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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62화 (62/257)

00062  (8) 거세개탁(擧世皆濁)  =========================================================================

“그들은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다. 곧은 자세, 기품있는 걸음, 제왕 같은 위엄이 서려 있지. 푸른 색 옷은 그들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지금껏 이 근방을 종횡하면서 푸른 색 옷을 입은 자들을 보지 못했소만.”

“바스라 남쪽으로 사막이 시작된다. 아라비아에서 가장 덥고, 가장 추운 곳이기도 하지. 그들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자파르는 확신하고 있었다. 20년간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현재는 겨울 우기다. 그들은 겨울 우기에는 자신들의 영역으로 지정한 사막에 머물다가 여름 건기가 되면 비옥한 땅을 찾아 떠난다. 바스라 남부 사막은 대대로 ‘야마니’의 영역이니 그대들이 때를 잘 맞춰왔다.”

“야마니?”

“고귀한 혈통은 북아랍과 남아랍에서 각기 비롯되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북아랍에서 기원한 자들은 ‘카이시’라 하고 남아랍에 뿌리를 둔 자들은 스스로 야마니라고 부른다.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은 같은데 ‘셰이크’라는 존칭을 쓴다. 그러니 잘 기억해두도록 하라.”

“그것참 모를 것 투성이로군.”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튀어나오는 용어들에 타티키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파르는 무리를 향해 준비를 서둘 것을 소리쳤다. 워낙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인지라 무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챙길 것이 없어 준비하는 시간은 짧기만 했다. 이백 년을 싸웠다면 그 와중에 재보가 쌓일 법도 했는데 자파르는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식솔까지 합하면 천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동을 준비해야 하는지라 그 사이 자파르와 타티키오스, 준경 등이 바스라 남부로 향했다.

바스라 남부 사막 또는 쿠웨이트의 북부 사막이라고 불리는 곳은 자파르가 언급한 것처럼 밤이 되자 그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추위가 일행을 감쌌다. 그러나 타티키오스나 준경에게는 별반 영향을 주지 못했다. 0도 혹은 약한 영하권의 날씨 정도로는 더 추운 겨울을 숱하게 경험해보았던 둘에게 있어 초가을 아침 날씨 정도나 마찬가지였다.

자파르는 능숙한 길잡이였다. 한때 바레인까지 통치했던 이력이 있었는지라 모래밖에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별을 보고 정확히 길을 알아냈다.

야마니는 인근 오아시스에 있을 것이라며 주변을 찾기 시작했는데 운 좋게도 첫 번째로 들른 오아시스에서 야마니의 표식을 찾았다. 그들은 오아시스에 머물게 되면 자신들이 머무르고 있다는 뜻으로 인근 말뚝에 푸른 천을 박았는데 그것을 보고 단숨에 찾아낸 것이다.

“셰이크, 알 나프드가 살해당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오아시스를 찾아온 손님은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대다수 유목 민족의 특징이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투아레그족은 더욱 친절했다. 그들은 ‘추위’,‘허기’,‘고통‘은 사막을 살아가며 겪는 친구나 다름없다며 같은 것을 경험한 이들과 자신들이 언제 처지가 바뀔지 몰랐기에 호의를 다했다.

그들은 대략 삼십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남자는 1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였다.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이다.

일행의 우두머리에게 자파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을 꺼냈지만 돌아온 것은 일족 전체가 살해당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남아랍의 ‘야마니’들은 복수를 위해 그 흉수를 찾고 있다고 했다.

자신을 ‘무사 앗사라드’라고 밝힌 사십 정도의 셰이크는 흉수의 정체를 밝히며 이를 갈았다.

“천한 베두인 부족이 있다. 그들은 최소 일천이 넘을 것이나 정확한 수는 모른다. 카라미타 장로, 그대들의 선조가 벌인 업보가 우리에게 불똥 튀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알 나프드 일족이 살해당한 것이 카라미타의 업보라니?”

전통에 따라 호의를 베풀기는 했지만, 셰이크가 자파르를 보는 눈빛은 처음부터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자파르의 되물음에 셰이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살렙(Salep)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지간히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준경 역시 살렙을 입가로 가져갔다. 계피 향이 코끝을 자극하자 마치 고려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알라무트의 일을 처리하고 한시라도 고려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살렙(Salep) : 오르키데(Orkide, 터키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다년생 식물)의 원액에 우유를 붓고 꿀이나 설탕을 넣은 후, 계피로 마무리한 차. 이 당시 설탕은 인도, 스페인, 베네치아 등을 통해 구할 수 있었으며 사치품이었다.

“그대들이 메카를 습격했던 것을 기억하시오?”

“메카를?”

자파르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약 160년 전, 자신들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메카 습격만큼은 결단코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전에 메여 있던 노예들이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했소. ‘잔지’ 말이오.”

당시 아프리카 동부는 이슬람의 노예무역이 횡행했다. 노예를 ‘잔지’라고 했는데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그들이 아랍으로 많이 유입되자 반란을 일으키는 예도 있었다.

“잔지는 사막에 숨었고, 카라미타가 바스라로 떠나고 난 다음부터 복면을 두르고 지나가는 대상이나 일반 무슬림을 상대로 약탈을 시작했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철저히 베두인 족이 되었소. 약탈로 얻은 아내들에게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대를 잇자 점차 잔지의 형상마저 사라졌소. 사대째가 되자 외모만큼은 완벽한 베두인이라 할 수 있으나 한 가지가 빠졌소.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막의 명예, 그것은 겉으로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본성에 새길 수는 없었던 것이오.”

자파르는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행동이 후손인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에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힘이 있었을 때, 나라를 세웠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신념과 힘만 있었을 뿐, 미래를 생각하며 종파를 인도할 지도자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티키오스는 일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알라무트로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잠자코 있던 준경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 사막에 없기에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그게 무슨 뜻이지?”

