 군대를 일으켰다. 그들은 중앙 아시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던 때도 있었으나 셀주크와 가즈나가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까지를 거의 반분하자 북쪽에서 칼을 갈고 있던 참이었다.
단순히 알라무트의 하사신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준경과 타티키오스의 행보는 중앙아시아의 굳어진 세력판도를 제대로 흔든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못했다.
가즈나 왕조의 병사가 모두 물러나자 남은 이들은 천혜의 요새, 알라무트에서 농성을 결정했다. 이제는 일천 이하의 소수 병력 간의 대결이었다. 타티키오스와 준경은 그들과 한 달을 치열하게 싸웠으나 최소한 열 배의 병력이 있지 않고서는 함락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알라무트는 난공불락이었다.
타티키오스조차 포기할 생각을 했을 때, 준경은 결심했다. 혼자서라도 저 성을 반드시 넘겠다고. 그러지 못하면 고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이다.
*****
알라무트의 비원(秘苑)은 낙원과 같다고 했다. 그 낙원에 나는 적으로서는 유일하게 발을 디뎠다. 그리고 하산 사바흐의 목에 칼을 겨눴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순간 그가 웃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칼을 떨어트렸다. 어느새 내 뒤에 나타난 두 명의 하사신이 내 등에 단검을 박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허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내 양손을 들었다. 투박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손이었다.
“꿈이 아니었어.”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단순히 동작인데도 혈맥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업무상 묵는 관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제법 화려한 것이 일개 별장이 잘만한 관사는 아니었다. 대패를 당한 상황에서 그래도 체면치레할만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위에서 인정한 덕분이었다.
“우야소의 목숨을 살려주고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 그 증표로 부러진 화살 하나를 받았고.”
화살을 부러트려 서로 나눠갖는 것은 흔한 약속의 방식이었다.
“정말 꿈이 아니란 말인가? 정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찌 이다지도 삼국지에서 겪었던 처음 상황과 똑같단 말인가? 유년 시절부터 25살에 이른 지금까지의 기억이 모두 떠올랐다.
“농담처럼 여겼던 것이 현실이 되었어.”
아쉬네를 만났던 것이 떠올랐다. 이만이라는 대군이 하마단 인근에 이르렀을 때, 타티키오스와 함께 아쉬네에게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찾아갔었다.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단지 그녀가 말을 할 때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딴청을 피우듯 자신의 호위와 신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일어나 그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그들은 비명을 지를 시간도 없었다.
“우리의 주요 생산품에는 대마도 있어요.”
아쉬네는 죽은 이들을 보며 아쉽다는 감정이 전혀 없었다. 하마단은 인근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라는 명성대로 대마를 재배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마를 얻기 위해 알라무트에서 대대로 중립을 지켜온 하마단을 먼저 공격할 수는 없었다. 대마만 제대로 공급해준다면 하마단의 중립은 계속 보장될 것이라는 회유와 협박이 뒤따랐고, 휘하 신하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도 계속되었다.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담보로 잡히자 영주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예전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남은 해결책은 알라무트의 소멸뿐이었다.
“왜 나였느냐고 그녀에게 물었지. 그녀는 내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때는 그녀가 대략의 내용을 설명해주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민국실록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아쉬네는 자신들은 민국실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자신들에게 남은 옛 민국의 고서는 한 권뿐이며 집안의 가보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싱에게 주었던 편지들, 그 내용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나는 ‘쾅!’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래 언젠가 내가 아내들을 모아놓고 술에 취해 농담조로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내가 다시 환생한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무인으로 이름을 떨친다면 좋겠다고……. 그때의 농담을 아싱은 허투루 듣지 않았던 거야. 인연? 이런 것이 인연이라고?”
당시에는 책을 읽지 못해 멀뚱멀뚱 책만 들고 있자 아쉬네가 웃으며 말했다.
“준경이란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지요. 선조께서는 부군인 민 태조를 굉장히 신뢰하셨어요. 지금까지 준경이란 이름은 역대에도 많이 있었지만, 성이 없는 준경은 제가 알기로 오직 당신뿐이었어요. 고려에서 이곳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우연은 인생을 살면서 몇 차례나 있을까요?”
확실히 이준경이란 이름은 그 후 반란군이나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한 명씩은 그 이름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이씨가 많아진 것이 나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었으니 일부러 준경이란 이름을 붙이고 성을 붙이지 않아 평민으로 행세하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아쉬네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나는 운명의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따라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 이것이 800년 전의 농담의 대가라면 하늘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갑자기 등이 욱신거렸다.
나는 윗옷을 벗고 한쪽에 마련된 동경에 등을 비춰보았다. 날갯죽지 부근에 두 자루의 칼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알라무트에서 하산 사바흐와 두 명의 자객을 상대한 것도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사마르칸트를 거쳐 천산북로를 따라 중원에 접어들었고, 작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고려에 도착했다.’
알라무트를 떠나 고려에 닿기까지 무려 6년 여정의 시작이었다. 수많은 유목민족을 만났고, 협력과 때로는 전투로 갈음했다. 서하를 지나 송으로 접어들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가?
‘이것도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을까?’
카라칼라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경기 시설과 위락 시설을 갖추기로 하고 그 재료를 인근 만리장성에서 구하고자 해체를 단행한 것이 민 제국의 붕괴 이후 유목민족의 침입을 부추겼다.
사회의 변혁은 진보를 낳지만, 진보는 새로운 혼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는 온 힘을 다했지만, 그것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