셰이크가 눈을 빛냈다.

“말 그대로입니다. 남아랍과 북아랍의 사막을 모두 전전했는데도 그들을 찾지 못했다면 이곳에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들의 숫자가 일천이 넘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적지 않은 수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베두인이 잔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시체 중에 흑인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피를 희석했다고 해도 골격은 숨길 수가 없지. 처음 살해 현장을 발견한 셰이크의 말로는 공격한 낙타의 수가 최소 오백 마리는 넘으리라고 예측하여 대규모 인원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주로 찾았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단서가 있다. 살인 현장에서 알 나프드 일족 소유의 낙타가 아닌 전혀 다른 낙인의 낙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혹시 흉수의 것이 아닌가 싶어 만나는 셰이크마다 그 낙인 모양을 알려주었다.”

그는 모랫바닥에 낙인 모양을 그렸다.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타티키오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우연이 있나!”

타티키오스의 외침은 나무에 매인 낙타들이 놀라 뒷걸음질칠 정도로 컸다. 준경 역시 그 낙인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처럼 여겨졌다. 자신들이 마주친 베두인은 오직 한 무리밖에 없었다.

“설마?”

준경과 타티키오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타티키오스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쥔 채, 자파르에게 말했다.

“우리가 상대하려던 베두인, 그들이 탄 낙타에 바로 이 모양과 똑같은 낙인이 있었소.”

“그것이 정말이오?”

자파르도 무척 놀란 눈치였다. 셰이크가 자초지종을 말해달라고 끼어들자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셰이크는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놈들이 받을 대가가 설마 북쪽에 자신들이 자립할 수 있는 영토를 원한 것인가?”

카스트 제도에서 하층민에 속하는 베두인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귀족에 해당하는 자들은 대부분 아랍과 아프리카 북부를 오갈 뿐 거의 같은 경로를 유지했다. 귀족 간에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은 아나톨리아나 자그로스 산맥 이북으로 향할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아라비아나 아프리카 북부만 해도 평생을 돌아다녀도 다 보지 못할 만큼 광대한 사막을 품고 있었기에 그중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만을 했을 뿐이다. 애초에 잔지의 출신들이 아프리카니 설마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가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레이를 기점으로 중앙 사막(카비르 사막)이나 동부 사막(루트 사막)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지도 모르겠군. 여름을 피할 산맥도 있고, 오아시스도 제법 많다. 무엇보다.”

타티키오스는 주먹으로 모랫바닥을 내리쳤다.

“육로, 실크로드의 대상을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순순히 보내줬던 것도 자신감의 표현이겠지. 인근에서 자신들을 어찌할 수 있는 자들은 없다고 말이야!”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알라무트의 산장로 하산 사바흐의 수완이 대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의도치 않았지만, 자신들의 계획을 망쳤음에도 필요에 의해 잔지의 베두인과 서둘러 손을 잡았다는 것은 더 큰 이득을 얻어낼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가뜩이나 시아파의 세력이 아랍이나 아나톨리아에 비해 큰 페르시아 지역이다. 또한, 대대로 페르시아를 얻는 자가 거대한 제국을 일으켰다.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인가…….’

타티키오스와 준경, 자파르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셰이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푸른 복면을 벗자, 주변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일족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셰이크는 마치 유럽의 백인을 보는 것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더 창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청람색 의복을 항상 걸치고 있기에 온몸이 파란색으로 물드는 투아레그족 특유의 전통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온몸이 푸른색으로 물드는 것을 더 좋아하여 여인들은 입가에 푸른색 염료를 칠할 정도였다.

“우리는 늘 새로운 초목을 찾아 길을 떠난다. 황폐한 땅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서다. 때로는 고통이 있지만, 고통 또한 신이 내려주신 삶의 일부분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나를 알기 위한 신성한 여정 일부가 아니라 이유 없이 당해야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알림의 뜻대로!”

준경은 알림이란 말이 셰이크의 경칭인가 싶었는데 자파르의 안색이 잔뜩 굳어지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까부터 자파르를 바라보는 셰이크의 눈초리를 보면 단순히 셰이크 한 명이 죽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알림이란 단어가 그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알림이자 파키프, 무사 앗사라드가 고한다. 12이맘의 신자들이여, 이스마일의 분파, 니자리와 그에게 동조한 잔지를 상대로 지하드(Jih?d)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자파르가 떨고 있었다. 그토록 강한 신념의 사내가 무엇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일까? 타티키오스와 준경은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알림은 이슬람의 율법자, 철학자, 신학자를 포괄하여 가리키는 단어이고 파키프는 그중 율법자를 뜻한다. 12이맘은 시아파 최대 파벌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자랑했고, 그런 12이맘의 율법자라면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지하드는 성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율법에 규정한 지하드는 네 가지였다. 지배, 검, 마음, 필(筆)로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고, 평화를 원하는데 부득이 원치 않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도 지하드가 성립되었다.

문제는 카라미타의 처리였다. 12이맘은 카라미타 역시 대대로 마뜩잖게 여겼다. 그러나 수니파가 카라미타를 대하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시아파라는 한배에 타고 있다는 동질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아파인 니자리파의 일을 계기로 털고 가야 한다는 의견이 일족들 사이에서 대두하였다.

자파르는 종파를 살리기로 한 이상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무릎을 꿇고 목숨으로 죄를 갚겠다고 나서자 이번 지하드에서 카라미타가 선봉을 맡아 절반이 죽기 전까지는 전장 이탈을 금하는 명령을 받았다. 용서를 받으려면 절반은 죽어야 한다는 끔찍한 형벌에 준경은 혀를 내둘렀지만,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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